과천에 가면 추사의 편지도 있고,
대한민국 최초 서양화가의 자화상도 있고,
경기도 무형유산 무동답교놀이도 있고,
국내 최초의 거리예술제 과천공연예술축제도 있다.

1980년대 동물원 옆에 미술관이 들어섰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왜 서울이 아닌 과천에 자리 잡았을까. 박찬경 작가는 “당시 미술관 건립을 결정지을 만큼 권력이 있던 이들이 현대미술을 골프보다 못한 여가이자 놀이동산 비슷한 가짜 낙원에 불과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무해한 아름다움이나 무익한 교양’으로 여겨지던 미술의 위상이 40년 사이 완전히 달라졌다. 해마다 전 세계 컬렉터와 미술인이 모이는 국제 규모의 아트페어가 열리고, 한국 작가들의 무대도 세계로 넓어졌다. 그 사이 과천도 많이 변했다. 정부청사가 들어서면서 대한민국 행정의 중심지로 거듭났고, 전답이 있던 자리에 넓은 도로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이전부터 과천에 터를 잡고 살던 이들과 새롭게 유입된 사람들이 어우러졌고, 과천이 간직한 문화유산 위에 새로운 문화 레이어를 더하는 중이다.
추사 김정희가 말년을 보내며 예술혼을 불태웠던 과지초당 자리에 추사박물관이 세워졌고,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의 ‘부채를 든 자화상’을 감상할 수 있다. 중국 그림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그림을 그렸던 작가가 남긴 자화상 3점 중 한 점이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으로 행차할 때 과천 부락민과 교감했던 역사적 장면은 과천 대표 무형문화유산 ‘무동답교놀이’로 전해진다. 매년 가을 도시 전체를 거대한 문화 놀이터로 만드는 과천공연예술축제는 이러한 문화적 토양 위에 축적된 새로운 레이어인 셈이다.
과지초당과 추사박물관
추사 김정희가 과천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1824년 아버지 김노경이 과지초당을 조성하면서부터다. 정원과 숲이 빼어나고 아름다운 연못이 있는, 일종의 별장으로 당시 추사 가문의 권위를 짐작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추사는 집안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경주김씨 명문가 자손이다. 증조할아버지 김한신은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혼인해 부마가 됐고, 할아버지는 영조의 외손자로 높은 벼슬에 올랐다. 큰아버지와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시쳇말로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난 셈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추사는 과지초당 인근에 묘역을 모시고 삼년상을 치렀다. 이후 과지초당에서 보내는 시일이 늘었는데, 유배에서 풀려난 1852년부터 서거 전까지 4년 동안 과지초당에서 지내며 학문과 예술의 절정기를 맞이한다. 추사의 서화 작품은 원숙기라 불리는 과천 시절 작품이 많다. 과천시는 추사의 삶과 예술혼을 기리고자 2007년 과지초당을 복원했고, 2013년 추사박물관을 건립했다.
추사박물관은 추사의 삶과 예술을 보고 체험할 수 있는 전문 박물관이다. 추사의 업적은 크게 두 가지. 추사는 중국과 다른 독창적인 글씨체인 추사체를 창출하고, 조선 금석학을 최초로 연구했다. 추사박물관에서는 추사의 생애부터 업적까지 살펴볼 수 있다.

‘추사의 생애’ 전시실 입구에는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비각에 새긴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竟)’ 조형이 있다.
추사가 소당 김석준에게 써준 부채 글씨 ‘선면예서 한예일자(扇面隷書 漢隷一字)’.
추사가 과천에 머물던 시기에 선보인 작품과 그를 잇는 근현대 작가의 작품으로 구성한 전시 <추사를 품다>.
추사연합전 〈추사를 품다〉
추사박물관은 경기도 남양주 실학박물관, 제주 추사관과 함께 10월 31일까지 2025 추사연합전 〈추사를 품다〉를 개최한다. 추사 관련 대표 기관들이 각각의 공간에서 공통된 주제로 고유한 전시를 운영하는 연합전이다. 추사박물관은 추사가 과천에 머물던 시기에 선보인 작품과 그의 예술 세계를 잇는 근현대 작가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를 구성했다. 추사체의 계승과 확장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시로, 3부로 나뉘어 진행된다. ‘추사와 그 제자’에서는 추사체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대표작 ‘한예일자’, ‘시경’ 탁본, 간착 ‘붓 천 자루, 벼루 열 개’를 비롯해 제자 조희룡의 ‘묵란도’, 허련의 산수병풍을 선보인다. ‘20세기 추사에 따라’에서는 이한복, 서병오, 유희감 등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활동한 추사를 본받은 후학들의 탐구와 창작 세계를 조명한다. 마지막으로 ‘추사체 현대적 변주’에서는 여인숙, 이동원, 이관우 등 현대 작가들이 추사의 사상과 미학을 각자의 언어로 재해석한 작품을 전시한다. 서예사에서 가장 창조적인 추사와 이를 계승한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전통의 깊이와 현대적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다.
Q&A 추사박물관 허홍범 학예사
20년 가까이 추사의 학문과 업적을 연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추사 선생은 서체 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서예가입니다. 기존 서체의 틀을 벗어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완전히 새롭게 창조한 서체로, 글씨의 구조와 선의 리듬감, 여백의 미까지 모두 실험적이고 예술성이 높습니다. 추사 이전에도 추사가 없었고, 추사 이후에도 추사가 없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죠. 금석학은 쇠나 돌에 새긴 글씨를 연구하는 학문인데, 추사는 이 분야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조선 최초의 학자예요.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하고 연구한 것도 추사 선생이죠. 놀라운 것은 추사의 고증학 수준이 근대 과학에 육박한다는 점이에요.
〈추사를 품다〉에도 많은 작품이 출품됐는데, 눈여겨보면 좋은 작품을 추천해주세요.
‘붓 천 자루 벼루 열 개’는 추사 선생이 돌아가시기 한 해 전에 쓰신 편지입니다. ‘제 글씨는 비록 자랑할 거는 아니지만 칠십 평생에 벼루 열 개를 갈아서 구멍을 내고 붓 천 자루를 다 닳게 했습니다’라는 내용인데, 자신의 글씨를 쓰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 토로하고 있어요. 개인 소장품으로 이번 전시를 위해 20년 만에 공개되었습니다.
한자가 익숙하지 않은 세대에게 추사의 작품은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을 텐데요.
박물관에서 하루 네 차례 전시 해설을 합니다. 해설을 듣기 전에 천천히 전시장을 둘러보세요. 상설관을 먼저 보고, 기획전도 보세요. 분명 자신을 사로잡는 작품이 있을 거예요. 그 작품을 좀 더 오랫동안 보세요. 그러다 궁금한 것은 해설사나 학예사에게 물어보세요. 해설을 들으셔도 좋고요. 그리고 다음에 오셔서 또 같은 방법으로 감상해보세요. 다른 작품들이 마음에 들어올 겁니다.

‘추사의 학예’ 전시실에서는 추사의 학문적 성과를 자세히 알 수 있다.
2013년 6월 3일 추사가 태어난 날에 개관한 추사박물관.
과천의 상상력은 현실이 된다
해마다 9월이면 과천은 일상이 예술이 되고 도시 전체가 거대한 무대가 된다.
일상을 예술로 물들이는 프로젝트
광장 문화가 발달한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어렵지 않게 거리 공연을 접하게 된다. 예술가와 관객이 같은 높이의 무대와 객석에서 소통하며 교감하는 공연.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일상에서 즐기면서 관객은 도시 생활의 스트레스와 삭막함으로부터 해방되는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일상 예술의 힘을 믿는 과천에서는 오래전부터 거리극을 중심으로 한 축제를 진행해왔다. 과천공연예술축제는 1997년 ‘세계마당극큰잔치’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한국 최초의 거리극 중심의 축제다. 초기에는 국내외 전통 마당극과 거리예술 공연을 소개하며 반향을 일으켰고, 이후 과천 시민의 자발적 참여와 지역 공동체의 협력 속에 성장해왔다. 2023년에는 과천공연예술축제(GPAF)로 명칭을 변경했다. 과천공연예술축제는 거리극과 무용, 음악, 퍼포먼스 등 다양한 공연으로 시민과 소통하며 과천뿐 아니라 인접한 도시에서 관객이 찾아오는 축제로 성장했고, 2023년과 2024년에는 대한민국축제콘텐츠대상에서 ‘축제 예술·공연 부문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과천의 시간 속에 남겨질 우리의 이야기
오는 9월 19일부터 21일까지 사흘간 과천시민광장에서 ‘2025 과천공연예술축제’가 열린다. 기존의 형식을 벗어난 새로운 기획과 구성으로 시민과 예술이 더욱 가깝게 호흡할 수 있는 무대로 구성한다. 2025 과천공연예술축제는 ‘기억과 상상이 솟아오르는 시간’을 주제로, 가상의 도시 ‘지팝시티(GPAF City)’를 선보인다. 축제는 단일 무대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 구성에서 벗어나, 퍼펫 등을 활용한 세계관 기반 연출로 축제 장소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 구조로 설계한다.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을 시각적 밀도와 몰입감 있는 공간 구성이 주목된다. 축제 콘셉트인 ‘떠오르다(Rise)’와 연결된 콘텐츠들이 광장 곳곳을 채우며, 관객들은 27년간 함께해온 축제에 대한 기억과 다채로운 상상력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될 것이다. 과천공연예술축제는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삶의 아름다운 기억의 한 조각이 되는 경험이 될 것이다.
한편 과천문화재단은 과천공연예술축제 외에도 지역 문화예술 발전과 시민들의 문화 향유를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한다. 매년 봄마다 국내외 최정상 아티스트의 무대를 만날 수 있는 과천재즈피크닉을 진행하고, 봄과 가을마다 도심 속 캠프닉(캠핑+피크닉)데이를 개최한다. 또한 시민들이 일상에서 부담 없이 수준 높은 음악을 무료로 접할 수 있는 ‘수요음감회’를 진행하며, 시민들이 직접 예술을 배우고 체험할 수 있도록 전문 강사진이 참여하는 문화예술 교육 프로그램 ‘예술아카데미’도 운영한다.

시민이 하나 되는 과천공연예술축제 서커스 타임.
과천문화재단의 일상예술 프로젝트 ‘ㅋㅋㅋ 재미있는 연극 시리즈’ ⟨슈만⟩의 한 장면.
Q&A 과천공연예술축제 유재헌 총감독
과천공연예술축제만의 차별화 전략이 궁금합니다.
관람 중심의 축제가 아니라, 시민이 주인공이 되는 스토리 기반 축제입니다. 다수의 축제가 섭외 위주의 프로그램 중심으로 구성된다면, 과천공연예술축제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무대가 되어 세계관과 캐릭터가 시간의 흐름 속에 개입합니다. 매년 하나의 주요 캐릭터가 등장하고 다음 해 세계관을 암시하며 연결되는 구조는 국내 축제에서는 드문 서사형 멀티버스 퍼포먼스 시스템이라 자부합니다.
올해 반드시 관람해야 할 공연이 있다면 추천해주세요.
세계관의 서문을 여는 개막 공연 〈기억의 문이 열린 날〉과 과천시향과 함께하는 로맨틱 가든 콘서트 〈지브리 엔니오 모리코네를 만나다 OST 콘서트〉 그리고 기억을 하늘로 날려보내는 폐막 공연 〈기억의 빛으로 날아오르다〉까지, 축제의 주제와 서사를 가장 밀도 있게 체험할 수 있는 무대를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감독님께서 생각하는 거리예술축제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경계가 없다는 점입니다. 무대와 객석, 예술가와 관객 사이의 벽이 허물어질 때, 우리는 진정한 ‘공유의 예술’을 경험하게 됩니다. 과천공연예술축제는 특히 일상 속 공공 공간이 상상의 무대로 변모하며, 누구나 우연히 예술을 마주치고, 때로는 개입하게 되는 열린 서사적 축제입니다. 이러한 예측 불가능성과 즉흥성은 무대 위 예술이 갖지 못하는 거리예술만의 생동감을 선사할 것입니다.
MORE INFO.
과천공연예술축제
세계마당극큰잔치 '97 경기-과천을 시작으로 매년 9월이면 국내외 야외극·거리극 중심의 수준 높은 공연을 펼쳐 보이고 있다. 2023년부터 과천공연예술축제로 명명해 그 정체성을 명쾌하게 드러낸다.
gcfest.or.kr
추사박물관
과천시 추사박물관에서는 추사 김정희의 모든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상설전시로 추사의 생애, 추사의 학예, 후지츠카의 기증실 전시실에서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으며, 추사와 연관된 테마로 다채로운 특별전시를 선보인다. 올해는 테마전 〈돌에 새긴 추사 글씨-추사 김정희의 금석문 서예〉와 추사연합전 〈추사를 품다〉가 관람객과 만나고 있다.
gccity.go.kr/chusamuse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