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와 독일, 제주와 캘리포니아의 분위기와 맛이 불광천에 모였다.
서로 다른 곳에서 쌓은 경험이 이곳에 새로운 풍경을 만들고 있다.
•
•
호주의 시간을 담다
불광천을 따라 걷다 오래된 청과물 가게와 건강원을 지나 언덕길을 한참 오르니, 18메이스트릿이라고 적힌 분홍빛 네온사인이 눈에 들어온다. 평일 낮인데도 안은 제법 활기차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외국인, 호주에서 가져왔다는 스티커와 사진을 구경하는 한국인. 어느 쪽이 여행자인지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잠시 들러 안부를 묻는 이웃의 모습도 보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커피를 내리는 박성진 바리스타와 브런치를 만드는 강래찬 셰프가 있다. 두 사람의 인연은 군대에서 시작됐다. 전역 후 각자 워킹홀리데이를 떠난 호주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룸메이트가 되어 함께 생활하며 호주의 카페 문화를 가까이에서 경험했다. “호주에는 셰프와 바리스타가 함께 운영하는 카페가 동네마다 있어요. 사람들은 대화와 커피로 아침을 시작하고 잠깐의 휴식을 즐기죠. 동네의 정취가 남아 있는 불광천 인근에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호주에서 함께 살던 집의 주소를 간판에 걸고 18메이스트릿의 문을 열었다.
가게 로고 아래에는 ‘with connection’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손님이 들어오면 먼저 말을 걸고 안부를 묻는다. 그렇게 한두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처음 온 사람도 어느새 단골처럼 공간에 스며든다. 분위기뿐 아니라 메뉴에도 호주의 방식을 충실히 담았다. 매장에서 직접 로스팅한 원두로 롱블랙과 플랫화이트를 내고, 호주에서 익힌 레시피로 베이컨에그롤과 에그베네딕트 등을 만든다. 그중 두 사람이 특히 좋아하는 메뉴는 크루아상 사이에 칠리소스와 오믈렛을 넣은 칠리에그. 애정의 이유를 묻자 강래찬 셰프가 당연한 듯 답한다. “그야 맛있으니까요!”
18메이스트릿
서울 은평구 증산로15길 42-1 1층
WHEN TO GO 두 주인장이 호주에서 경험한 이른 아침의 카페 문화를 느끼고 싶다면 매장이 문을 여는 오전 8시에 맞춰 들러보자. 샌드위치와 커피로 가볍게 하루를 시작하기 좋다.
•
•
달콤한 독일 향기
레커레커의 문을 열기 전, 간판 아래 적힌 ‘독일 빵집’이라는 글자를 보며 어떤 빵을 만날지 상상해본다. 통밀빵과 호밀빵, 사워도처럼 담백한 식사 빵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문을 열자 코끝을 감싸는 향이 예상과 조금 다르다. 버터의 고소함 사이로 시나몬의 달콤한 향이 퍼진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출신 매티와 아내 윤신영 씨가 함께 운영하는 베이커리 레커레커는 매일 아침 시나몬롤을 굽느라 분주하다. “흔히 독일 하면 단단한 빵을 먼저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지역마다 다양한 빵 문화가 있거든요. 저희는 그중에서도 향신료의 풍미를 살려 담백하게 구운 시나몬롤을 선보이고 있죠.”
레커레커를 이루는 것은 두 사람의 ‘애정’이다. 매티에게는 어린 시절 독일에서 먹던 시나몬롤이, 윤신영 씨에게는 핀란드 교환학생 시절 맛본 시나몬롤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었다. 가게 곳곳에도 두 사람의 지나온 시간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불광천은 매티가 한국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던 시절 머물렀던 동네이자 두 사람이 연애 시절 종종 찾던 데이트 코스였다. 가게도 직접 인테리어 하며 단골로 다니던 떡볶이집이 문을 닫을 때 가져온 칠판을 매장 한편에 두었다. 마지막으로 독일어로 ‘맛있다’는 뜻의 레커Lecker를 가게 이름으로 붙였다.
진열대에는 북유럽식 시나몬번인 카넬불레부터 추로스롤, 크림치즈롤까지 이름부터 호기심을 자극하는 빵들이 놓여 있다. 수십 가지 빵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일부터 작은 모험이 된다. “방문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취향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새로운 맛을 경험하고 자신의 취향을 탐구하는 거죠.” 고민 끝에 가장 인기 있는 빵 중 하나라는 추로스롤을 주문한다. 담백한 시나몬롤 위에 시나몬 필링과 추러스 슈거가 듬뿍 올려져 있다. 한입 베어 물면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다. 담백한 빵 사이로 시나몬의 달콤하고 짭짤한 풍미가 겹쳐진다. ‘레커’라는 이름에 걸맞는 맛이다.
레커레커
서울 서대문구 불광천길 278 1층
WHEN TO GO 다양한 빵을 직접 보고 고르는 재미를 누리고 싶다면 문을 연 직후인 낮 12시부터 오후 1시 사이에 방문하는 것이 좋다. 인기 있는 빵들은 일찍 품절되기도 한다.
•
•
•
•
불광천에서 밍기적
창밖으로는 불광천이 유유히 흐르고 한쪽 벽엔 제주도 성산일출봉 영상이 실시간으로 상영된다. 시냇물과 바다, 서울과 제주. 서로 멀리 떨어진 두 지역은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다. “서울이지만 자연과 가깝고 사람들의 정이 많다는 점에서 고향인 제주가 떠올라요.” 제주가 고향인 김현진 대표는 바쁜 일상에서 잠시 속도를 늦추고 제주에 여행 온 듯 쉬어 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 카페 밍기적의 문을 열었다. 이름처럼 공간에도 서두르지 않는 분위기가 흐른다. 원목의 따뜻한 질감과 밝은 톤의 실내가 어우러져 정감 있는 시골집을 닮았다.
메뉴에는 제주가 더욱 선명하게 담겼다. 돌하르방을 닮은 얼음에 우유를 부어 마시는 돌하르방우유와 보리 미숫가루를 활용한 보리크림라떼가 대표적.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구좌당근케이크. 제주 구좌산 당근을 사용한 시트에 크림치즈를 더하고 위에는 현무암을 닮은 쿠키 크럼블을 올렸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목적은 제주 여행만큼이나 제각각이다. 지나가다 잠시 쉬어 가는 사람도 있고,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을 마무리하는 이들도 있다. 강아지를 산책시키거나 러닝을 하던 사람들은 잠시 들러 당을 보충하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창밖의 불광천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천천히 빛을 바꾼다. 케이크를 한입 베어 물고 식어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하루가 천천히 흘러가는 이곳에서는 누구나 밍기적거리게 된다.
밍기적
서울 서대문구 불광천길 274 1층
WHEN TO GO 주인장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창을 통해 붉게 물들어가는 햇살이 내리쬐는 해 질 녘.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한동안 멍때리기 좋다.
•
•
캘리포니아 파도에 휩쓸리다
립타이드에는 한 사람의 인생이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다. 스케이트보드와 록 밴드 포스터를 보고 있으면 10대 소년의 방 같다가도, 벽에 걸린 타투 도안과 캘리포니아·미주리·콜로라도의 자동차 번호판을 마주하면 활동적인 청년의 아지트처럼 느껴진다. 여기에 실내를 가득 채우는 매콤한 핫소스 향과 록 밴드의 음악까지 더해지면 이곳이 서울 불광천변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게 된다.
캘리포니아 출신 맥스가 운영하는 립타이드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경험해온 음식과 음악, 술을 한데 모은 펍이다. 한국에서 미군으로 복무했던 그는 한국 생활을 하며 자신이 기억하는 미국의 음식 문화를 제대로 만날 기회가 많지 않다고 느꼈다. 전역 후 요식업을 배운 뒤 직접 공간을 열게 된 이유다.
그가 말하는 ‘진짜 미국 음식’은 햄버거나 피자처럼 흔히 떠올리는 메뉴와 조금 다르다. “캘리포니아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뒤섞인 곳이에요. 유럽과 중동, 아시아의 음식 문화가 현지 식재료와 조리법으로 자연스럽게 섞이며 또 다른 맛을 만들어내죠.”
메뉴에는 그가 기억하는 캘리포니아의 맛이 고스란히 담겼다. 미국에서 가져온 핫소스를 버무린 치킨드럼스틱은 매콤한 풍미가 선명하고, 치즈를 듬뿍 넣은 콰트로 맥앤치즈는 진하고 묵직하다. 병아리콩으로 만든 팔라펠과 후머스를 함께 내는 팔라펠 플레이트는 담백한 맛으로 입을 환기한다. 술 역시 맥스가 캘리포니아에서 즐겨 마시던 것들로 채웠다. 과실 풍미가 매력적인 플래티넘 IPA를 비롯해 버번위스키와 테킬라 등을 갖췄다.
립타이드는 해안가에서 바다 쪽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이안류를 뜻한다. 사람의 수영 속도보다 빨라 한번 휩쓸리면 좀처럼 빠져나오기 어렵다. 이곳도 다르지 않다. 캘리포니아의 음식과 음악, 느긋한 분위기에 휩쓸린 채 어느새 빠져나올 생각조차 잊게 된다.
립타이드
서울 서대문구 증가로32길 23-7 1층 101호
WHEN TO GO 늦은 시간 술 한잔하는 것도 좋지만, 이른 저녁에 찾아 식사 메뉴부터 천천히 맛보길 권한다. 음식에 진심인 맥스의 메뉴를 먹다 보면 어느새 메뉴판의 다른 음식에도 눈길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