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시작될 무렵, 그곳으로 향한다.
레인포레스트 월드뮤직 페스티벌 2025에서 정글의 소리를 익히고, 그들이 사는 방식을 따르다.

‘마을에 들어온 사슴처럼’. 숲에서 살아가는 사슴이 낯선 환경에 들어가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을 빗댄 말레이시아의 속담이다. 반면 나는 사라왁의 중심 도시 쿠칭 시내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레인포레스트 월드뮤직 페스티벌 2025’가 열리는 열대우림으로 들어간 존재였다. 낯선 환경 속에서 정글의 소리에 점차 익숙해진다. 각기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은 현지인들이 연주하는 생경한 선율에 몸을 맡긴 채 춤추고 노래한다. 도시의 소음을 뒤로하고 열대우림 한복판에서 목격한 것은 단순한 음악 공연이 아닌 사람과 자연, 전통과 현대가 서로를 껴안는 장면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열대우림의 맥박에 맞춰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한다.

사라왁 문화마을에 조성된 멜라나우족의 톨하우스.
외국인 여행자가 테눈 기법 직조를 체험 중이다.
약동하며 이어지는 전통
사라왁이 위치한 보르네오섬의 또 다른 이름은 칼리만탄Kalimantan(‘뜨거운 땅’이라는 뜻의 인도네시아어)이다. 레인포레스트 월드뮤직 페스티벌 2025(이하 RWMF 2025)가 열리는 사라왁 문화마을에 도착하자 왜 이곳이 ‘뜨거운 땅’이라고 불리는지 단번에 이해가 갔다. 적도 바로 위에 붙어 있는 사라왁의 더위에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축제를 즐기고 있다. 사실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가 이곳의 더위보다 한층 더 뜨거웠다. 한쪽에서는 새의 깃털이 잔뜩 달린 전통 복장 가궁Gagung을 입은 이반족이 전통 북 베둥가bedungga를 연주하고, 고개를 돌리면 유럽과 아시아 등 국적을 망라한 아티스트들의 버스킹이 시선을 붙잡는다. 이 모든 광경을 감싸는 것은 열대우림이다. 빽빽하게 들어찬 숲은 속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새들의 지저귐만이 내부를 짐작하게 했다. 3일간 축제가 진행될 사라왁 문화마을에는 오래전 이 땅에 거주했던 7개의 민족 이반, 비다유, 멜라나우, 오랑울루, 말레이, 프난, 화교계의 가옥과 생활이 재현되어 있다. 복도가 기다란 다가구 공동주택인 이반족의 롱하우스Longhouse나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높은 기둥 위에 지어진 멜라나우족의 톨하우스Tallhouse 등 전통 가옥의 지붕 위에는 숲에서 날아온 새와 원숭이가 잠시 쉬어 가고, 그 아래에서는 현지인과 여행자가 풍경에 자연스레 녹아든다.
마을이 자리한 산투봉산에는 한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오래전 이 지역에 살던 산투봉과 세진디라는 두 공주가 서로 자신의 재능이 더 뛰어나다며 다투다가 신의 노여움을 사서 산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중 산투봉 공주가 변한 것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산투봉산. 산투봉 공주의 재능은 천을 짜는 것이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마을 곳곳에서는 전통 직조공들이 다양한 색과 무늬의 천을 짜고 있다. 신석기 시대부터 이어져 온 테눈Tenun 기법은 직조할 때 색실의 위치를 계산해 다양한 무늬를 가미하는 것이 특징으로 예전엔 혼례나 장례 등 의례복을 만드는 데 사용됐다.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등 선명한 색의 천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모습을 바라보는데, 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눈치챈 직조공이 직접 해보라며 권한다. 주황빛 긴 천을 들어 세로로 늘어선 날실 사이를 위아래로 교차하며 통과시킨다. 완성을 앞둔 순간, 옆에서 직조공의 “어!” 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놀라 시선을 따라가 보니 천을 너무 잡아당긴 탓에 처음 넣어 두었던 천이 끌려 나오는 게 아닌가. 긴장된 마음으로 도움을 받아 수습하고 일어서니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다른 여행자가 자연스럽게 그 작업을 이어간다. 한 폭의 얇은 천이 과거와 현재, 현지인과 이방인을 연결하고 있었다.

사페는 오랑울루족이 주로 연주한 현악기다.
이반족의 전통복장을 갖춰 입은 현지인.
이 외에도 팔찌나 목걸이 같은 전통 장신구를 만들어보거나, 노점상에서 사라왁의 특산물인 옥수수와 커피를 맛보거나, 소수민족의 공연에 참여할 수도 있었다. 이반족의 공연에서는 대나무로 만든 피리를 코로 부는 연주자가 시선을 사로잡았고, 무룻족의 전통놀이인 마구나팁magunatip은 대나무 막대를 리듬에 맞춰 뛰어넘는 방식으로, 우리나라의 고무줄놀이를 떠올리게 했다. 낯선 문화를 따라가던 중 어디선가 들려오는 몽환적인 악기 소리에 발걸음을 옮긴다. 기타를 닮은 현악기 사페Sape의 소리다. 오랑울루족이 사용하던 악기로, 주로 신성한 의식에서 연주되었다. 소리에 매료되어 체험 신청서에 이름을 적었다. 사페는 기타보다 몸체가 길고 속이 비어 있지 않으며, 맨 아랫줄로 멜로디를 연주하고 나머지 줄은 화음과 리듬을 만드는 데 쓴다고 했다. 간단한 설명이 끝나자 내 손에 사페 하나가 들렸다. 함께 강습받는 호주인 중년 남성이 아내에게 줄 튕기는 법을 알려주기에 옆에 있던 나는 그걸 눈치껏 따라 했다. 맑고 명료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연주곡은 오랑울루족의 환영 음악인 다툰 줄룻Datun Julud으로, 처음에는 멜로디를, 두 번째는 화음을, 마지막에는 리듬을 변주하며 반복했다. 처음엔 아주 느렸지만 점차 강사의 연주 속도에 맞춰가며 이곳의 유구한 전통을 손끝으로 익혀갔다.
열대우림의 생태계는 겉보기에 오랜 시간 동안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계절이 바뀌면 새로운 열매가 맺히고 새들이 둥지에서 알을 품는다. 이곳의 전통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그 소리에 맞춰 춤추고 노래한다. 문화는 그렇게 생명력을 얻는다.
"한 폭의 얇은 천이 과거와 현재, 현지인과 이방인을 연결하고 있었다."

Q&A
헤이리 아낙 하심
Hayree anak Hshim
RWMF 2025에서 사페 연주 워크숍을 진행한 사페 연주자이자 제작자.
사페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경험은 무엇인가요?
사페를 존중하고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누군가와 만날 때가 참 좋습니다. 사페를 몰랐던 사람들이 처음으로 악기 소리를 듣고 깊이 감동하는 순간들이 특히 더 오래 기억에 남더라고요. 가끔 이 지역 출신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문화유산을 처음으로 직접 듣고 경험하는 모습을 보곤 하는데, 그럴 때 과거와 현대의 연결 고리로서 이 전통을 유지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라왁 사람들에게 사페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궁금합니다.
사페는 보르네오의 오랑울루 부족에 전해 내려오는 전통 현악기입니다. 원래는 치유 의식을 위해 사용되었죠. 오늘날 이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정체성을 보존하는 방법입니다. 많은 악기가 대량 생산되고 있으나 사페는 수작업으로 제작되어 대를 이어 전해져요. 단순한 악기가 아니라 이야기이자 기억이며, 세대를 잇는 영적인 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의 자연이 사페 음악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나요?
사페의 모든 것은 땅, 강, 숲, 새와 곤충의 소리 등 자연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멜로디는 물의 흐름이나 전통 춤의 리듬을 흉내 내기도 하지요. 새로운 곡을 작곡할 때도 전통 선율을 참고해 현대적 비트나 음악과 결합해보며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실험합니다.

Q&A
사이예드 아슈라프 에드루스
Syed Ashraf Edruce
사라왁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밴드 미루커드MERUKED의 리더.
미루커드는 어떤 의미이며, 어떤 음악을 하는 밴드인가요?
미루커드는 사라왁 룬바왕족의 언어로 ‘영원한’을 뜻합니다. 이 땅의 전통을 이어가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지은 이름이죠. 저희는 전통 악기인 사페 연주를 중심으로 음악을 만들지만, 그 위에 실험적인 사운드를 더하려고 노력해요. 때로는 ‘전통적이지 않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저희만의 색깔이라고 생각합니다.
RWMF에 참가하게 된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RWMF는 저희에게 매우 특별한 무대입니다. 첫 공연을 사라왁 문화마을 인근 다마이 해변에서 했고, 2018년에는 RWMF 전야제인 레인포레스트 프린지 페스티벌 무대에도 올랐습니다. 이번에는 관객들이 평소 경험하지 못했던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몽환적인 분위기의 무대를 꾸몄는데, 다행히도 많은 분이 즐겨주셔서 감사했어요.
사라왁의 자연과 문화는 미루커드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나요?
사라왁의 열대우림은 저희 음악의 뿌리이자 정체성입니다. 우리가 밟는 땅, 마시는 공기, 입는 옷의 무늬, 노래하는 언어, 모든 소리 하나하나가 이 땅의 자연과 문화에서 비롯되었으니까죠. 저희는 사라왁의 자연과 문화를 담은 음악이 앞으로도 100년, 그 이상 오래도록 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노래합니다.
서로 다른 소리가 만드는 하모니
한낮의 더위가 누그러지고 숲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해 질 무렵, 사라왁 문화마을은 또 다른 열기로 달아오른다. 각자의 방식으로 축제를 즐기던 사람들은 하나둘 마을 깊숙한 곳으로 향한다. 인파를 따라가 보니 거대한 야외 무대가 등장했다. 축제가 열리는 3일 동안 오후 6시부터 메인 무대인 정글 스테이지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서브 무대인 트리 스테이지에서 아티스트들의 공연이 열렸다. 사라왁 지역의 뮤지션은 물론 해외 각지에서 온 아티스트들이 두 무대를 번갈아가면서 올랐다.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첫날, 첫 순서. 무대 위에 닭 한 마리가 등장했다. 이어서 깃털로 장식한 두건인 케타푸Ketapu를 착용한 이반족이 축제가 잘 마무리되기를 기원하는 공물 의식인 미링Miring을 진행한다. 닭을 하늘에 바치는 듯한 퍼포먼스가 끝나고 국적과 장르를 넘나드는 아티스트들의 공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RWMF 2025는 ‘연결: 하나의 지구, 하나의 사랑’을 주제로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사람과 지구를 잇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와이의 전통 음악과 현대 포크를 결합한 쿨라이위Kulāiwi(‘조상의 땅’이라는 뜻)는 ‘땅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알로하 아이나Aloha ʻĀina!”를 외치며 공연을 펼쳤다. 그 이후 무대에 오른 20여 팀은 각자의 언어와 방식으로 자연에 경의를 표하며 전통 악기나 장르를 현대적 요소와 결합해 사라져가는 것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특히 사라왁의 현지 밴드 미루커드Meruked는 사페 연주와 포스트 록 장르를 결합한 음악을 선보였다. 낮에 처음 경험해보았던 사페 연주를 떠올리며 무대를 감상했지만, 그들의 손에 들린 사페는 내가 연주했던 악기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음악은 국적을 불문하고 통하는 언어입니다. 지금 우리는 당신들과 연결되었음을 느껴요.” 시베리아의 소수민족 출신이 모인 밴드 오티켄Otyken의 보컬리스트 아지얀의 말처럼 공연이 거듭될수록 가수와 관객들의 목소리가 하나가 되며 무대와 관객석의 구분이 희미해져갔다. 사무라이 복장으로 무대에 오른 일본의 악대 세푸쿠 피스톨스Seppuku Pistols는 일본어로 노래를 부르는 대신 가사를 전부 ‘Peace’로 바꾸어 관객과 함께 외쳤다. 인도네시아 전통 음악과 프랑스 재즈를 결합한 가가 군둘Gaga gundul은 새소리를 흉내 냈다는 후렴구 ‘피오 피오’를 관객에게알려준 뒤 공연을 시작해 사람들이 내는 새소리로 열대우림을 가득 채웠다. 밤이 깊어질수록 공연의 열기는 무르익었다. 처음엔 내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리듬을 타던 관객은 어느새 두 팔을 흔들며 열광하다가 어느 순간 다른 이들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나 또한 가수들의 계속되는 공연에 목이 쉬는지도 모르고 뜨거운 분위기에 동참한다.

축제 2일차 헤드라이너인 The Earth, Wind & Fire Experience by Al McKay.
뮤지션과 관객의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진다.
자연과 사람의 연결
축제는 3일 동안 사라왁의 자연과 사람을 잇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보여주었다. 태양광 충전소를 곳곳에 설치해 친환경 에너지를 사용하고, 음식물 쓰레기는 현장에서 퇴비화했다. 친환경 관련 부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린 루아이Green Ruai 부스에서는 재활용 예술 작품 전시를 선보였고, 사라왁주 미리 지역에 기반을 둔 미리 중고품 판매업자 및 재활용업자 협회는 체험형 재활용 교육을 진행했다.
전통 가옥의 지붕 아래에서 강한 햇볕을 피하는 동안 에어컨 바람이 그립기도 했고, 일회용품 반입이 금지되어 목이 마를 때마다 가방에서 텀블러를 꺼내 정수기를 찾아다녀야 했지만, 입장권 수익금 중 일부가 숲을 조성하는 데 쓰인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괜스레 뿌듯해졌다.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은 3일 동안 사라왁의 문화와 자연에 깊게 연결된 연유일까. 축제 기간 중 틈틈이 플레이리스트에 넣어둔 노래를 들을 때마다 사람과 자연이 한데 뒤섞여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던 열대우림이 그리워진다.
Nga tabunok sa gugma ug kulturaNga kultura
사랑과 문화가 비옥하게 자란 땅사랑과 땅
필리핀의 전통 토착 음악을 록과 재즈의 요소와 융합하여 활동하는 밴드 쿤타우 민다나오Kuntaw Mindanao의 노래 ‘우나Una’는 ‘기원’이라는 뜻으로 자연을 예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TRAVEL WISE
항공편
인천공항에서 사라왁으로 가는 직항 노선은 없다. 에어아시아를 이용하면 간편 환승을 통해 쿠칭을 편하게 방문할 수 있다. 간편 환승 서비스란 한 번의 체크인으로 환승 공항에서 수하물 수취 및 체크인을 하지 않고 최종 목적지에서 수하물을 수취하는 시스템이다. 인천공항에서 사라왁의 쿠칭공항까지는 에어아시아 항공 그룹의 장거리 항공사인 에어아시아엑스와 에어아시아 말레이시아를 통해 코타키나발루나 쿠알라룸푸르를 경유하며, 최소 9시간 10분이 소요된다.
방문 최적기
쿠칭은 1년 내내 더운 열대 기후이며, 비가 적게 오고 화창한 날이 많은 건기는 3월부터 10월까지다. 6월부터 8월은 레인포레스트 월드뮤직 페스티벌을 비롯해 사라왁주의 토착민인 다약족의 문화를 담은 가와이 데이악 축제 등이 열려 활기찬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우기에도 비가 짧고 강하게 내려서 여행하기에 괜찮다.
축제 정보
1998년부터 한 해도 빠짐없이 사라왁 문화마을에서 진행된 레인포레스트 월드뮤직 페스티벌은 전 세계 수만 명의 방문객이 찾는 국제적인 음악 축제다. 쿠칭 시내에서 축제 장소인 사라왁 문화 마을까지는 약 35km 떨어져 있기에 쿠칭 도심의 더 힐스 쇼핑몰과 플라자 메르데카에 들르는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2027년 30주년을 앞두고 있으며, 그때까지 총 1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 탄소중립 캠페인을 진행한다.
더 많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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