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하게 붉은, 달콤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이 싱가포르 국민 요리는 70년 넘는 세월 동안 진화를 거듭해 왔다. 오늘날에는 비스킷과 파스타는 물론 바오번과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식에 신선한 영감을 주고 있다.
“예전에는 망치로 부시곤 했어요.” 붉은 소스가 사방에 튄 식탁을 바라보며 저스틴 림Justin Lim이 말한다. “만석일 때는 소음이 엄청났죠.” 그가 웃으며 덧붙인다. 식탁 위 버너에서는 1kg짜리 칠리크랩이 보글보글 끓고 있다. 나는 지금 비닐장갑과 앞치마, 각종 도구로 무장한 채 게와 씨름하는 중이다. 저스틴의 가족이 운영하는 롤란드 레스토랑Roland Restaurant에는 망치는 물론 커트러리도 없다. 그 와중에 용감하게도 흰색 티셔츠를 입은 저스틴은 태연해 보인다. 그는 3대째 싱가포르의 국민 음식인 칠리크랩을 선보이는 림 가문의 일원이다. 이들이 칠리크랩을 만든 지 75년, 그동안 조리법과 먹는 방식은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가장 바쁜 시기는 음력 설이에요.” 저스틴이 말한다. 레스토랑에서는 그 기간 저녁에만 500마리 넘는 게가 팔린다고 한다. 직접 맛보니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은은하게 감도는 고추의 매콤함과 토마토의 산미가 버터처럼 부드러운 게살과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반쯤 깨진 집게발과 다리에서 통통한 살을 발라내고, 바오번으로는 접시에 남은 소스를 말끔히 닦아내며 먹는다.
지금은 특별한 날에만 먹을 것 같은 이 호화로운 음식은 사실 노점에서 판매하던 소박한 가정식이었다. 레스토랑 벽에 걸린 TV에는 이 요리의 창시자인 저스틴의 조부모인 처얌티암Cher Yam Tiam과 림춘응Lim Choon Ngee의 사진이 비춰진다. “그때부터 함께해온 요리사들도 있어요. 하지만 정확한 소스 레시피는 오직 가족들만 공유하죠.”
칠리크랩의 기원은 마치 하나의 전설처럼 전해진다. 1940년대 어느 날, 처 여사는 남편이 동쪽 해안에서 잡아 온 게를 요리하며 토마토케첩을 넣어보았다. 단순히 게를 쪄 먹던 그동안의 중국식 조리법에서 벗어난 과감한 시도였다. 여기에 남편의 제안으로 고추를 추가했고, 이후 달걀을 풀어 소스를 걸쭉하게 만든 뒤 생강과 마늘 등 향신채 양념을 더해 지금의 요리가 완성되었다.
입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1950년에는 노점상을 차렸고, 그로부터 10년 뒤에는 가문의 이름을 건 레스토랑으로 확장하면서 현재 모습이 되었다. 오늘날 이 식당은 싱가포르 외곽 머린퍼레이드Marine Parade 지구의 6층짜리 주차장 꼭대기, 이색적인 공간에 위치한다.
서쪽으로 이어진 탐험
또 다른 칠리크랩을 찾아 안개가 자욱한 해안을 따라서 서쪽 빌딩 숲으로 향한다. 미래 지향적인 슈퍼트리Supertree 조형물이 모습을 드러내고, 항만엔 화물선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동남아시아 해상 교통의 요충지인 싱가포르는 오랫동안 무역과 문화 교류의 중심지였다. 그 흔적은 음식 문화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싱가포르강이 가로지르는 도심 서쪽에 위치한 레드 하우스 시푸드Red House Seafood 그랜드 콥톤 지점에서 그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이곳은 50년째 난양Nanyang(과거 중국인들이 동남아시아 지역을 지칭하던 말)식 요리를 선보이고 있는 가족 경영 레스토랑이다. “요리의 기원이 중국에 있다고 볼 수 있어요.” 모던한 인테리어로 꾸며진 레스토랑에서 만난 젊고 감각적인 마케팅 이사 웬디 탄Wendy Tan이 설명한다. “선조들이 여러 세대를 거쳐 싱가포르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레몬그라스, 카피르라임, 갈랑가 같은 동남아시아의 식재료를 받아들이며 지금의 풍미가 완성된 거죠.”
오늘날 칠리크랩은 레드 하우스 시푸드와 롤란드 레스토랑 같은 싱가포르 가정식 요리를 선보이는 남양식 지차Zi char(즉석 볶음 요리) 전문점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이들 식당에서 칠리크랩은 여러 요리가 푸짐하게 차려진 식탁 위에서도 단연 시선을 끄는 주인공이다. 이날 저녁 식탁에는 땅콩과 렘파rempah 향신료 페이스트가 들어간 채소 피클 아차르acar도 함께 올랐다. 중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문화가 섞인 페라나칸 음식이다. 여기에 카피르라임 향이 감도는 태국식 커리를 중국식으로 풀어낸 스파이시 시푸드 콤보가 곁들여지며 식탁이 한층 풍부해진다. 물론 칠리크랩도 함께다. 이곳의 칠리크랩은 롤란드 레스토랑과는 결이 다르다. 케첩의 단맛이 강하고 매운맛은 덜하며, 달걀이 더 많이 들어가 크리미하다. 주문과 동시에 껍데기를 손질한 뒤 귀여운 게 모양으로 구워낸 만터우 빵을 곁들여 준다.
주방 한쪽에는 칠리크랩의 재료로 사랑받는 스리랑카산 머드크랩Mud crab이 있다. 최첨단 수조 속을 유영하는 게들 중 일부는 무게가 2kg에 달한다. 성인 세 명이 먹기에 충분한 1kg에 약 8만원에서 10만원 정도 하니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하지만 이 특별한 맛은 점차 대중화되는 추세다. 매년 8월 9일, 싱가포르 내셔널 데이가 되면 싱가포르 전역에 칠리크랩이 등장한다고 웬디가 말한다. 칠리크랩 소스를 파스타나 맥도날드 햄버거, KFC 치킨은 물론 심지어 프레츨과 팝콘에도 뿌려 먹는다고 한다. “올해는 싱가포르가 건국 60주년을 맞이해요. 과연 ‘칠리크랩 데이’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만 해도 즐겁네요.” 웬디가 덧붙인다.
더 많은 음식 경험
‘치킨 라이스’ 칵테일
싱가포르의 또 다른 국민 음식에 대한 새콤하면서 감칠맛 나는 액체 형태의 헌사. 정통 칵테일 바인 네이티브에서 이 칵테일을 맛볼 수 있다. 정종을 베이스로 발효한 치킨 소스, 간장, 오이, 생강, 라임을 조합했으며, 바삭한 닭 날개 튀김을 올려 준다.
tribenative.com
현지식 아침 식사
카페와 개방형 푸드코트에서 아침 식사로 흔히 판매하는 카야 토스트. 코코넛 스프레드를 바른 빵을 부드럽게 익힌 달걀에 찍어 먹는 음식이다. 취향에 따라 달콤한 간장을 살짝 곁들여도 좋다. 무가당 연유를 넣은 진한 커피인 코피kopi를 주문하는 것도 잊지 말자.
가정식
싱가포르의 음식 테이크아웃 문화는 이제 독창적인 셰프들이 주도하는 프라이빗 다이닝으로 변화하고 있다. 보태닉 가든 서쪽 클레멘티 지구의 아파트에서 파인다이닝을 선보이는 프리스티나 목pristina mok이 대표적. 소꼬리찜인 렌당rendang은 꼭 맛보자.
간식의 향연
어느 날 아침, 향기로운 싱가포르 보태닉 가든Singapore Botanic Gardens 인근에서 작은 카페 바오 메이커스 Bao Makers를 발견했다. 이곳은 통통한 게살이 들어간 칠리크랩 소스를 튀긴 바오번에 듬뿍 발라 준다. 감각적인 스포츠웨어를 입고 조깅을 마친 현지인들에게 이상적인 아침 식사다. 과일 향이 감도는 매콤한 소스는 차가운 솔티드 크림 커피 한 잔과 더없이 잘 어울린다.
오후에는 인근 점보 시푸드Jumbo Seafood 레스토랑의 뎀시 힐 지점을 찾아 칠리크랩 맛 막대 과자를 산다. 해변의 오두막처럼 꾸며진 이 가게는 다양한 테이크아웃 스낵을 판매하는데, 나는 집에서도 이 식당의 톡 쏘는 풍미를 재현해볼 요량으로 칠리크랩 양념도 계산대에 올린다.
이후 며칠 동안 나는 더 다양한 형태의 칠리크랩을 경험했다. 더 쿠키 뮤지엄The Cookie Museum에서는 작은 소프트셸 크랩을 통째로 구워 올린 달콤짭짤한 비스킷을, 싱가포르 국립미술관 내 내셔널 키친 바이 바이올렛 운National Kitchen by Violet Oon에서는 페라나칸 스타일 애프터눈 티의 일부로 한입 크기의 버터 풍미 가득한 페이스트리를 접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순간은 리조트 월드 센토사에서 경험했다. 도심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맹그로브 숲이 있는 해변 위를 지나 5분이면 센토사섬에 도착한다. 한때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거주했던 어촌이자 영국군의 기지였던 곳은 지난 수십 년의 세월을 거쳐 지금은 테마파크와 호텔, 명품 매장을 갖춘 열대 휴양지가 되었다. 그곳의 코치Coach 익스피리언스 스토어에서 비단처럼 부드러운 칠리크랩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만난 것이다.
만터우 찐빵 반죽으로 만든 짭조름한 웨이퍼 비스킷을 곁들여 주는데, 아이스크림의 영롱한 산홋빛 색감은 명품 가방 옆에 두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우아했다. 매콤하면서도 차가운 첫입은 다소 충격적이지만, 곧 새콤달콤한 토마토와 어우러지며 깊은 감칠맛이 입안을 메웠다. 습도가 90%에 달하는 싱가포르 날씨에 이 간식은 제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호불호가 확실하죠.”
매장 지점장인 트레버 웨그스태프Trevor Wagstaff가 강한 캘리포니아 억양으로 말한다. “입에 맞지 않으면 다른 메뉴로 바꿔 드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지인들은 칠리크랩을 오마주해 만든 이 간식을 아주 좋아해요.”
마지막 여정은 다운타운 서쪽 알렉산드라 빌리지에서 3대째 이어오는 볶음 요리 레스토랑 켕 엥 키 시푸드Keng Eng Kee Seafood다. 조용한 골목을 따라 식민지 시대 목조 가옥이 줄지어 있다. 땅을 쪼아대던 닭들이 나를 따라서 레스토랑 테라스까지 올라온다. “팬데믹 기간에 사람들이 닭을 키우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이제는 어디에나 있네요.” 레스토랑의 운영 매니저 지아민 리우Jia Min Liew가 매니큐어 칠한 손을 흔들어 닭을 내쫓으며 말한다. 뒤이어 계산대를 맡은 환갑 넘은 아버지와 홀 서빙을 살피는 어머니가 따라 나온다. 하얀 조리복을 입은 그녀의 남동생 웨인Wayne은 집안의 비법이 담긴 독창적인 메뉴를 선보인다. 돼지고기 안심에 캐러멜이 들어간 소스를 발라 바삭하게 구운 커피 립coffee rib 한 접시와 커리 잎을 넣은 시리얼 가루를 입혀 튀겨낸 시리얼 새우가 내 앞에 놓인다. 하지만 요리의 주인공은 레몬그라스 향이 강하게 감도는 칠리크랩이다.
정통 방식으로 조리한 것과는 달리, 이곳 손님들은 전통의 틀에 갇혀 있지 않다. 주변 테이블에서는 남은 시리얼 가루를 소스에 뿌려 새로운 맛을 더하곤 한다. “이것이 바로 싱가포르입니다.” 식당을 관리하는 지아의 오빠 폴Paul이 쾌활하게 웃으며 말한다. “사람들이 창의적이죠. 젊은 나라이고, 단일 문화도 아닙니다.” 끊임없이 진화하고 융합하는 이 도시의 정신을 확인한 나는 이 요리에 ‘게의 왕관’을 씌워줄 수밖에 없었다.
켕 엥 키 레스토랑의 게.
HOW TO DO IT
머물 곳
포트 캐닝 파크Fort Canning Park의 언덕 위, 식민지 시대의 군 내무반을 개조한 호텔인 메트 싱가포르. 현대적인 싱가포르 요리부터 한식, 이탈리아식 등 여러 다이닝 옵션을 갖추고 있다. 1박에 약 28만원부터.
metthotelsandresorts.com
경험하기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서 영감을 받은 투어와 칵테일 만들기 클래스에 참여해보자. 투어 중엔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칵테일 싱가포르 슬링이 탄생한 래플스 호텔Raffles Hotel에 방문한다. 사이드카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하며, 3시간짜리 투어가 약 6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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