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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가 빚은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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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호

빙하가 지나간 자리에 길고 깊은 호수가 남았다.
그 곁으로 포도밭이 뿌리를 내리고,
차가운 겨울과 서늘한 여름을 견디며 열매를 맺는다.
한때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땅에서 리슬링이 자라고 와인이 익어간다.
뉴욕의 또 다른 얼굴, 핑거레이크스.

이곳의 와인에는 호수가 만든 시간이 흐른다.
뉴욕 핑거레이크스의 호수와 포도밭을 따라가는 와인 여행.

핑거레이크스를 이루는 호수 중 하나인 세네카 호수는 카유가 호수와 함께 이 지역에서 가장 길고 깊은 호수로 꼽힌다. 푸르스름한 물빛 아래로 이어지는
깊은 수심은 주변의 기온을 조절하며 포도가 자라기 좋은 환경을 만든다. 호수의 깊이가 곧 핑거레이크스 와인 맛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
출고를 기다리는 스파클링와인. 핑거레이크스의 많은 와이너리가 다양한 시음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들의 와인을 알린다. 그중 닥터 콘스탄틴 프랭크
와이너리와 헤르만 제이 비머 와이너리에서도 각국에서 찾아온 와인 관계자들과 함께 와인을 맛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음 행사가 열렸다.
호수 옆 드넓은 대지 위로 포도밭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깊은 호수가 주변의 기온을 조절하고 포도가 천천히 익어갈 시간을 만들어주는 독특한 환경. 이것이 오늘날 핑거레이크스 와인의 명성을 빚어냈다.

호수가 만든 와인
뉴욕주 북부의 핑거레이크스Finger Lakes는 빙하가 지나간 자리에 형성된 11개의 길고 좁은 호수에서 그 이름이 비롯됐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손가락을 길게 펼쳐놓은 듯하다. 와인 산지는 세네카Seneca, 카유가Cayuga, 키우카Keuka, 캐넌다이과Canandaigua 호수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깊은 호수는 겨울에는 열을 머금고 여름에는 주변의 기온을 낮추며 포도가 자라기 좋은 환경을 만든다. 혹독한 추위를 누그러뜨리고 포도가 천천히 익어갈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다. 핑거레이크스에서 포도를 재배한 기록은 182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오늘날 이 지역을 대표하는 와인의 역사는 1950년대 후반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포도재배학자이자 와인메이커 콘스탄틴 프랭크Konstantin Frank는 유럽계 포도인 비티스 비니페라Vitis vinifera 역시 뉴욕의 추운 기후에서 자랄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에는 불가능하다는 시선이 지배적이었지만 그는 키우카 호수 주변에 리슬링과 샤르도네를 심었고, 마침내 재배에 성공했다. 그 도전 이후 이곳 풍경은 달라졌다. 오늘날
핑거레이크스에는 100개가 넘는 와이너리가 자리하고, 포도밭은 호수의 굴곡을 따라 이어진다.

넓은 포도밭 사이로 민들레나 다양한 풀들이 자연스럽게 자라는데, 이 식물들은 단순한 잡초가 아니라 오리와 양, 염소 등 포도밭을 오가는 다양한 동물들의 먹이가 되고 다시 땅을 비옥하게 하는 거름으로 돌아간다

땅의 맛
핑거레이크스를 대표하는 와인은 단연 리슬링이다. 레몬과 라임, 청사과와 백도 같은 향에 선명한 산미가 어우러진다. 서늘한 기후에서는 산뜻한 샤르도네와 붉은 베리, 후추와 허브 향이 돋보이는 카베르네 프랑도 자란다. 전통 방식의 스파클링와인과 아이스와인 역시 이 지역의 또 다른 얼굴이다. 핑거레이크스의 와인을 따라가다 보면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지닌 생산자들을 만난다. 콘스탄틴 프랭크의 도전을 이어가는 닥터 콘스탄틴 프랭크 와이너리Dr. Konstantin Frank Winery, 독일의 전통과 이 지역의 테루아를 결합한 헤르만 제이 비머 빈야드Hermann J. Wiemer Vineyard, 프랑스 출신 양조가가 세운 라빈즈 와인 셀러Ravines Wine Cellars 등이 호수 주변에 자리한다. 이 지역이 세계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유명한 와인 몇 병에만 있지 않다. 깊은 빙하호가 만든 기후와 포도를 심은 사람들의 도전, 각자의 땅을 해석하는 생산자들의 시간이 한데 쌓여 오늘의 핑거레이크스를 만들었다.
뉴욕을 여행하는 많은 사람들이 맨해튼과 나이아가라 폭포만 떠올리지만, 진정한 뉴욕주의 매력을 만나고 싶다면 세네카 호수와 키우카 호수 주변의 와이너리를 찾아가보기를. 그곳에는 미국 와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함께 흐르고 있다.

(위부터) 호수를 둘러싼 아름다운 타운 풍경. 닥터 콘스탄틴 프랭크 와이너리의 하우스는 미국 근대역사건물 목록에 등재돼 있는 유서 깊은 건물이다.

사진가 안웅철은 풍경과 인물을 오가며 일상의 익숙한 장면에서 새로운 감각을 발견해왔다. 2014년부터 독일의 음반 레이블 ECM Records와 협업해 약 30장의 앨범 작업에 참여했으며, 서울과 뉴욕 등에서 꾸준히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현재는 세계 곳곳의 풍경과 문화를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anwoongchul.com

 

글. WOONG-CHUL AN
사진. WOONG-CHUL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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