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에 머무는 찰나의 순간 이면엔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숨겨져 있다.
지금을 이루기까지
오랫동안 축적된 시간의 흔적을 따라가 본다.
SCENT
피어나는 시간의 향
주전자에 찻잎을 담고 따뜻한 물을 붓는다. 기다리는 시간은 단 30초. 투명했던 물은 은은한 풀 내음을 머금은 연둣빛 차로 변한다. 찻잔은 차를 마시기 이상적인 형태다. 양손에 잘 감싸이도록 굽어 있고 입술에 닿는 부분은 얇아 적절한 양이 입에 들어온다. 녹차를 마실 때 흔히 느껴지던 떫은맛이 전혀 없는 고소한 맛에 놀란다. “순천 모후산 자락에 가면 400년 넘은 대나무 숲이 있는데, 그 아래서 자란 야생 녹차예요. 매년 봄마다 가족이 모여서 전통 방식 그대로 가마솥에 찻잎을 덖어요. 저희 집만의 연례행사 같은 거죠.”
‘천천히 내리다’라는 뜻의 티하우스 서하는 40여 년간 청자 다구를 빚어온 공방 ‘하빈요’ 옆에서 이명균 도예가의 가족이 운영하는 전통찻집이다. 이곳에서 사용하는 찻잔은 고려시대 찻잔의 각도와 만듦새를 그대로 복원해 완성한 작품이다. “쓰이지 않는 도구는 의미가 없습니다.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도자기들을 편히 경험해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어요.”
청자는 순천 녹차, 하동 황차, 중국 무량산의 보이차 등 각지의 향을 고스란히 품는다. 금귤 정과나 약과 같은 곁들임 다과 역시 차의 풍미를 해치지 않을 만큼 담백하다. 특히 100년 된 다식판으로 찍어낸 서리태 다식의 고소함은 차의 깊이를 한층 끌어올린다. 다과는 100년 전의 가정집으로, 녹차는 400년 전의 차밭으로,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담은 청자는 1000년 전 고려로 안내한다.
티하우스 서하
경기 여주시 웅골로 294-3
Do it. 맑은 물이 흐르고 비옥한 흙을 가진 여주는 좋은 품질의 도자기를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매년 5월, 여주 신륵사 일원에서 ‘여주도자기축제’가 열린다. 도자기 만들기 체험, 예술 공연 등이 진행된다.
ZEST
싱그러움 한가득
북성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남한강이 굽이쳐 흐르는 곳. 세종대왕릉이 자리할 만큼 명당으로 꼽히는 이 마을 한편에 주황빛 과실로 둘러싸인 카페 귤낭이 있다. 제주에서 18년간 숙박업을 하며 400그루 이상의 귤나무를 키워온 주인장이 육지에 꾸린 작은 제주다. “조선시대에는 조공을 위해 약 200년 동안 제주도민의 내륙 출입을 금지했죠. 그중엔 귤도 있었고요. 당시 도민들은 조공 압박에 못이겨 나무를 베어내기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제주 귤의 맛을 육지에 온전히 전하고 싶었어요.” 직접 키운 나무 수십 그루를 옮겨와 터를 잡고, 나무의 제주 방언인 ‘낭’을 따 지금의 귤낭이 탄생했다.
실내로 들어서면 제주의 정취는 더욱 짙어진다. 곳곳에 놓인 귤나무 화분과 바구니에 담긴 열매, 핸드크림과 양말 등 아기자기한 귤 소품들이 공간을 채운다. 투박한 재래귤부터 알이 큰 한라봉, 색이 진한 천혜향까지 품종이 다양하다. 공간을 감도는 싱그럽고 쌉싸름한 향의 주인공 역시 귤이다. 귤의 맛을 디저트에 담기 위해 연구한 시간만 10년. 귤 모양 화과자를 가르자 쫀득한 식감 사이로 진한 귤잼이 흘러나온다. 귤 마멀레이드를 넣은 아메리카노는 커피의 씁쓸함과 귤의 달콤함이 의외의 조화를 이루며 입안을 산뜻하게 정리해준다.
카페 귤낭
경기 여주시 세종대왕면 영릉로 489-6
Do it. 제주에서 온 백봉철, 조효숙 부부가 전하는 색다른 귤의 맛, 귤 아메리카노를 다음 순서에 따라 만들어보자.
➊ 먼저 귤 5개, 설탕 150g, 에스프레소 1샷을 준비한다.
➋ 귤은 껍질을 벗겨 과육만 남기고, 껍질 일부는 잘게 다진다.
➌ 냄비에 과육, 다진 껍질, 설탕을 넣고 졸여 마멀레이드를 만든다.
➍ 잔에 마멀레이드 40ml와 물 150ml를 넣어 가볍게 섞는다.
➎ 얼음을 채운 뒤 에스프레소를 천천히 부어 완성한다.
FRAME
일상의 풍경
한적한 마을 한편, 오각형 파사드의 적갈색 벽돌 건물이 우두커니 서 있다. 벽돌과 노출 콘크리트, 그리고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실내가 마치 사진이 담긴 액자 같다. 2021년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을 받은 수연목서는 사진가 최수연 작가의 작업 공간에서 시작됐다. 본업인 사진과 취미인 목공을 위한 작업실에 카페와 서점, 갤러리를 덧붙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실내를 이루는 모든 것에는 작가의 손길이 닿아 있다. 사진은 직접 촬영했고, 서적은 신중히 선별했다. 사진을 품은 액자와 책이 담긴 책장도 모두 손수 만든 것이다. 2층 카페 공간에 놓인 책상과 의자도 마찬가지. 각진 나무로 만들어져 투박해 보이는 의자는 막상 앉아보면 의외로 편안하다.
2층에서 다리를 통해 연결되는 전시 공간을 비롯해 곳곳에 최수연 작가의 사진이 놓여 있다. 정물과 인물, 풍경 등 피사체도 다양하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명료하다. “모든 것은 쓰임에 의해 존재 의미를 가집니다. 사진 속 풍경이나 도구도 마찬가지예요. 가구를 비롯해 이 건물 역시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죠.” 개인적인 작업실로 시작했지만, 이곳을 찾는 이들의 여러 이야기가 더해지며 지금의 공간이 완성됐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여행자의 시선이 사진에 머물고, 발걸음이 공간에 닿을 때마다 수연목서라는 액자 속에 매일 새로운 풍경이 인화된다.
수연목서
경기 여주시 산북면 주어로 58
Do it. 3월 30일부터 4월 5일까지 서울 망원동 엑스엑스프레스에서 수연목서 팝업스토어가 열린다. 최수연 작가의 사진을 비롯해 가구와 직접 선별한 서적 등을 만나볼 수 있다.
NATURE
자연의 감각
목장에 들어서자 어디선가 돼지 한 마리가 불쑥 나타나 반긴다. ‘돼지가 이곳에 있어도 되나?’ ‘목장 주인은 알고 있을까?’ 머릿속에 질문이 꼬리를 무는 동안, 녀석은 금세 흥미를 잃었는지 보이지 않는 굴을 통해 울타리 안으로 사라진다. 찬 바람을 타고 묵직한 거름 냄새가 실려 온다. 그리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의 울음소리. 도시의 감각은 점차 흐려지고 목장 한가운데 서 있음을 실감한다. 1983년 젖소 세 마리로 시작해 지금은 신선한 우유를 제공하는 소와 늘어진 앞머리가 매력적인 망아지, 삼삼오오 모여 온갖 냄새를 수집하는 돼지 등 수십 마리의 가축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생산 중심이던 목장은 체험형 목장으로 탈바꿈했고, 두 딸이 가업에 힘을 보태며 새로운 활기를 더했다. 프랑스 르 코르동 블루를 수료한 첫째 김지은 씨와 홋카이도에서 낙농업을 배운 둘째 김지아 씨가 각각 유제품 제조 체험과 낙농 체험을 맡아 진행한다.
목장에서 직접 만든 반죽에 지역 채소와 신선한 모차렐라 치즈를 듬뿍 올리는 피자 만들기 체험에 참여했다. 오븐에서 갓 꺼낸 피자를 한입 베어 물자 쫄깃한 식감 뒤로 치즈의 담백한 풍미가 밀려온다. 여기에 곁들이는 당일 생산한 우유의 은은한 단맛은 그 고소함을 한층 배가한다. 목장의 쿰쿰한 냄새와 유제품의 고소한 향.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두 감각 모두 자연이라는 한 뿌리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는다.
은아목장
경기 여주시 가남읍 금당5길 139
Do it. 3월까지 겨울 목장 체험에 참여할 수 있다. 매일 오전 11시부터 건초 및 당근 주기, 우유 아이스크림과 수제 버터, 피자 만 들기 체험이 차례대로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