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인파로 붐비던 인천의 원도심 제물포구. 흔히 동인천이라고 불리는 거리 곳곳에는 100년 전 지어진 건물들이 화려한 시절의 기억을 간직한 채 남아 있다. 과거의 흔적과 저마다의 취향, 오늘의 도시 이야기를 머금은 건축물들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팥알에 담긴 시간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차이나타운 옆에 적산가옥 한 채가 서 있다. 1880년대에 지어진 이 목조 건물은 인천에 유일하게 남은 마치야 양식의 건물로, 과거 하역 업체가 1층을 사무실로 쓰고 2층과 3층을 직원 숙소로 사용했던 일종의 주상복합공간이었다. 여전히 좁고 긴 복도와 안뜰, 나무 격자 창문 등 마치야 양식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인천에서 오랫동안 시민문화운동을 해온 백영임 대표는 2012년 건물의 원형을 세심하게 복원해 팟알을 열었다. 카페로 운영되는 1층 한편에는 인천의 옛 풍경이 담긴 엽서를 비롯해 사진가와 음악가 등 지역 예술가들의 서적이 구비되어 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딛고 오르면 2층과 3층의 다다미방이 나타난다. 이 공간에서는 예스러운 분위기의 실내와 창틀 너머로 보이는 활기찬 동인천의 풍경이 교차한다. “하지만 카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맛이죠. 여행자들의 발길을 붙잡는 힘은 건물의 오랜 역사가 아닌 맛있는 음식이니까요.”
백영임 대표가 팟알의 시그너처인 팥빙수를 내주며 말한다. 수북하게 간 얼음 위에 직접 졸인 단팥을 듬뿍 얹고 쫄깃한 떡을 곁들인다. 일본인이 인천에 들어와 시장에서 처음 팔았다고 전해지는 팥을 주재료로 삼았다는 그 옆에는 약 100년 전 인천 개항장의 한 과자점에서 판매했던 일본에서 들여온 카스텔라를 모티브로 한 나가사키 카스텔라가 놓인다. 부드럽고 진한 팥의 풍미와 푹신하고 달콤한 카스텔라, 그리고 14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건물이 시간을 초월하는 여행의 감각을 선사한다.
팟알
인천 제물포구 신포로27번길 96-2
Explore Nearby 인천아트플랫폼
근대 건축물을 리모델링한 복합문화예술공간에서는 시민을 위한 전시와 공연이 상시 진행된다. 백영임 대표는 인천아트플랫폼과 더불어 한국 최초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과 개항기 문화 교류의 장이었던 ‘제물포구락부’ 등 지자체가 운영하는 수준 높은 문화 공간들도 함께 추천한다.
여행 중 마주한 새로운 세상
대로변에 마중 나온 작은 입간판의 안내를 따라 으슥한 골목길로 들어선다. 내부가 보이지 않아 정체를 알 수 없는 묵직한 나무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뜻밖의 판타지 세상이 펼쳐진다. 서점 마계는 판타지와 신화, 전설, 괴담을 다루는 독립 서점이다. ‘중2병이 머무는 곳’이라고 적힌 문구가 이곳의 독특한 정체성을 단번에 보여준다. 중세 시대, 디스토피아적 미래 세계 등 서가 속 책들이 품고 있는 시대는 각양각색이다. 서점이 들어선 건축물의 역사 또한 장대하다. 1890년대 정미소로 쓰이던 공간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난 옛 목조 골조를 살려 지금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완성했다.
“독립 서점은 대형 서점과 달리 운영하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서점의 성격과 색깔이 형성된다는 점이 매력적이죠.” 윤석우 대표의 말처럼 이곳에는 책방 주인이자 출판사 대표, 그리고 싱어송라이터라는 그의 다채로운 정체성이 짙게 배어 있다. 선반에는 〈반지의 제왕〉 같은 고전부터 〈세계 귀신 지도책〉 같은 흥미로운 서적들이 꽂혀 있고, 벽면에 비친 빔프로젝터에서는 그가 직접 작업한 뮤직비디오가 재생된다. 직접 지역의 괴담을 수집해 엮은 단행본부터 이 서점을 배경으로 집필한 동양풍 판타지 소설 〈서점 마계〉까지, 일상과 판타지의 경계에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들이 서점 곳곳에 가득하다.
서점 마계
인천 제물포구 신포로39번길 10-9
Explore Nearby 맛집의 본점들
윤석우 대표에게 또 다른 추천 여행지를 묻자 그는 대답에 앞서 침부터 꼴깍 삼켰다. 그러고 나선 줄줄이 식당 이름을 언급했다. 쫄면의 원조집 신포우리만두, 메밀 소바로 사랑받는 청실홍실, TV 프로그램 출연으로 화제가 된 온센텐동까지 수많은 맛집의 본점이 동인천에 있다고 한다.
로컬 여행의 방식
‘과거의 영광은 남아 있지만, 현재는 다소 쇠락한 도시’. 로컬렉트를 운영하는 김도희 대표가 자신의 여행지 취향을 설명하는 문장이다. 그는 인생 여행지로 포르투갈의 리스본,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조지아의 트빌리시를 꼽으며 자신의 고향인 동인천 역시 이런 아날로그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도시라는 말을 덧붙인다. “옛 도시 특유의 투박함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면서도 도시의 기능은 잘 작동해 사람들은 여전히 활기차게 살아가죠.” 서울에서 건축사로 일하던 김도희 대표는 여행자들이 자신이 애정하는 이 도시의 일상을 온전히 경험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조각가였던 아버지의 낡은 작업실을 직접 개조해 로컬렉트의 문을 열었다. 이곳의 와인 선별 기준은 여행 중에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가에 있다. 개성은 분명하되 특정한 맛이 지나치게 튀지 않아 누구나 편안하게 마실 수 있는 와인을 주로 소개한다. 와인과 곁들이기 좋은 가벼운 스낵과 사퀴트리도 판매하지만, 직접 만드는 음식 또한 훌륭한 마리아주를 이룬다. 스페인식 문어 요리인 풀포와 헝가리식 토마토 스튜 굴라시 등 실내에서 세계 각지의 이야기가 피어나는 동안, 창밖으로는 옹기종기 모인 가정집 지붕과 붉은 장식이 엿보이는 차이나타운, 부두의 크레인과 바다 건너 보이는 월미도까지 한눈에 담긴다. 낯선 여행과 익숙한 일상이 로컬렉트에서 뒤섞인다.
로컬렉트
인천 제물포구 송학로 46
Explore Nearby 자유공원
로컬렉트 옆에 위치한 자유공원은 1888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 김도희 대표는 자유공원을 둘러보며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플라타너스를 살피고, 최만린 조각가의 청동 조각 작품 ‘움직임: 그 100년’을 감상해보기를 권한다.
도시의 오늘을 만드는 것들
‘황진이’, ‘바나나’, ‘소녀시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건물에 붙여졌던 이름들이다. 1920년대 일본 상점으로 지어진 목조 건물은 해방 이후 여러 회사의 사무실로 쓰이다가 1980년대에는 유흥주점으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이곳은 동인천과 가장 빨리 친해질 수 있는 관문으로 거듭났다. 고대 로마 건축에서 문화 및 상업 용도의 공용 공간을 뜻하는 ‘포디움Podium’에 인천의 지리 좌표 일부인 ‘126’을 더해 로컬 여행자를 위한 컨시어지 숍 포디움126이 탄생한 것.
여행자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포디움126의 문을 열지만 가장 먼저 시선을 빼앗기는 곳은 다채로운 기념품이 진열된 1층이다. 인천 바다에 버려진 유리 조각을 모아 업사이클링한 소품부터 지역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린 동인천 풍경 엽서와 마스킹테이프, 여행 중 보고 느낀 것을 남길 수 있는 문구류 등이 여행자를 반긴다. 음료 메뉴 역시 지역의 색채를 듬뿍 담아냈다. 동인천 꽃차 브랜드인 ‘마담티’의 과일청을 넣은 에이드, 오래된 노포 ‘인천당’의 생과자 등 식음료 라인업도 지역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콘센트와 프린터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 워케이션 장소로 제격인 2층은 공간을 운영하는 ‘인더로컬 협동조합’의 로컬 여행 프로그램인 ‘르인천구락부’의 체크인 센터이자 로컬 크리에이터와 함께하는 비정기 커뮤니티 프로그램의 라운지 역할을 한다.
포디움126
인천 제물포구 신포로 19-8
Explore Nearby 상우재
1903년에 지어진 가옥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로, 자개장과 재봉틀 등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빈티지한 소품들과 높은 돌담 뒤에 숨겨진 정원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모든 객실은 도미토리 룸으로 운영하며, 매일 아침 가정식으로 준비한 조식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