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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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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3월호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는 높은 고도에 자리한 도시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지금 여성들이 조용한 요리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그들은 안데스산맥과 아마존 열대우림 지역에서 채집한 토착 식재료를 내놓는다.

엘알토시에서 바라본 안데스산맥의 와이나포토시 봉우리.

라파스La Paz 중앙 시장에서는 발밑을 조심해야 한다. 분필처럼 하얀 감자, 버터처럼 노란빛이 도는 감자, 까만 밤하늘처럼 짙은 남색 감자가 담긴 자루들이 발목 높이까지 쌓여 있기 때문이다. 바닥에는 흰색과 자주색 옥수수 껍질, 양팔로 껴안아야 할 만큼 큰 호박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사방에서 수백 명의 상인들 — 대부분 여성이다 — 이 나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다. 녹색 콩 더미 뒤로 한 여성 상인이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허리부터 박스 모양으로 주름이 잡히며 풍선처럼 퍼지는 볼륨감 있는 터키석 색상의 폴레라(안데스 지역 원주민 여성의 전통 복장) 치마에 갈색 알파카 울 숄을 두른 모습이다. 하나로 땋은 머리 길이는 허리까지 내려오고, 손톱에는 흙이 끼어 있으며, 손가락 끝은 거칠게 갈라졌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입술을 꼭 다물고 있던 그녀가 묻는다. “케 바 아 예바르Qué va a llevar(뭘 사실 건가요)?”
이 시장에서 일하는 대부분 상인처럼 그녀도 아이마라족이다. 아이마라는 볼리비아에서 케추아족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원주민 공동체로, 라파스 인근에 있는 엘알토El Alto 시에서는 가장 큰 원주민 공동체다. 은빛 의상이 그녀가 촐리타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촐리타는 과거 스페인 식민지 시절에 스페인 사람들이 볼리비아 원주민 여성을 폄하해 부르던 표현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전통 복식과 함께 원주민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긍정적인 명칭으로 복구되어 쓰이고 있다. 볼리비아 인구의 약 48%가 자신을 원주민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남미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다. 
이러한 정체성은 안데스고원에 자리한 라파스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특히 원주민 여성의 삶은 이 땅에서 자라는 작물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 카세라로 알려진 아이마라 여성들은 새벽부터 해 질 때까지 라파스의 식품 시장을 운영하며 토종 감자와 고추, 옥수수, 퀴노아, 카냐후아나 아차차이루처럼 희귀한 곡물과 과일을 수천 가지 판매한다. 이들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 재료를 다루는 여성 장인에 가깝다. 이처럼 식재료가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볼리비아의 식문화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주변 남미 국가들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라파스에서는 새로운 세대의 셰프들이 이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여성들이 있다. 

땅콩을 갈아 만들어 고소한 풍미가 살아 있는 소파 데 마니.
라파스의 구시가지에 남아 있는 스페인 식민기의 흔적.

“카세라아아Caseeeraaaa!” 내 뒤에서 우리 가이드 발렌티나 아르테아가Valentina Arteaga가 큰 소리로 누군가를 부른다. 가판대 주인의 굳은 표정이 순식간에 풀린다. 그녀의 앞니 두 개가 은색 하트 모양으로 다듬어져 있다. “발렌티나, 쿠안토 티엠포Cuanto tiempo(오랜만이야!)” 발렌티나가 가판대로 다가가며 이야기해준다. “누구에게나 단골 카세라가 있어요.” 발렌티나는 레스토랑 파야위Phayawi의 오너 셰프다.  파야위는 아이마라어로 ‘부엌’을 뜻한다. 이곳은 라파스에서도 드물게 전통 볼리비아 요리만을 선보이는 고급 레스토랑이다.
우리는 지금 로드리게스 시장에 와 있다. 라파스가 스페인 식민 지배에서 독립한 지 200년이 되는 해를 맞아 특별 메뉴를 기획하고 있는 발렌티나와 함께 장을 볼 예정이다. 발렌티나는 페루 리마와 스페인, 미국 등지에서 7년간 요리를 공부한 뒤 2020년 28세의 나이로 라파스에 돌아와 파야위를 열었다. 그로부터 2년 뒤 코로나19와 심화되는 경제 위기, 정치적 불안 속에서도 그녀의 레스토랑은 ‘라틴아메리카 50대 레스토랑’에 이름을 올렸다. 
“카세라들이 제게 영감을 줘요. 하루 16시간씩 일하고 등에 수십 킬로그램이나 되는 짐을 지고도 불평하지 않죠. 그들이 할 수 있다면 저도 이 식당을 해낼 수 있어요.”(발렌티나) 
시계는 오전 10시를 향해 가고 있다. 사흐라 오라, 라파스 사람들이 오전에 간식을 먹는 시간이다. 우리는 도냐 로헬리아Doña Rogelia가 운영하는 시장 가판대에 들러 뜨거운 왈라케를 먹는다. 왈라케는 티티카카 호수에서 잡은 카라치(크기가 작은 토착 민물고기)와 안데스산 민트로 알려진 크와라를 넣어 끓인 수프로, 식민지 시대 이전부터 이어져 온 전통 음식이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남은 플라스틱 의자 두 개에 겨우 자리를 잡는다. 작은 생선이라 먹으려면 손이 많이 가지만 생선 살이 부드럽고 버터처럼 달콤하다.
필요한 재료를 모두 사서 파야위로 향한다. 파야위는 라파스 남쪽 소나수르 고급 거주 지역 가운데서도 아추마니Achumani 동네의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일대는 라파스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도시를 대표하는 레스토랑들이 모여 있다.

라파스에서 만난 전통 복식을 갖춰 입은 촐리타 여성.

“새로운 요리를 만들 생각은 없어요. 볼리비아에는 이미 훌륭한 요리가 많거든요.” 그러고는 발렌티나가 불꽃이 그대로 보이는 넓은 장작 그릴이 놓인 주방으로 사라진다. 점심을 준비하는 주방팀은 거의 모두 여성들이다. 2층 구조의 넓은 식당 안에는 현지의 여성 예술가들이 그린 생생한 색깔이 돋보이는 축제 분위기의 대형 벽화가 걸려 있고 볼리비아 민속음악이 흐른다. 손님 대부분은 현지인이다. “파야위는 볼리비아 사람들을 위한 곳이에요. 사람들이 우리 음식을 먹고 집밥 같은 느낌을 받고 볼리비아 음식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한다면 그걸로 충분해요.”(발렌티나)
나는 먼저 소파 데 마니(일종의 땅콩 수프)를 주문한다. 땅콩을 갈아 넣은 우윳빛 국물이 은은하게 고소하다. 수프 표면에는 강황 오일이 황금빛을 띠고 수프에 들어간 바삭한 감자튀김이 식감을 더해준다. 이어서 나오는 이스피 프리토는 티티카카 호수에서 잡은 작은 생선을 바삭하게 튀긴 요리다. 튀김에 라임을 쭉 짜 머리부터 꼬리까지 통째로 먹는다. 다음은 케소 우마차다. 흰 옥수수와 치즈로 만든 부드러운 수프에 단맛이 도는 안데스산 아히 아마릴로 고추가 어우러진다. 여기에 민트와 바질을 섞은 듯한 안데스산 허브 우아카타이의 향이 더해져 상큼하다.
다음 날 새벽 5시 30분, 택시를 타고 동쪽으로 향한다. 목적지는 볼리비아의 수도 바로 위에 있는 팜파하시Pampahasi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이 아이마라족이며, 인근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시 엘알토가 있다. 해발 약 4000m에 이르자 차의 엔진이 힘에 부치는 소리를 낸다. 위에서 내려다본 라파스는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답다. 평평한 계곡 바닥에서 시작해 붉은 갈색 비탈을 따라 집들이 마치 하나의 그릇처럼 도시를 감싸고 있다. 케이블카는 분지와 형형색색 집들이 자리한 언덕 위 동네를 잇는다. 눈 덮인 와이나포토시와 일리마니 봉우리가 도시를 굽어보고 있다.
나는 빨간 철문이 달린 4층짜리 집 앞에 도착한다. 이름은 에밀리아나 콘도리리Emiliana Condoriri지만 모두가 도냐 에미Doña Emi라고 부르는 여성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연분홍색 폴레라와 파란 셰프 모자를 쓴 모습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름 냄새가 진동한다. 방 안에서는 아이마라 여성 세 명이 허리 높이의 통을 둘러싸고 앉아 그 안에 든 으깬 감자 반죽으로 렐레노를 만들고 있다. 렐레노는 소고기 스튜를 오랜 시간 졸여 부드럽게 된 소고기를 감자 반죽 안에 넣어 동그랗게 빚은 뒤 튀겨내는 라파스식 길거리 음식이다. 
도냐 에미를 상징하는 이 간식은 37년 전에 탄생했다. 수천 개의 살테냐(고기 스튜와 채소를 넣어 구운 볼리비아식 파이) 노점과 경쟁하던 끝에 그녀는 고기파이 대신 감자를 선택했다. 오늘날 그녀의 렐레노는 라파스를 대표하는 길거리 음식이 되었고,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스트리트 푸드: 라틴 아메리카〉에도 소개됐다. 
그녀가 건네준 갓 튀겨낸 뜨거운 렐레노는 겉이 바삭하고 속은 포슬포슬하다. 고기는 당근 덕분에 은은한 단맛이 난다. “처음 50개를 파는 데 다섯 달이 걸렸죠. 지금은 하루에 4000개까지 팔아요.” 함께 일하는 여성들이 내가 직접 만들어볼 수 있도록 자리를 내준다. 반죽을 누르고, 속을 채우고, 동그란 모양이 되도록 굴린다. 마지막으로 튀기는 과정은 도냐 에미의 몫이다. 그녀는 손으로 반죽을 기름에 넣고, 소리를 들으며 온도를 가늠한다. 균일하게 금빛이 되면 하나씩 건져 올린다. 일리마니산 위로 해가 떠오를 즈음, 도냐 에미가 마지막 렐레노를 건져 올린다. 이제 그녀가 라파스에서 운영하는 세 개의 노점으로 마지막 물량을 배달해야 한다. 하지만 그 전에 그녀는 먼저 포네르세 과파ponerse guapa, 즉 단장을 해야 한다.

파야위는 전통 볼리비아 요리를 현대적으로 풀어낸다.

도냐 에미가 형광 핑크색 폴레라로 갈아입고 나타났다. 알파카 숄을 두른 뒤 진주와 루비가 달린 브로치로 여며 고정하고, 머리에는 짧고 딱딱한 챙이 있고 동그란 형태로 된 초콜릿색 볼러 펠트 모자를 썼다. 그러더니 번쩍이는 금색 앞니를 드러내며 밴에 타라고 나를 향해 손짓한다.
산프란시스코 광장 앞 가판대에 도착하니 이미 현지인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렐레노가 제 인생을 바꿨어요.” 그녀는 손님들에게 땅콩 소스와 매운맛이 나는 초록색 로코토베르데 고추 소스를 나눠 준다. “이 옷도, 집도, 차도 전부 렐레노 덕분이에요. 남편보다 렐레노를 더 사랑해요.” 그녀가 장난스럽게 말한다.
라파스에서의 마지막 밤은 다시 소나수르로 돌아와 보낸다. 아마존 열대우림에서 영감받은 레스토랑 아라미Arami에서 저녁을 먹기 위해서다. 아라미를 시작한 사람은 마르시아 타하 모하메드Marsia Taha Mohamed라는 여성으로, 2024년에 라틴아메리카 최고의 여성 셰프로 선정됐다. 메뉴에는 아마존 원산으로 알려진 카이만 악어도 포함돼 있다. “아마존 지역 공동체와 협력해 재료를 공급받고 있어요. 환경과 윤리를 고려해 책임감 있게 수급합니다. 생산자를 지원하고 더 나은 식품 관행을 통해 볼리비아 아마존을 보호하고 싶어요.”(마르시아)
전채 요리로는 야카레 카이만 악어고기를 얇게 썬 카르파초를 맛본다. 이 악어고기는 야생동물보호협회와 타카나 원주민 공동체가 함께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공급받는다. 악어고기는 세비체처럼 12시간 동안 감귤류에 절인 후 조리하는데, 맛은 육류보다 생선에 더 가까운 편이다. 여기에 패션프루트와 잘 익은 바나나가 어우러져 달콤하면서도 새콤한 맛을 만들어낸다.
인상 깊었던 요리는 버터플라이드 피라냐. 머리와 날카로운 이빨까지 그대로 살린 채 요리를 해서 시각적으로 강렬하다. 껍질은 완벽하게 바삭하고, 발효한 유카 전분 반죽에서는 은은한 산미가 느껴진다. 달콤한 코코넛 찹쌀과 매콤한 스리라차 소스가 어우러져 환상적인 조합을 이룬다. “사람들은 볼리비아 하면 주로 안데스산맥을 떠올리죠. 하지만 국토의 60% 이상은 아마존이에요.”(마르시아)
아마존산 바닐라와 벌집이 들어간 아이스크림, 허브를 넣어 도수를 높인 볼리비아식 베르무트로 식사를 마무리한다. 마지막 한 숟갈을 천천히 음미하며 이번 여행에서 만난 마르시아, 발렌티나, 도냐 에미를 떠올린다. 이들이 만든 모든 음식 뒤에는 원주민의 지식과 토종 재료, 이 나라의 가장 큰 힘인 조용한 끈기, 그리고 여성들이 있었다.

아마존에서 영감받은 요리를 선보이는 아라미 레스토랑의 마르시아 타하 모하메드 셰프.

다섯 가지 음식의 발견

후민타스
치즈와 향신료로 쓰이는 아니스를 약간 넣어 만든 옥수수 반죽을 옥수수 껍질에 싸서 찌거나 굽는다. 아침에 커피와 먹으면 잘 어울린다.

산드위치 데 촐라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빵 사이에 천천히 구운 돼지고기, 바삭한 돼지 껍질, 양파와 당근을 절여 만든 에스카베체를 듬뿍 넣은 샌드위치다. 라파스 길거리 음식의 고전으로 매콤한 토마토살사소스 후아를 한 숟가락 넣어 먹으면 제일 맛있다.

프리카세 파세뇨
말린 감자 추뇨와 말린 옥수수, 아히아마릴로 고추, 향신료 커민을 넣고 부드럽게 졸인 진한 돼지고기 스튜다. 라파스 사람들이 즐겨 찾는 대표적인 해장 음식이다.

아피 모라도
뜨겁고 걸쭉한 보라색 옥수수 음료로, 계피와 정향을 넣어 끓인다. 볼리비아식 도넛이라고 할 수 있는 따뜻한 부뉴엘로와 함께 먹으면 아주 맛있다.

쿠냐페스
유카 전분으로 빚은 반죽에 치즈를 넣어 구운 빵으로,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쫄깃하다. 동부 볼리비아에서 온 간식인데, 따뜻할 때 커피에 곁들여 먹으면 좋다. 도시 곳곳의 노점이나 제과점에서 미리 사두었다가 버스로 여행할 때 간식으로 먹으면 딱이다.

치즈를 넣어 구운 후민타스 옥수수 케이크.

 

글. 제시카 빈센트JESSICA VINCENT
사진. 크리스티안 구티에레즈/ 파야위 레스토랑, 알라미, 발레리아 도라도/ 파야위 레스토랑, 셔터스톡, 플랜 사우스 아메리카/크리스티안 구티에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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