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EYS
Puglia
바다를 딛고 있는 장화의 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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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7월호

흔히 이탈리아반도를 장화에 비유한다. 장화의 뒤꿈치와 굽에 해당하는 풀리아주는 북동쪽으로는 아드리아해, 남서쪽으로는 이오니아해를 접한다. 바다를 곁에 둔 풀리아의 소도시를 유람하며 고대의 이야기부터 현대의 삶까지 잔잔하게 흘러간다.

(왼쪽부터) 토레 과체토의 B와 C 구역에서는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풀리아주의 전통 가옥인 트룰리.
(왼쪽부터) 망루인 토레 디 과체토Torre di Guaceto 내부에 있는 고대 로마의 선박 모형. 자전거를 타는 여행자 뒤로 토레 디 과체토가 보인다.

 

고대의 숨결을 느끼며
전기자전거를 타고 세월의 흐름이 역력한 올리브나무 숲을 지난다. 그렇다. 풀리아주는 이탈리아 최대의 올리브오일 생산지다. 깊고 넓게 단단히 자리 잡은 뿌리, 비틀리고 갈라진 줄기, 굴곡진 가지마다 무수히 달린 타원형 잎사귀는 그 자체로 이곳의 역사를 대변한다. 평균 수령은 500년 이상이며 일부는 1000년이 넘는 삶을 버텨왔다. 토레 과체토 국립 자연보호구역 및 해양보호구역Torre Guaceto State Nature Reserve and Marine Protected Area(이하 토레 과체토)의 외곽에서는 올리브를 전통 방식에 따라 유기농으로 재배하고 있다. 5월 초라 열매가 맺히진 않았지만 이 풍경만으로도 풀리아 올리브오일의 싱그러운 풍미가 느껴진다.
담수 습지를 지나 어느덧 탁 트인 바다가 나타나고 16세기에 건립된 망루에 닿는다. 토레 과체토의 문화와 환경에 기반해 가이드 투어를 제공하는 탈라시아 협동조합Cooperativa Thalassia의 빈첸초Vincenzo가 옛 지도를 펼치며 당시의 역사를 설명한다. “스페인의 아라곤 왕국이 이탈리아 남부를 지배할 때 축조한 거예요. 오스만제국과 북아프리카 해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탈리아 남부 해안을 따라 일련의 망루를 건설했죠.” 드넓게 펼쳐진 아드리아해는 과거와 달리 마냥 평화롭기만 하다.
열쇠를 꺼낸 빈첸초가 굳게 닫혀 있던 망루의 문을 연다. “입구부터 계단까지의 공간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증축한 것입니다. 지금 오르는 계단부터가 원래 모습이에요.” 그의 설명을 들으며 2층에 다다르자 눈앞에 고대 로마의 배 한 척이 보인다. 이 선박 모형 안에는 암포라amphora(고대 지중해에서 올리브오일과 와인 등을 운반하고 저장하는 데 널리 쓰인 양손 달린 항아리)가 빼곡하다. “토레 과체토는 고대 로마의 주요 무역로에 자리해요. 아드리아해의 항로를 통해 고대 로마는 동방과 교역했죠. 이곳에서 발견된 배의 잔해와 암포라 등 고대 로마 시대 유물이 당시의 번영을 보여줍니다. 토레 과체토는 바다와 하천이 만나는 지점이라서 생물다양성도 풍부해요. 본래의 토양을 회복하기 위해 유칼립투스 같은 외래종을 제거하고 토종 식물을 심는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빈첸초가 이야기한다. 작은 박물관 같은 망루 내부에서 고대의 삶을 찬찬히 살펴보고 창밖으로 아드리아해의 해안선도 바라본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되돌아가는 길, 올리브나무 숲이 석양에 물들고 지중해성 관목의 달콤한 향이 공기를 가득 채운다. 고대 사람들도 맡았을 향기다.

(위부터) 아드리아해를 품고 있는 토레 과체토. 토레 과체토 외곽의 올리브나무 숲에 석양이 스며든다.

LOCAL FLAVOR
피아스케토Fiaschetto
풀리아주의 토종 방울토마토로 주로 토레 과체토에서 유기농으로 재배되고 있다. 배가 불룩하고 목이 가느다란 전통 유리병인 피아스코fiasco와 비슷한 모양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올리브오일에 살짝 절이면 풍미가 더욱 풍부해지고, 소스로 만들면 일반 토마토보다 진하게 농축된다. 하마터면 사라질 뻔하였으나 지역 농가와 슬로푸드 운동의 노력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아기자기한 집과 그릇
때론 차 안에서 잠시 스친 풍경이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남기도 한다. 푸른 초원에 마치 루비를 흩뿌린 듯 발간빛의 양귀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원뿔형 지붕의 돌집인 트룰리Trulli와 그 곁을 지키는 올리브나무의 풍경이 여전히 선연한 것처럼.
트룰리는 풀리아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석회암을 활용해 선사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건축 방식으로 벽과 지붕을 층층이 쌓아 올린 전통 가옥을 일컫는다. 잘 보존된 트룰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알베로벨로 마을에 이르러 그 풍경을 한눈에 담는다. 그러다 지붕마다 독특한 형상이 눈에 들어온다. 태양, 달, 별 등의 기호가 하얗게 그려져 있거나 첨탑인 핀나콜로pinnacolo가 우뚝 솟아 있다. 모두 행운과 풍요 등을 가져다주며 축복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알베로벨로는 현지인이 거주하는 아이아 피콜라 지구Rione Aia Piccola와 카페나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 등이 즐비한 몬티 지구Rione Monti로 나뉜다. 조용하고 한적한 아이아 피콜라 지구를 거닐다가 문이 활짝 열려 있는 어느 트룰리 앞에서 현지인이 자신의 집으로 안내한다. “들어오세요! 편하게 구경하셔도 됩니다. 기부금을 내는 건 자유예요.” 또 다른 트룰리를 지날 땐 갑자기 어느 부부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이방인을 기꺼이 초대한다. “독일에서 알베로벨로로 여행 왔어요. 트룰리에 숙박하고 싶어서 여기를 예약했죠. 내부가 궁금하면 들어와서 둘러보세요!” 두 트룰리 모두 여러 공간이 아치 형태로 연결되어 있어 생각보다 꽤 널찍하다. 특유의 아늑한 느낌 덕분에 안에 계속 머물고 싶은 마음이 든다.
트룰리는 전통적으로 단층이지만, 트룰로 소브라노Trullo Sovrano는 알베로벨로에서 유일하게 2층 구조로 되어 있다. 18세기에 사제인 카탈도 페르타Cataldo Perta 가족을 위해 지어졌는데, 당시 명망 높은 가문답게 그 규모가 상당한 편이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운영되며 과거 이곳에 살았던 이들의 일상을 재현해두었다. 1층은 거실과 침실, 주방뿐 아니라 빵 굽는 공간과 저장고 등이 있고, 2층은 직조 작업 공간 등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지인들로 왁자지껄한 브라체리아 마첼레리아 솔레티Braceria Macelleria Soleti에서 식사를 하다가 트룰로 소브라노에 전시된 그릇과 똑같은 것을 발견한다. 요리가 담긴 접시의 테두리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작은 파란 꽃문양은 풀리아 도자기의 전통 장식이란다. 이곳에서 전통은 역사인 동시에 일상이다.

홀로 서 있는 올리브나무와 일렁이는 양귀비꽃, 트룰리가 이루는 이트리아 계곡Valle d’Itria의 풍경이 서정적이다

요새화된 농가의 아름다움
오늘은 태양광 버스를 타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이오니아해를 따라간다. 어느새 바다가 보이지 않고 살렌토 지역의 붉은 흙이 내리쬐는 햇살과 함께 풍경에 따스한 색감을 더한다. 올리브나무뿐 아니라 마치 눈 내린 듯 하얀 꽃이 만발한 아몬드나무도 가득하다. 이번 목적지는 마세리아 포르티피카타Masseria Fortificata(이하 마세리아). 직역하면 ‘요새화된 농가’로 적을 방어하기 위해 높은 담장과 망루 등을 갖춘 동시에 농작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사육하며 자급자족하던 농장을 뜻한다. 외부 침입이 잦았던 데다 농업과 목축업이 발달한 풀리아주의 역사와 문화가 함축되어 있는 곳이다. 오늘날 마세리아는 아그리투리스모Agriturismo(농가를 활용해 숙박이나 현지 문화 체험을 제공)로도 운영되고 있다.
나르도Nardò에는 여러 마세리아가 있는데, 운이 좋게 정말 아름다운 곳을 찾았다. 처음 마세리아 브루스카Masseria Brusca의 건축물을 가까이서 마주했을 땐 농가라기보다 고풍스러운 저택이라는 인상이었다. 주인인 조반니 추카로Giovanni Zuccaro가 가이드 투어를 이끌며 구석구석을 안내하자 비로소 요새와 농가의 면모가 드러난다. 연세 지긋한 그가 이탈리아어로 이곳의 역사를 설명한다. 이탈리아어를 모르는 나에게는 마치 중세의 언어처럼 들려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마세리아 브루스카는 16세기에 처음 건축되었어요. 오스만제국이나 해적 등의 침략에 대비한 이 망루가 마세리아의 중심부나 다름없었죠. 여기는 식용 비둘기를 사육하던 탑인데, 들어와 보세요!” 밖에서 언뜻 보면 정방형 망루 같은데, 고개를 숙여 안으로 들어가니 비둘기 둥지가 놓일 만한 수많은 오목한 공간이 계단식으로 배열되어 있다. 당시 비둘기 고기는 좋은 단백질 공급원이었고 배설물은 유기질 비료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18세기 초에 델라바테Dell’Abate 가문이 바로크 양식의 예배당과 여러 정원을 조성해 마세리아의 규모가 확장되었어요. 이 정원에서는 양봉을 했죠.” 추카로가 이곳에 살았던 이들의 모습을 흉내 내며 설명을 이어간다. 마치 요정들의 놀이터 같은 조각 정원도 숨어 있다. 12개의 조각상이 우물을 둘러싼 채 원형으로 배치된 곳이다. 조각상은 당시 기준으로 4대륙인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유럽을 형상화하였고 주위에는 이국적인 식물이 울창하다.

(왼쪽부터) 마세리아 브루스카의 바로크 양식 예배당. 아시아를 형상화한 세 개의 조각상.

마세리아 브루스카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농가의 역할에도 충실하다. 직접 운영하는 유기농 농장의 농축산물로 만든 빵과 치즈 그리고 각종 요리가 야외 식탁에 아름답게 차려진다. 전부 다 맛있지만 특히 농장의 달걀과 호박으로 만든 스포르마토sformato가 일품이다. 스포르마토는 달걀과 치즈, 채소 등 재료를 섞은 다음 틀에 넣어 굽는 이탈리아 전통 요리로 탱탱한 질감이나 부드러운 식감이 푸딩 같은 느낌을 준다.
이곳의 풍경이 해 질 무렵 더욱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뒤로한 채 마세리아 브루스카와 점점 멀어진다. 마세리아를 둘러싼 드넓은 평원이 또 다른 바다처럼 느껴진다.

(왼쪽부터) 농장의 달걀과 호박으로 만든 스포르마토에서 정성이 느껴진다. 조각 정원으로 향하는 입구 앞에서.

LOCAL FLAVOR
타랄리Taralli
풀리아를 대표하는 작은 도넛 모양의 전통 과자. 바삭한 식감으로 씹을수록 고소한 풍미가 배가된다. 기본 재료에 풀리아산 엑스트라버진 올리브오일과 드라이한 화이트와인이 포함된다고. 짭짤한 맛이 기본이나 추가 재료에 따라 달콤한 맛도 존재한다. 풀리아 사람들에게는 간식이자 식전에 입맛을 돋우는 안티파스토Antipasto로 일상적인 음식이다.


두 바다의 만남
여기는 이탈리아의 최남단인 산타 마리아 디 레우카Santa Maria di Leuca 마을이다. 아드리아해와 이오니아해가 만나는 곳이라 보트 투어는 필수 코스라고. 나는 알렉산데르 레우카Alexander Leuca가 운영하는 그로토grotto(해식동굴) 탐방 투어에 나선다. 전기로 운항하는 2층짜리 요트를 타고 아드리아해를 누비다가 항로를 되돌아온 후 이오니아해를 항해하는 여정이다. 그로토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해식동굴 입구 부근에 잠시 멈춰 가이드가 설명을 해준다. “해안 절벽에 포세이돈 얼굴이 보이시나요?” 바위 형상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건 만국 공통의 법칙인가 보다. 여기서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등장이 낯설지 않다. 풀리아주 남부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polis(도시 국가 또는 자치 공동체)로서 그 문화권에 속했기 때문이다. 포르치나라 동굴Grotta Porcinara에는 포세이돈 같은 신에게 제사를 지낸 흔적도 남아 있다고 한다. 안 그래도 아까 외교부에서 그리스 여행을 당부하는 문자가 왔는데 그만큼 지리적으로도 가깝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그로토는 단순한 동굴이 아니라 신과 요정이 머문 신성한 장소로 여겨진다. 마을 이름의 일부인 ‘레우카’ 역시 전설과 관련이 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바다에서 매혹적인 목소리로 선원을 유혹하는 반인반어 세이렌에 대한 이야기다. 세이렌 레우카시아Leucasia는 한 그리스 청년을 유혹했으나 그는 사랑하는 이가 있었기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레우카시아는 폭풍을 일으켜 연인을 바다에 빠뜨렸고 여신 아테나가 둘을 가엾게 여겨 돌로 변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불멸의 존재가 되어 영원히 함께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두 바위 절벽으로 실존한다. 동쪽의 푼타 멜리소Punta Meliso와 서쪽의 푼타 리스톨라Punta Ristola가 그 주인공. 둘 사이에 있는 산타 마리아 디 레우카 만은 아드리아해와 이오니아해가 만나는 상징적인 장소로 여겨진다. “바람의 방향 등에 따라 아드리아해와 이오니아해의 경계가 수면에 뚜렷이 나타나기도 해요. 두 바다의 색깔이 다르게 보이는 거죠.” 가이드의 이야기를 듣고 바다를 내려다보지만 오늘은 이러한 현상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파도와 함께 사랑이 넘실거린다.

(위부터) 산타 마리아 디 레우카 만은 아드리아해와 이오니아해가 만나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이곳 파도가 빚은 그로토는 신화의 무대이기도 하다.

TRAVEL WISE

가는 방법
루프트한자가 독일 뮌헨을 경유하는 인천-바리 항공편을 운항한다. 또는 대한항공이나 티웨이항공의 인천-로마 직항 노선을 이용한 다음, 로마에서 기차를 타고 풀리아주의 바리나 브린디시까지 갈 수 있다.

방문 최적기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풀리아주는 지중해성 기후 덕분에 연중 여행하기 좋다. 붐비지 않는 시기를 고려한다면 5월과 9월을 추천한다. 7~8월은 평균기온이 35℃ 이상이라 매우 더운 편이고 휴가철과 겹치는 성수기에 해당한다.

현지 여행법
살렌토 오픈 투어는 풀리아주의 살렌토반도를 둘러볼 수 있는 미니 버스 투어를 제공한다. 태양광 에너지로 운행하는 친환경 버스를 타고 해안을 따라 이동하며 가이드가 현지의 역사와 문화, 풍경 등을 설명해준다. 이 외에도 전기자전거나 도보 투어 등에 참여할 수 있다. salentopentour.wordpress.com

더 많은 정보
이탈리아관광청 italia.it/en/puglia
풀리아주관광청 viaggiareinpuglia.it

 

글. 김민주MIN-JOO KIM
사진. 김민주MIN-JOO KIM,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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