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쓰고, 커피를 내리고, 음반을 뒤집고, 찻잎을 우린다.
춘천 구도심에는 오래전 방식과 조금은 느릿한 속도를 택한 공간들이 있다.
기록의 모든 것
고요할 적寂, 물결 파波, 집 우宇. 장경주 대표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인생을 어떻게 항해해야 할까?’라는 고민 끝에 ‘고요하게 파도치는 집’이라는 뜻을 지닌 적파우를 열었다. 매대에는 여러 브랜드의 필기도구부터 직접 디자인한 노트까지 다양한 제품이 놓여 있지만, 대부분 ‘손으로 쓰기 위한 물건’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크기와 내지 디자인이 모두 다른 노트가 도서관 서가에 꽂힌 책처럼 진열되어 있다. 그중에는 단순한 필기용 노트를 넘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관찰 일지’, 매일의 작은 실천을 기록하는 ‘돛단배’처럼 저마다의 콘셉트를 지닌 것도 있다. 북 커버와 메모지 등 직접 제작한 물건 사이사이로 강원도 로컬 브랜드 포테이토교를 비롯해 지역 예술가들과 협업한 작품도 눈에 띈다.
“평소 기록을 즐겨 했어요. 매일 일기를 쓰고, 시간이 날 때마다 낙서를 했죠. 기록을 통해 생각이 정리되고 자유로워졌던 경험을 나누고 싶어서 이 공간을 열게 됐어요.” 장경주 대표가 매장 안쪽에서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이유다. 매주 수요일에는 일기와 그림, 필사 등 각자 쓰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기록하며 대화를 나누는 ‘무엇이든 쓰는 모임’을 열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저마다 가져온 책을 읽는 ‘독서 모임’을 진행한다. 처음에는 지역 주민이 중심이었지만 최근에는 여행자의 발길도 늘고 있다고. 그렇게 손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 춘천에서의 여행은 또 다른 방식으로 기록된다.
적파우
강원 춘천시 효제길 34, 1층
WHEN TO GO 손 기록의 매력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면 선선한 가을날 책 한 권을 들고 방문해볼 것. 올해 춘천이 ‘2026 대한민국 책의 도시’로 선정되면서 12월까지 공공도서관과 시내 곳곳에서 독서 프로그램이 열린다.
아늑한 시간 속에서
낡은 청색 대문과 낮은 담장, 능소화가 자리 잡은 아담한 마당, 처마 아래 놓인 오래된 유리컵과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가구까지. 시선이 닿는 곳마다 시골집 같은 정취가 묻어나는 이곳이 카페임을 알려주는 것은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 향뿐이다. “레트로한 분위기로 유명해졌지만 처음부터 콘셉트를 잡고 만든 공간은 아니에요. 제 취향에 맞는 공간을 찾다 보니 이 자그마한 마을에 터를 잡게 됐죠.” 11년째 크로프트커피를 운영하고 있는 이다솜 씨는 아늑하고 편안한 것을 좋아하는 취향이 자연스럽게 배어든 이 공간에 ‘작은 농장’을 뜻하는 이름을 붙였다.
공간을 채우는 물건에는 일부러 꾸며낸 흔적이 없다. 유리컵에는 지금은 쉽게 볼 수 없는 음료 브랜드의 로고가 그려져 있고, 빛바랜 선풍기에는 변압기가 연결되어 있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은 소품과 달리 메뉴는 단출하다. 직접 로스팅한 원두로 내린 커피만 선보인다. 누구나 부담 없이 찾아와 편하게 커피 한 잔 마시고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오래전 주스가 담겼을 법한 레트로한 컵에 나온 플랫화이트를 한 모금 마시자 산미 없는 원두와 우유가 어우러진 고소한 풍미가 입안을 가득 채운다. 마침 크로프트커피가 위치한 동네의 이름마저 낙원동이다. 춘천역과 공지천 사이에 자리한 이 동네는 번잡함에서 조금 비켜나 잠시 숨을 고르기에 좋다.
크로프트커피
강원 춘천시 가연길16번길 6
WHEN TO GO 계절이 무르익을 때면 크로프트커피의 바깥 풍경은 실내만큼이나 매력적이다. 여름이면 앞마당에 능소화가 붉게 피고, 가을이면 뒷마당의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든다.
여러 음식을 한데 모아 맛볼 수 있다. 춘풍야장이 열리면 수많은 먹거리 부스가 들어선다. 방문한 사람들로 늦은 시간까지 떠들썩한 춘풍야장.
춘풍야장
경춘선 고가 아래 춘천풍물시장에서 열리는 야시장.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저녁 6시부터 진행된다.
라이브 버스킹과 지역 아티스트들의 공연이 어우러지며 춘천의 밤은 깊어진다.
장소: 춘천풍물시장
기간: 9월 11일~10월 16일
낭만적 배경음악
음악을 듣기 쉬운 시대다. 스마트폰을 몇 번 터치하면 듣고 싶은 음악을 원하는 구간부터 골라 들을 수 있고,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갖춘 이어폰은 주변의 소음을 지운 채 음악을 더욱 선명하게 들려준다. 반면 음반을 꺼내 턴테이블에 올리고 한 면이 끝나면 판을 뒤집어야 하는 수고로움, 음악 사이로 불쑥 끼어드는 잡음까지, 요싸롱 레코드는 그런 불편마저 낭만이던 시절의 감성을 품고 있다.
뮤지컬 음악감독이자 싱어송라이터인 박승훈 대표와 오랫동안 라디오 DJ로 활동해온 오영민 PD가 의기투합해 만든 이곳은 LP와 CD, 카세트테이프를 판매하는 음반 가게이자 오래된 스피커를 다루는 오디오숍이다. 하지만 오영민 PD는 요싸롱 레코드를 음반 파는 가게가 아니라 경험을 선사하는 공간이라고 설명한다. “세상에 음악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만약 있다면 아직 본인의 취향을 모르는 게 분명합니다. 장르는 물론 스피커마다 저마다의 매력이 달라서 자신에게 알맞은 것을 찾기가 쉽지 않죠.”
오영민 PD는 가만히 앉아 있는 법이 없다. 1970년대에 한국 기술자들이 모여 만든 스피커부터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앨범까지 소개하느라 분주하다. 오래된 록 밴드를 좋아한다고 말하자 미국의 하드록 밴드 건스 앤 로지스의 앨범을 꺼내 들려준다. 같은 음악도 어떤 스피커에서는 웅장하게, 또 다른 스피커에서는 한층 선명하게 들린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음악과 오디오에 관한 설명이 더해진다. 그렇게 요선동의 살롱, 요싸롱 레코드에서의 음악과 대화 소리는 여행의 사운드트랙이 된다.
구하기 어려운 음반부터 인기 있는 음반까지 구비한 요싸롱 레코드. 음악에 오영민 PD의 설명이 더해진다. 원하는 음반을 요청해 직접 들어볼 수 있다.
요싸롱 레코드
강원 춘천시 중앙로 40-1, 3층
WHEN TO GO 음악을 좋아하는 여행자라면 10월 9일부터 11일까지 공지천 일원에서 열리는 ‘2026 공지천호수축제’ 기간을 노려볼 만하다. 공지천재즈페스타와 춘천커피페스타, 춘천호수정원페스타를 하나의 동선으로 연결한 통합 축제다. 낮에는 시민들과 호흡하는 프린지 공연이, 저녁에는 인근 실내에서 열리는 ‘미드나잇 재즈클럽’이 이어진다.
걱정과 근심이 사라지는
공지천에서 강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근화동. 옛 미군기지인 캠프페이지가 자리했던 이곳은 도심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비교적 개발이 늦어 아직 예스러운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청과물 가게와 다방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골목을 걷다 보면 붉은색과 녹색으로 칠한 이국적인 우체통을 마주하게 된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대만의 정서가 한층 짙어진다. 옥색 테이블과 붉은 조명, 울창한 식물, 그리고 은은하게 번지는 찻잎 향까지. 대만 타이중에서 생활하던 이소희 대표가 기억하는 도시의 매력을 고스란히 담아낸 카페다. 이름은 자욱한 안개 속에 삼나무가 곧게 뻗어 있던 망우삼림에서 가져왔다. 그 숲을 거닐며 근심을 떨쳐냈던 경험이 ‘근심을 잊게 하는 집, 망우당忘憂堂’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다.
“이곳을 찾은 분들이 일상에서 생긴 근심을 잊었으면 하는 마음에 ‘근심을 잊게 하는 집’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정작 제겐 걱정덩어리죠. 매장을 이루는 모든 것에 고민이 담겨 있어요.” 메뉴에도 그 고민의 시간이 그대로 남아 있다. 대만에서 즐겨 마시던 소금 커피를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재해석하고, 대만 사람들이 자주 먹는 구아버를 주재료로 한 에이드를 개발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기 있는 메뉴는 아삼밀크티다. 현지에서 마시던 밀크티의 맛을 재현하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찻잎을 직접 블렌딩해 완성했다. 한 모금 들이켜자 진한 찻잎 향이 먼저 코끝에 닿고, 우유의 부드러움이 입안에 번진다. 여행지에서 또 다른 여행지를 꿈꾸는 사이, 근심은 어느새 저만큼 잊힌다.
할머니집에서 가져온 커튼, 중고로 거래한 의자 등이 모여 대만의 분위기를 낸다. 망우당 외관. 시그너처 음료인 아쌈밀크티를 포함해 망우당의 식음료는 대만 현지의 맛을 담고 있다.
망우당
강원 춘천시 공지로 452-6, 1층
WHEN TO GO 여행지에서 카페 투어를 즐긴다면 공지천호수축제 기간에 맞춰 방문해도 좋다. 국내 첫 로스터리 카페로 알려진 이디오피아집이 1968년 문을 연 곳도 바로 이 공지천변이다. 축제의 한 축인 ‘춘천커피페스타’에는 지역 카페와 베이커리가 참여해 산책로를 걷다 마주치는 부스에서 춘천만의 커피를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