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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덴의 빛나는 상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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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5월호

전쟁의 유산이 도시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는 작센주의 중심
도시 드레스덴. 강인한 재건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이곳은
활기찬 문화생활과 현대적 나이트 라이프가 공존한다.

(왼쪽부터)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루터교 교회 프라우엔키르헤. 약 150만 점의 예술 작품을 소장한 현대 미술관 아르히프 데어 아방가르덴.

“조심히 오고, 절대로 폭탄은 만지지 마!” 쌀쌀하고 어두운 밤, 도이치반Deutsche Bahn 열차가 드레스덴 외곽을 가로지르는 동안 휴대전화 너머로 지지직거리며 들리는 목소리에 마음이 혼란스러워진다. 마치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의 전쟁 소설 <제5도살장>의 주인공인 시간 여행자 빌리 필그램처럼 1945년 드레스덴 폭격 속으로 질주하는 것 같다. 이 도시의 운명과 지독하게 얽혀 있는 그 폭격 말이다.
하지만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술사학자 루돌프 피셔Rudolf Fischer 박사는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덧붙여 말한다. “엘베 강Elbe River 옆에 있는 건설 현장에서 제2차 세계대전 폭탄이 발견되었다고 하네요. 폭탄의 뇌관을 제거하는 동안 드레스덴의 올드 타운 전체에 대피령이 내려졌어요.” 한 시간 후, 올드 타운 북쪽에 위치한 아방가르드 아카이브Archiv der Avantgarden 앞에서 그곳의 관장을 맡고 있는 피셔 박사를 만났다. 그는 짙은 색 재킷을 입은 채 백발을 휘날리며 미소 짓고 있었다.
아방가르드 아카이브는 블록하우스Blockhaus라고 불리는 인상적인 건물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건물은 1732년 작센Saxon 주의 군주 아우구스투스 2세가 군인들의 처소로 처음 지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부터 베를린 장벽 붕괴 전까지는 소련-독일 우정의 집House of Soviet-German Friendship이라는 문화센터로 사용됐다. 이는 당시 드레스덴이 사회주의 체제인 동독에 속해 있음을 알려준다. 그 이후 러시아 레스토랑으로 운영되다가 점차 폐허로 변했고, 2024년이 되어서야 현대 개념미술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매끈하게 연마된 콘크리트 큐브 조형물이 아트리움 위에 매달려 있는 독특한 모습이다. 오늘날 이곳에는 이탈리아 미술 수집가 에지디오 마르초나Egidio Marzona가 기증한 150만 점의 유물을 포함해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피셔 박사는 전시관 내부를 안내하면서 바우하우스 양식의 원통형 의자와 탁상 램프, 20세기 드레스덴 미술단체 디 브뤼케Die Brucke의 표현주의 회화 작품, 그리고 미국의 실험주의 건축가 버크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가 설계한 기하학적 돔 설계도 등을 보여준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변천을 거치며 전통과 최첨단 건축 기술이 융합된 블록하우스는 지금, 도시 재건의 정신을 상징하며 드레스덴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드레스덴은 1945년 영국과 미국 공군의 폭격으로 인해 폐허가 된 도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동시에, 역사적인 바로크 양식을 성공적으로 복원해낸 도시로도 유명하다.
수거된 폭탄의 뇌관이 안전하게 제거된 뒤 나는 올드 타운의 자갈길을 걸으면서 츠빙거 궁전Zwinger Palace의 양파 모양 돔형 지붕과 젬퍼오퍼Semperoper 오페라극장의 코린트식 외관, 프라우엔 교회Lutheran Frauenkirche의 웅장한 둥근 지붕을 감상한다. 오늘날 이 건물들은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도시 전성기 때처럼 장엄한 자태를 뽐내지만 실은 새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전쟁 직후 동독 정부는 당시 파괴된 역사적인 건물들을 재건할 자금도, 의지도 없었다. 군주제를 반대하고 모더니즘 건축양식을 선호하는 사회주의 정권의 취향에 걸맞지 않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본격적인 재건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이후에서야 이뤄졌다. 프라우엔 교회 복원은 2005년에 마무리되었으며, 드레스덴 레지덴츠 궁전 보수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인상적인 재건 작업이 펼쳐지는 드레스덴에서 부활하고 있는 것은 건축물뿐만이 아니다. 이 도시는 지금 오랜 전통과 현대 예술을 아우르는 폭넓은 문화 부흥을 이루어가고 있다.

(왼쪽부터)
바로크 양식의 오페라하우스인 젬퍼오퍼. 1710년 유럽 최초로 도자기를 제작한 마이센 도자기 회사.
(왼쪽부터) 왕궁 안에서 동독 전통 요리를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 안나 임 슐로스. 옛 발전소를 리모델링한 복합문화공간 크라프트베르크미테.

옛 방식, 현대적인 예술
드레스덴의 전통을 현대로 계승하는 기업 중 하나는 1710년에 유럽 최초의 도자기를 생산한 고급 도자기 회사인 마이센Meissen이다. 오래전에는 마이센 공장에서 드레스덴까지 24km에 달하는 울퉁불퉁한 흙길을 마차로 이동해야 했다. 충격을 줄이기 위해 도자기는 커다란 빵 덩어리에 싸여 운반되었는데, 마치 먹을 수 있는 뽁뽁이인 셈이다. 오늘날 마이센 도자기는 드레스덴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으며, 그중에서도 도자기를 잘 볼 수 있는 곳은 <군주의 행렬> 벽화다.
레지덴츠 궁전 외벽의 노란색 타일에 그려진 이 거대한 벽화에는 작센의 역대 왕들이 나타나 있다. 전후에 재건된 올드 타운 대부분의 건물과는 달리, 이 벽화는 원형 그대로 보존되었다. 가마의 고온에서 만들어진 도자기 타일이 폭격의 화마를 견뎌낸 것이다. 섬세한 아름다움과 강인한 회복력이 공존하는 이 도자기는 드레스덴이라는 도시를 상징하기에 합당하다.
레지덴츠 궁전을 따라 걷다가 네우마르크트Neumarkt 광장으로 들어선다. 이곳은 마이센의 현대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광장에 있는 부티크 매장 위층 창가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이 보인다. 눈부시게 하얀 매릴린 먼로의 흉상이 회전대 위에서 돌고 있고, 그녀의 입술에는 분홍색 유리로 만든 풍선껌이 부풀어 오른다. 동독 시절 마이센은 마르크스와 스탈린의 흉상을 제작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유형의 유명 인사를 표현한다. 매릴린 먼로 조각상은 마이센과 독일의 현대 작가 미카엘 뫼비우스Michael Moebius의 합작품이다.
걸어서 가까운 곳에 뫼비우스의 층고 높은 아파트 겸 스튜디오가 있다. 문 앞에서 나를 반기는 그는 가죽 재킷을 걸친 키가 큰 50대 중반 남성으로 갈색 머리를 휘날리고 있다. 아파트는 뫼비우스 특유의 장난기 넘치는 스타일의 작품들로 가득하다. 턱시도를 입은 배우 대니얼 크레이그가 벽에 걸린 액자 속에서 커다란 풍선껌을 불며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한쪽 구석에는 실물 크기의 스타워즈 드로이드가 손에 프라다 쇼핑백을 들고 서 있다. 연말이 아닌데도 한껏 꾸며진 크리스마스트리가 실내를 밝은 빛으로 채운다. “1년 내내 이렇게 두고 있어요.”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드레스덴 사람들은 당신에게 이 도시가 마음에 드는지 묻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말해준다.”
-움베르트 에코, 역사학자이자 소설가


(왼쪽부터) 구시가지 노이마르크트에 위치한 마이센 매장에 전시된 매릴린 먼로 흉상. 다목적 홀인 쿨투어팔라스트.

뫼비우스의 극사실 회화 작품인 풍선껌을 불고 있는 매릴린 먼로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면서 이제는 온갖 티셔츠와 포스터에도 등장한다. 이런 유명세는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의 최근 페이지에 불과하다. 그는 동독 군에 강제 징병되기도 하고,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고, 절친한 친구인 휴 헤프너가 거주했던 플레이보이 맨션에 17년 동안 들락날락하며 살기도 했다. 동독에서 자라면서 서방의 문화적 아이콘을 동경하 던 어린아이가 상상할 수 없는 삶이었을 테다.
“동독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면서 많은 것을 갈망했어요. 어릴 땐 유화 그림 그리기가 취미였는데 항상 금지됐던 디즈니 만화 캐릭터를 그렸죠. 코카콜라와 도날드 덕 같은 상징물이 위협으로 간주되던 시기였어요.” 제2차 세계대전과 사회주의 체제가 드레스덴을 파괴하기 전부터 존재하던 마이센 도자기를 서양 대중문화의 상징인 매릴린 먼로와 결합한 것은 낭만적인 일이다. “이 도시 사람들 모두 마이센과 함께 자랐어요. 집집마다 가지고 있는 마이센 도자기를 다음 세대에 물려줬어요. 제게 이보다 훌륭한 협업은 없을 거예요. 너무나도 큰 의미를 담고 있거든요.” 뫼비우스가 설명한다.
드레스덴의 또 다른 문화유산은 클래식 음악이다. 1548년에 설립된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Staatskapelle Dresden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 중 하나다. 1945년 폭격으로 소실된 바로크 양식의 오페라극장 젬퍼오퍼Semperoper는 도시의 정체성이라고 여겨져 근대주의를 추구하던 사회주의 정권도 원형 그대로 복원해 1985년에 재개관했다. 2023년 젬퍼오퍼 맞은편에 재건된 또 다른 역사적인 건물 안에 미드센추리풍 레스토랑 오페라Opera가 개업하면서 테아터 광장Theaterplatz 주변 재정비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이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벤저민 비들링마이어Benjamin Biedlingmaier는 드레스덴에 있는 또 다른 고급 레스토랑인 캐로셀Caroussel이 미쉐린 별 하나를 획득하는 데 일조한 이력이 있다.
“이 식당에서는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었어요.” 그가 작센주에서 생산된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을 한 잔 건네며 설명한다. “오페라는 캐주얼한 콘셉트의 레스토랑이에요. 미쉐린 스타에 대한 욕심은 없어요. 그저 거리를 걷던 사람들이 편하게 들어
올 수 있는 공간이기를 원했죠.” 그는 독일 전통 요리를 다른 나라 식재료와 결합하는 데 관심이 많다.
크랜베리를 곁들인 송아지 슈니첼, 참깨소스와 석류를 더한 매콤한 콜리플라워 요리를 주문하고, 후식으로는 바닐라 커스터드를 올린 젝슨 지방의 치즈케이크인 아이어슈에크eierschecke 한 조각을 고른다.

(왼쪽부터) 유럽 최대의 여장 연극 극장인 카르트 블랑슈의 공연자. 도시 중심부에 재활용된 공장 건물.

모든 음식이 훌륭했지만 이날 저녁 또 다른 약속이 있어서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드레스덴의 유서 깊은 건축물에 들어서고 있는 것은 고전 예술뿐만이 아니다. ‘뉴 타운’라는 뜻의 노이슈타트Neustadt지역은 드레스덴에서 가장 활기찬 밤 문화를 자랑한다. 이곳에는 과거 축사였던 건물을 개조한 유럽 최대 규모의 트래비스티 극장인 카르트 블랑슈Carte Blanche가 있다. 트래비스티는 여장을 한 배우들이 무대에서 노래와 연기를 선보이는 드래그 공연의 일종이다. 반짝이는 장식과 보석 왕관, 화려한 의상이 어우러진 무대에서 공연자들은 재즈, 보드빌, 프렌치 팝 음악에 맞춰 노련하게 몸을 움직인다. “트래비스티와 드래그는 조금 달라요.” 공연이 끝난 뒤 백스테이지에서 만난 출연자 조시 다이아몬드Josi Diamond가 거울 앞에 앉아 1920년대 신여성풍 화장을 지우면서 말한다. “트래비스티는 드래그보다 더 오래된 공연 장르죠. 우리는 샹송을 불러요. 그리고 깃털이 아주 많이 등장하죠.” 이 마지막 말은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비하면 아주 절제된 표현이었다. 주변에 깃털 목도리가 수북이 걸려 있어 마치 거대한 오리털 베개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드레스덴은 무대 공연이 매우 활성화되어 있어요. 젬퍼오퍼가 가장 유명하긴 하지만, 작은 극장에서도 여러 공연이 펼쳐져요. 자신을 예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도시라고 할 수 있어요.”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없지만, 드레스덴만큼 역사가 선명한 곳도 드물다. 레지덴츠 왕궁이 파괴된 지 80년이 지난 지금도 노이마르크트 광장 너머로는 복원 작업을 하는 인부들의 망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여행 첫날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눈에 보이는 곳 아래에 전쟁의 잔해가 남아있다. 하지만 드레스덴은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도시가 아니다. 과거의 비극은 도시를 짓누르지 않고, 되살아나는 불꽃을 더욱 타오르게 만드는 불쏘시개가 된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현대미술관 알베르티눔. 엘베강 너머로 보이는 드레스덴 미술 아카데미의 전경.노이슈타트의 쿤스트호프파사주에 있는 기린 아트워크. 레스토랑 안나 임 슐로스의 케이퍼소스를 곁들인 미트볼.

 


드레스덴에서 14시간


9AM 츠빙거 궁전의 제왕
몰려드는 관광객들을 피해 아침 일찍 드레스덴 최고의 명소 중 한 곳을 방문해보자. 일렬로 심어진 나무가 테두리를 이룬 안뜰, 갤러리, 아름다운 정원을 둘러볼 수 있는 츠빙거 궁전은 1700년대 초반 작센의 군주 아우구스투스 2세가 지은 바로크 건축물의 걸작이다. 인근에 있는 테아터 광장을 걸으면서 재건된 젬퍼오퍼와 드레스덴 대성당을 구경한 다음, 오페라 레스토랑에 들러 커피와 푸짐한 아침식사로 산책을 마무리하자. 이곳의 프렌치토스트가 매우 훌륭하다.
der-dresdner-zwinger.de

11AM 종교적 회복
짧은 거리를 걸어 올드 타운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자기 작품인 <군주의 행렬> 벽화를 보고 이어서 드레스덴 건축물 재건 프로젝트의 상징과도 같은 프라우엔키르헤Frauenkirche 안으로 들어간다. 18세기에 지어진 이 루터 교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괴되었다가 2005년에 복원됐다. 지금은 바로크 건축물의 표본이던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다. 금박을 입힌 제단과 파이프오르간이 매우 인상적인데, 매일 낮에는 오르간 연주 시연을 하고 저녁에는 공연을 진행한다.
frauenkirche-dresden.de

1PM 드레스덴의 현대미술에 빠져들다
프라우엔키르헤 근처에 현대미술관인 알베르티눔이 있다. 이곳에는 21세기의 피카소로 일컬어지는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를 포함한 드레스덴 출신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사회주의 정부 시절 전시가 금지되었던 카를하인츠 아들러Karl-Heinz Adler 같은 동독 작가들의 작품들도 소장하여 덜 알려진 보석 같은 컬렉션을 감상할 수 있다. 점심은 인근에 있는 안나 임 슐로스에서 먹자. 동독의 가정식 메뉴인 조스클로프제sossklopse(케이퍼소스에 조리한 송아지고기 미트볼)를 레지덴츠 궁전 안에서 즐길 수 있다. 
anna-dresden.de, albertinum.skd.museum

3PM 신흥 극장 지구
올드 타운 서쪽으로 20분 정도 천천히 걷거나 드레스덴의 노란색 트램을 타고 이동하면 옛 발전소 안에 자리한 복합문화단지인  크라프트베르크미테가 나온다. 19세기 당시 이 위압적인 벽돌 건물은 도시 전역에 전력을 공급했지만 한동안 방치되었고 1990년대에는 불법 테크노 파티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지금은 카페, 레스토랑, 여러 극장이 자리한 도시의 명소이다.
kraftwerk-mitte-dresden.de

(왼쪽부터 시계 방향)
제철 식재료로 만든 간소한 메뉴를 선보이는 편안한 분위기의 레스토랑 빌란드리. 노이슈타트 성 마르틴 교회의 인상적인 건축. 유서 깊은 유제품 상점인 푼츠 몰케라이

*** 더 많은 기사는 <내셔널지오그래픽 트래블러> 5월호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글. 대니얼 스테이블스DANIEL STABLES
사진. 크리스티안 케르버CHRISTIAN KER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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