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최북단에 자리한 이 산악 지방은
알프스를 가로지르는 다양한 문화적 흐름 속에서
오랜 세월 독자적인 성격을 형성해왔다.
트렌티노Trentino는 지각 충돌로 형성된 지역이다.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국경 바로 남쪽, 남티롤South Tyrol의 울창한 침엽수림과 맞닿아 있는 이곳에는 가문비나무 숲과 유백색 호수 위로 돌로미티산맥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약 6000만 년 전 아프리카와 유럽의 지각판이 충돌하면서 형성된 회분홍빛 상어 이빨처럼 날카롭게 솟은 봉우리들이 대지를 감싸 안는다.
고대 로마 시대, 이곳은 제국의 변방이었다. 특히 오스트리아 국경에 자리한 인근의 브레너 고개Brenner Pass는 알프스를 넘어오는 사람과 언어, 요리법이 교차하는 관문이었다. 오늘날에도 그 영향은 트렌티노의 목조 레스토랑에서 맛볼 수 있는 푸짐한 스튜에서부터 외딴 산악 지역에서 쓰이는 고대 게르만 방언까지 곳곳에 스며 있다.
물론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몰려드는 곳은 남쪽의 호숫가 마을 리바 델 가르다Riva del Garda와 북쪽의 마돈나 디 캄필리오Madonna di Campiglio 스키 리조트 같은 외곽 지역이지만 트렌티노만의 독특한 매력은 이곳의 더 조용한 구석구석에서 빛난다. 유령이 나온다는 성, 숲속 미술관, 알프스 포도원 등은 이 지역의 대표 명소로, 모두 주도인 트렌토Trento에서 쉽게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첫째 날. 라비올리와 르네상스의 매력
오전
여행은 아디제강Adige River을 가로지르는 도시 트렌토에서 시작해보자. 이곳은 한때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비단, 호박, 향신료를 실어 나르던 상인들이 모여들던 교역의 중심지였다. 그만큼 풍요로웠던 트렌토는 1545년 교황 바오로 3세가 종교개혁에 대응해 가톨릭 성직자들을 소집한 트렌토 공의회Council of Trent를 준비하며 르네상스 양식의 파사드에 화려한 프레스코화를 그릴 수 있었다. 현지 가이드 사브리나 데프라Sabrina Depra와 함께 ‘페인티드 시티Painted City’라 불리는 구시가지의 벽화 골목을 걸어본다. 그녀는 16세기 사냥 장면으로 장식된 카페에서 시작해 신들의 석상이 늘어선 웅장한 팔라초palazzo들로 안내한다. 그중 하나인 팔라초 델 디아블로Palazzo del Diavolo는 악마가 직접 세운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오후
점심은 트렌토 대성당 앞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반짝이는 바실리카를 바라보며 즐겨본다. 스크리뇨 델 두오모Scrigno del Duomo의 지하에는 고대 로마 시대의 와인 저장고가 숨겨져 있는데, 정중히 부탁하면 웨이터가 기꺼이 안내해준다. 수제 라비올리와 제철이라면 아스파라거스 리소토를 주문해 진한 자허토르테sachertorte 한 조각, 에스프레소 한 잔과 함께 포장해 강을 따라 남쪽으로 걸어 이탈리아 최고의 과학박물관 가운데 하나인 MUSE 과학박물관으로 가보자. 유리 구조물의 6개 층은 주변 돌로미티산맥의 역사를 이곳의 험준한 바위들을 헤매던 선사 시대 수렵 채집인에서부터 산속에 화석으로 남은 고대 바다 괴물까지 깊이 있게 보여준다. 박물관 뒤편 정원에서는 석회암 봉우리를 배경으로 만개한 사과꽃이 장관을 이룬다.
scrignodelduomo.com, muse.it
저녁
MUSE에서 나와 트렌토 케이블카까지는 금방이다. 1925년 첫 운행을 시작한 이 케이블카는 아디제강 위로 400m 상공까지 오르며, 몬테 본도네Monte Bondone의 계단식 포도밭을 따라 사르다냐Sardagna 마을로 미끄러지듯 오른다. 꼭대기에 자리한 카페 트렌토 알타Trento Alta는 도시 전경을 내려다보며 선셋 아페리티보sunset aperitivo를 즐기기에 완벽한 장소다. 이곳에서는 프로세코, 소다수, 엘더플라워 코디얼elderflower cordial, 신선한 민트를 섞어 트렌티노-알토아디제Trentino-Alto Adige에서 탄생한 칵테일 ‘우고hugo’를 주문해보자.
진홍빛 석양이 산 너머로 사라질 즈음, 트렌토의 역사 지구로 돌아가 ‘오스테리아 아 르 두에 스페이드Osteria a Le Due Spade’에서 저녁을 마무리한다. 이곳에서는 부드러운 소고기와 사과 스트루델apple strudel을 맛볼 것. 이 레스토랑은 원래 1545년 트렌토 공의회 당시 순례자와 귀족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
둘째 날. 자갈길과 사제 교살범
오전
1920년대 초부터 현지인들에게 사랑받아온 빵집인 비아 수프라지오Via Suffragio의 ‘소시 트렌토Sosi Trento’에서 바삭한 빵을 하나 집어 든 뒤 50분 거리의 레비코테르메Levico Terme행 기차에 오른다. 발수가나 계곡의 레비코 호숫가에 자리한 이 온천 마을은 치유 효능이 있는 온천수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트렌티노의 페르지네Pergine 마을에서 이웃 베네토Veneto 지역의 바사노 델 그라파Bassano del Grappa까지 이어지는 72km 길이의 발수가나 자전거길Valsugana Cycleway 경로에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발수가나 렌트 어 바이크’에서 자전거를 한 대 빌려 브렌타강Brenta River의 옥빛 물줄기를 따라 서쪽으로 달리면 보르고Borgo 마을에 닿는다. 자갈길과 다채로운 색감의 집들이 어우러진 이 마을은 마치 ‘베니스의 축소판’ 같다. 2022년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목록에 이름을 올린 곳으로, 한번쯤 꼭 느긋하게 둘러볼 만하다.
sositrento.it, valsuganarentbike.com
오후
여정을 이어 보르고 마을 위쪽 숲속 언덕 깊숙이 자리한 야외 미술관, 아르테 셀라Arte Sella로 가보자. 자전거로 오르기엔 제법 가파른 언덕이 이어지니 도중에 오스테리아 알 레뇨Osteria Al Legno에 들러 점심을 즐겨도 좋다. 목재 골조로 지어진 아늑한 식당에서 셰프 엘레나가 선보이는 스트란골라프레티strangolapreti, ‘목졸림으로 죽은 사제들’이라는 뜻의 만두류를 맛본다. 담백한 시금치 만두로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면 다시 자전거를 타고 미술관까지 올라가 보자.
푸른 초원을 배경으로 한 아르테 셀라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낡아지고 사라지면서 풍경과 어우러지도록 설계된 설치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이탈리아 환경예술가 줄리아노 마우리Giuliano Mauri가 2010년에 선보인 설치미술 〈카테드랄레 베제탈레Cattedrale Vegetale(식물 대성당)〉는 눈여겨볼 만하다. 너도밤나무 묘목을 예술적으로 배열해 만든 이 작품은 20년에 걸쳐 자라며 고딕 양식의 아치와 기둥을 형성하도록 설계되었다.
artesella.it, allegno.it
저녁
레비코Levico 북쪽 언덕에 자리한 중세 요새이자 호텔, 갤러리인 카스텔 페르지네Castel Pergine를 한번 둘러보자. 매미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면 만발한 재스민 사이를 거닐며 15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한때 머물렀던 탑으로 향하게 된다. 인접한 팔라초 바로날레Palazzo Baronale에는 국내외 예술가들의 현대 작품과 함께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초상화를 비롯해 성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페르지네에 ‘영원히 머무는 손님들’에 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직원 몇 명에게 자비로운 유령이 나타났다고 전해지는 화이트 레이디 룸White Lady Room도 놓치지 말자. 이어 팔라초 바로날레의 촛불이 켜진 레스토랑에서 송어과 민물고기인 북극 곤들매기와 진한 풍미의 커피 판나코타를 맛보며 현실로 다시 돌아오자. castelpergine.it
더 멀리. 모케니족의 계곡
트렌토에서 약 19km 떨어진 라고라이Lagorai 산맥 기슭에는 깊은 숲과 청록빛 호수가 어우러진 계곡이 있다.
이곳 모케니족의 계곡VALLE DEI MÒCHENI에 특유의 희귀 방언을 사용하는 고립된 공동체가 터를 잡고 있다.
필처호프
모케니족은 중세 시대에 바이에른Bavaria에서 지금의 트렌티노 지역으로 이주했으며, 외딴 산악 정착지 덕분에 오늘날 2000명도 채 되지 않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피에로초Fierozzo 마을에 있는 필처호프Filzerhof는 야생화가 만발한 목초지에 둘러싸인 18세기 농가로, 이곳에서 모케니족과 그들의 역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모케노 문화원이 정성껏 복원한 이 집은 반쯤 덮인 침대와 건초로 가득한 마구간 덕분에 마치 원래 거주자들이 막 떠난 듯한 느낌을 준다. 위층에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에 의해 거의 사라질 뻔한 모케니어의 유산을 조명하는 작은 갤러리가 마련되어 있다.
bersntol.it
식량 채집
수 세기 동안 모케니족은 산속에서 식물과 약초를 채집하며 살아왔다. 채집 가이드 프란체스카 제니Francesca Zeni는 계곡의 초원과 침엽수림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이런 지식을 되살리고자 한다. 참가자들은 수많은 산악 식물과 그 활용법을 배우며, 때로는 트릴비trilby 모자에 공작 깃털을 꽂은 지역 양치기들을 우연히 만나기도 한다. 여정은 요리 수업으로 마무리되는데, 참가자들은 채집한 가문비나무, 제비꽃 등으로 놀라울 만큼 풍미 가득한 다양한 야생 페스토를 만든다. 이후에는 인근 산악 레스토랑 반 스피츠Van Spitz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곳의 바에는 트렌티노 과수원에서 수확한 과일을 숙성한 그라파grappa 병들이 즐비하다.
visittrentino.info, baitavanspitz.it
에르데몰로 호수
향기로운 낙엽송 숲과 알프스 고산 목초지, 그리고 깨어진 바위들 사이를 지나가면 하트 모양의 빙하 웅덩이가 나타난다. 해발 약 2000m에 자리한 이 웅덩이는 맑은 날이면 사파이어처럼 짙푸르게 빛난다. 이 일대는 하이킹 코스가 가득한데, 그중 특히 아름다운 길은 페르시나강Fersina River의 비옥한 둑에 오두막들이 비스듬히 늘어선 작은 마을 팔루 델 페르시나Palu del Fersina에서 시작된다. 6월 초순이면 진달래꽃이 지천에 만발한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하룻밤 묵을 수 있는 산장인 세테 셀레 보호구역Sette Selle Refuge을 지나간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황금을 찾아 헤맨 중세 시대 광부들이 파낸 동굴 같은 광산 네트워크인 미니에라 델에르데몰로Miniera dell’Erdemolo까지 우회해 탐험해보는 것도 좋다. 
umpalai.it
지역 특산물
스펙SPECK
이 햄은 지중해식 염장 숙성과 북유럽식 훈제라는 두 가지 보존 기법이 결합되어 완성된다. 소금, 후추, 주니퍼(향나무 열매), 월계수 잎으로 간을 한 뒤 산바람에 말려 숙성시키면 특유의 향과 풍미가 배어든다. 이름은 ‘두껍다’라는 뜻의 고대 고지 독일어에서 유래했지만, 아페리티보로 즐길 때는 종잇장처럼 얇게 썰어 내는 것이 제격이다.
스트란골라프레티STRANGOLAPRETI
직역하면 ‘사제 교살범’이라는 다소 충격적인 이름이 붙은 이 요리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트렌토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찾아온 탐욕스러운 성직자들에게 지역 농민들이 대접했던 음식이라고 한다. 시금치로 반죽해 빚은 덤플링에 트렌토산 치즈 트렌틴그라나Trentingrana와 녹인 버터를 넉넉히 올려 낸다.
폴렌타POLENTA
북부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 거친 옥수수 세몰리나semolina를 오랫동안 주식으로 삼아왔다. 이 때문에 남부 사람들은 장난스럽게 그들을 ‘폴렌토니Polentoni(폴렌타를 먹는 사람들)’라고 부른다. 트렌티노에서는 발레 델 키에세Valle del Chiese에서 재배한 마나로 옥수수를 돌로 빻아 만든 스토로 폴렌타storo polenta가 명물이다. 녹인 치즈와 숲 버섯을 곁들여 소박하게 내면 가장 빛을 발한다.
주파 도르조ZUPPA D’ORZO
알프스산맥에서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만났다면 가까운 산장으로 들어가 이 구수한 수프 한 그릇을 주문해보자. 당근, 감자, 셀러리, 양파, 판체타, 오르조 파스타를 넣어 천천히 끓여낸 스튜 요리로, 여기에 펄 보리를 더하면 깊고 고소한 풍미가 완성된다. 돌로미티의 변덕스러운 날씨에 잘 어울리는 위로의 음식이다.
사과APPLES
트렌티노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과수원 지역으로, 발 디 논Val di Non 계곡에만 약 6900m2에 달하는 과수원이 펼쳐져 있다. 이 계곡에서 수확한 꿀빛의 골든 딜리셔스Golden Delicious 사과는 시나몬 향이 은은한 스트루델을 비롯해 트렌티노 최고의 디저트를 만드는 데 쓰인다. 
*** 더 많은 기사는 <내셔널지오그래픽 트래블러> 11월호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