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EYS
ONCE UPON A PORT: MARSEILLE
마르세유의 태양은 겨울에도 작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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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3월호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의 태양은 겨울에도 작열하며 많은 이들을 불러 모은다.
산과 바다가 이루는 찬란한 자연, 선사시대의 흔적과 지중해 문명, 과거 어부들의 유산과 현대의 예술적 면모가 교차하며 끊임없이 서사를 만든다. 마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처럼.

(왼쪽부터) 무스 질감의 고등어 위에 셀러리악을 꽃처럼 감싸고 강렬한 소스 등을 더한 오포의 요리.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당에서 이프성과 프리울섬을 품은 지중해의 풍광이 펼쳐진다.


“마르세유는 도시가 아니라 소설이다.”

- 극작가이자 영화 제작자 그리고 소설가인 마르셀 파뇰

뮤셈 외관의 그물망 형상 사이로 보이는 지중해.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자 가장 큰 항구도시, 마르세유. 오랜 세월 동안 항구에 드나든 수많은 이들의 서사가 무수히 쌓여 있는 곳이다. 모든 도시가 저마다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만, 마르세유에서는 유독 이 표현이 와닿는다. 게다가 한적한 겨울은 찬찬히 그 서사를 경험하기 좋은 계절이다.
마르세유는 기원전 600년경 그리스 포카이아Phocaea(현 튀르키예)에서 건너온 선원들이 마살리아Massalia라는 이름으로 세운 도시에서 유래한다. 이후 로마제국 때에도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이름을 떨쳤다. 그렇게 2000년 이상 지중해의 거점 역할을 하며 스페인과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이민자의 다양한 문화가 섞였다. 그래서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레지옹의 주도인 마르세유는 흔히 떠올리는 서정적인 프로방스와는 다른 역동성이 느껴진다.
프랑스 혁명의 상징이자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도 마르세유에서 비롯했다. 곡은 스트라스부르에서 탄생했지만, 마르세유 의용군이 파리로 진격하며 호전적으로 노래를 부른 것이 강렬하게 각인되어 ‘마르세유 사람들의 노래’라는 의미의 라 마르세예즈가 되었다. 이처럼 마르세유는 혁명의 열기도 매우 뜨거운 도시였다.
19세기 초반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에는 이러한 마르세유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탈리아 항해를 마치고 마르세유로 돌아온 항해사 에드몽 당테스는 스페인 출신의 사랑하는 여성과 결혼을 앞두고, 왕정 복고를 지지하는 파와 나폴레옹을 지지하는 보나파르트주의자 사이의 갈등 속에서 누명을 쓴 채 이프성에 갇힌다. 14년 동안 억울하게 수감 생활을 하다 극적으로 탈옥한 그가 백작으로 변신해 치밀한 복수를 감행하며 지중해 등지를 모험하는 여정이 그려진다.
이프성은 ‘옛 항구’라는 뜻을 지닌 비외포르Vieux-Port에서 배를 타고 약 20분 거리지만, 험한 암초 지형으로 이루어져 파고가 높으면 예나 지금이나 쉬이 정박할 수 없다. 겨울의 파도가 허락하지 않으면 오랜 기다림이 필요해 과거 악명 높은 감옥의 명성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그러나 프리울섬으로 향하는 배에서, 또는 프리울섬의 어딘가에서, 아니면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당에서 저 멀리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소설의 이야기는 선연해진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쓴 알렉상드르 뒤마는 1834년에 마르세유를 방문했다. 그가 이 시대에 왔다면 어떤 이야기를 펼쳤을까 궁금해질 정도로 마르세유는 달라졌다. 지중해 최대 규모 도시 재생 프로젝트인 유로메디테라네Euroméditerranée가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이 프로젝트는 현재도 진행 중이나 마르세유가 유럽 문화 수도로 선정된 2013년에 개관한 뮤셈Mucem(유럽지중해문명박물관)이 특히유명하다. 이탈리아계로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 건축가 루디 리치오티Rudy Ricciotti가 설계한 건축물 외관의 그물망 형상이 태양 빛을 걸러내 건물 안쪽으로 독특한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그물망 사이로 보이는 바다 풍경뿐 아니라 고고학과 인류학 등을 아우르며 지중해 연안의 다양한 삶의 방식과 문화를 풀어낸 상설 전시 역시 인상적이다. 또한 뮤셈 본 건물의 옥상과 17세기에 지어진 생장 요새Fort Saint-Jean가 보도교로 연결되어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왼쪽부터) 셰 퐁퐁의 부야베스로, 옛 어부들이 팔고 남은 자투리나 잔뼈 많은 생선으로 끓여 먹던 소박한 가정식이 오늘날 마르세유를 대표하는 고급 요리로 자리매김했다. 비외포르 어시장에 ‘야생sauvage’이라며 자연산을 강조하는 도밋과 생선이 진열되어 있다.

아침부터 비외포르는 어부들이 당일 갓 잡은 생선을 파는 가판 시장으로 활기가 넘친다. 이러한 풍경을 건축가 노먼 포스터가 설계한 ‘롬브리에르L’Ombrière(차양)’가 거대한 거울처럼 비춘다. 부두에 정박한 수많은 배와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푸른 하늘도 반영한다. 비외포르에서 가장 가까운 해변인 플라주 데 카탈랑Plage des Catalans 주변은 스페인 카탈루냐 출신 어부들이 정착해 살던 곳이다. 겨울의 찬 바닷속으로 몸을 던져 해수욕하는 현지인과 여행자들이 뒤섞여 있다. 플라주 데 카탈랑을 지나는 해안 도로에서는 수많은 러너가 달리는 중이다.
이처럼 현대의 마르세유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지만, 여전히 지중해의 심장으로 수많은 이들이 모여든다는 점은 변함 없다. 한겨울 마르세유에 온 여행자는 저마다 어떤 서사를 써 내려갈까.


마르세유에서 보내는 12시간
마르세유에 처음 닻을 내린 선원들처럼, 여행자의 무대도 옛 항구인 비외포르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곳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을 차곡차곡 쌓으며 채우는 하루.

르 파니에 초입에 있는 벽화.

10AM 선사시대 그리고 지중해 문명
뮤셈은 개관 10주년을 맞은 2023년부터 2030년까지 상설 전시의 각 에피소드를 점차 새롭게 단장 중이다. 고대부터 교류뿐 아니라 갈등과 대립이 끊임없이 교차해 온 지중해의 역사와 문화를 다면적으로 다루는 동시에 현대 예술가들이 지중해를 또 다른 시각으로 해석한 작품도 만날 수 있다.
뮤셈 본 건물과 나란한 코스케 메디테라네Cosquer Méditerranée는 현재 바닷속에 잠겨 있어 갈 수 없는 코스케 동굴을 똑같이 정교하게 재현한 곳이다. 마치 놀이기구 같은 6인승 특수 제작 차량이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동굴 탐험에 나선다. 벽에 손을 대고 염료를 뿌려 남긴 손자국은 약 2만 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짓궂은 장난기가 느껴진다. 동굴 탐험을 마친 후에는 당시에는 존재했으나 지금은 멸종된 동물의 모형과 각종 유물 등의 전시를 통해 마르세유가 세워지기 훨씬 이전인 구석기시대를 엿볼 수 있다. mucem.org, grotte-cosquer.com

12PM 가장 오래된 지역 구석구석
비외포르 북쪽 언덕의 르 파니에Le Panier는 마르세유의 역사적 기원이 되는 동네다. 지금은 골목마다 예술가들이 그린 힙한 그라피티와 각종 공방, 카페 등이 어우러져 있다. 점심은 르 파니에 지구 남쪽 입구의 비스트로 미미 마르세유Bistrot MIMI Marseille에서 제철 재료로 만든 지중해와 프로방스 요리를 음미한다. 특히 1~2월은 현지에서 ‘트뤼프truffe’라 부르는 검은송로버섯의 향이 가장 진해지는 시기이니 해당 요리를 꼭 맛볼 것. 이후 르 파니에의 골목을 누비며 다채로운 벽화를 구경한다. 마르세유에서 시작된 프랑스 국민 스포츠인 페탕크pétanque를 잠시 즐겨도 좋다. 라 불 블뢰La Boule Bleue는 1904년부터 페탕크 공을 만들어 온 곳이다. 매장 한편에 흙이 깔린 구역이 있기에 점원에게 “여기서 페탕크를 해볼 수 있나요?”라고 물으니 규칙을 알려주고 기꺼이 상대가 되어준다. 우선 바닥에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서서 코쇼네cochonnet(작은 돼지)라는 작은 공을 던진다. 이후 묵직한 쇠공을 번갈아 세 번 던져 코쇼네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떨어뜨려야 한다. 상대보다 코쇼네에 가까운 쇠공을 던진 쪽이 그 개수만큼 점수를 얻는다. 보통 13점에 먼저 도달하면 승리! 실제로 마르세유 사람들은 날이 좋을 때 광장이나 나무 아래, 해변 등 야외에서 경기를 자주 즐긴다. 페탕크를 할 때는 마르세유에서 탄생한, 아니스로 만든 리큐어 파스티스pastis를 곁들이기도 한다고. 매장 내에는 페탕크 공과 파스티스가 세트로 구성된 상품도 진열되어 있다. 이곳의 이름인 ‘파란 공’처럼 푸른빛이 도는 페탕크 공이 특히 유명하니 마르세유의 정체성이 담긴 기념품을 찾고 있다면 좋은 선택지다. 이 외에도 셔츠와 모자 등을 판매한다.

2PM 자애로운 어머니
르 파니에 지구에서 비외포르로 나오면 도로에 늘어서 있는 하늘색 ‘꼬마 열차Le Petit Train’가 눈길을 끈다. 실제 기차는 아니고 여러 객차를 연결한 버스에 가깝다. 겨울에는 한 노선만 운영해 매표 후 탑승하면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당으로 향하며, 비외포르를 지나 해안 도로를 따라가는 내내 푸른 바다가 곁에 머문다.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당에서는 도시의 전경뿐 아니라 이프성과 프리울섬을 품은 지중해를 한없이 감상할 수 있다. 성당 내부 천장에는 다양한 배 모형이 줄줄이 매달려 있는데, 거친 바다에서 살아 돌아온 선원들이 자신을 지켜준 성모마리아에게 감사를 표하며 봉헌한 것이라고 한다. 성당 꼭대기에서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성모마리아상은 마르세유를 수호하듯 도심 어디서나 보인다. 마르세유에 머물다 보면 현지인들과 마찬가지로 성모마리아가 늘 곁에서 보듬어주는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느껴진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코스케 메디테라네에서 현대의 들소보다 훨씬 컸다고 전해지나 멸종된 스텝바이슨Steppe Bison의 선사시대 벽화를 마주한다. 아틀리에 마르셀 카르보넬의 장인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작은 상통을 섬세하게 채색 중이다. 마르세유비누박물관에서 체험을 통해 완성한 라벤더 비누. 비스트로 미미 마르세유의 유럽농어 요리와 소고기를 푹 고아 만든 포토푀Pot-au-feu. 라 불 블뢰에서 페탕크 공과 파스티스가 함께 구성된 세트를 구매할 수 있다. 페탕크 한 판. 황금빛 모자이크 장식이 아름다운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당. 비외포르의 풍경.

4PM 마르세유 비누, 상통, 나베트 그리고 석양
마르세유 비누는 도시의 역사와 밀접하게 얽혀 있는 지중해 교역의 산물이다. 중세 시대 중동 시리아 지역에서 알레포 비누 기술이 지중해 항로를 통해 마르세유에 유입되었다. 마르세유는 프로방스에서 생산된 올리브오일과 인근 카마르그 지역 염전의 염생 식물에서 얻은 천연 소다로 비누를 만들기 시작한다. 오늘날 ‘전통 마르세유 비누’라 부르는 정의가 확립된 시기는 콜베르 칙령Édit de Colbert이 공표된 16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료를 올리브유와 소다, 소금, 물로 한정한 마르세유 비누는 뛰어난 품질로 명성을 떨쳤다. 요즘에는 이러한 올리브오일 비누 외에도 프로방스 지방에서 재배되는 라벤더 등 각종 재료를 더한 마르세유 비누가 기분 좋은 향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사보느리 라 리코른Savonnerie la Licorne은 비외포르 근처에 마르세유비누박물관Le Musée du Savon de Marseille을 운영한다. 여기서 제조 공정에 대한 설명을 듣고 기계에서 갓 나온 마르세유 비누에 도장을 각인해 나만의 비누를 만들어볼 수 있다.
마르세유비누박물관에서 5분 정도 걸으면 아틀리에 마르셀 카르보넬Ateliers Marcel Carbonel에 다다른다. 선반에는 예수 탄생을 기념하며 성탄 구유를 장식할 때 사용하는 프로방스의 전통 인형 상통santon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다. 이미 여러 여행자가 아기자기한 인물과 동물 상통 중 어느 것을 데려갈지 고심 중이다. 아틀리에 이름부터 범상치 않았는데, 마르셀 카르보넬은 1961년 상통 분야에서 최초로 ‘프랑스 최고 장인Meilleur Ouvrier de France’의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유산은 여기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예약을 통해 공방 견학도 가능해 여러 장인이 손수 점토를 성형하고 채색하는 등 각 공정의 정교한 작업에 함께 몰입하게 된다.
아틀리에 마르셀 카르보넬에서 도보로 2분 거리에 있는 르 푸르 데 나베트Le Four des Navettes에 들어서자 상큼한 향이 가득하다. 나베트는 밀가루와 달걀, 설탕 그리고 오렌지꽃 물 등으로 만드는 작은 배 모양의 과자로 1781년 문을 연 이곳에서 전통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생각보다 딱딱한 편이나 씹을수록 입안에 오렌지 꽃이 만개하는 듯한 풍미가 퍼진다. 마르세유 사람들은 햇볕 아래 나베트를 두었다가 먹기도 하는데, 태양의 온기로 기분 좋을 정도로 바삭한 식감을 느낄 수 있고 꽃향기도 더욱 짙어진다고 한다. 금속 상자에 담긴 나베트는 1년 정도 보관이 가능해 기념품이나 선물용으로도 인기가 좋다.
겨울에는 해가 빨리 지므로 일몰 시각을 확인해 석양을 감상하자. 하늘이 보랏빛, 분홍빛으로 물들며 마르세유만의 낭만이 피어오른다.

(왼쪽부터) 오포를 이끄는 콜린 폴키에 셰프. 그녀가 아버지의 레시피를 추억하는 음식 등이 저녁 코스 요리의 시작을 알린다.

8PM 따뜻하고 시원한 부야베스
83번 버스를 타고 작은 포구인 발롱 데 조프Vallon des Auffes로 향한다. 거대한 아치형 석조 다리 아래 마르세유 전통 어선이 정박한 모습으로, 옛 어촌 포구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곳에 자리한 셰 퐁퐁Chez Fonfon에서 과거 마르세유 어부들의 삶에서 탄생한 부야베스를 음미해본다. 부야베스를 주문하면 오늘 재료인 지중해 암반에 사는 여러 종류의 생선을 보여준다. 우선 국물과 크루통, 루유rouille(고추, 마늘, 사프란, 올리브유 등으로 만든 프로방스식 소스)와 아이올리가 나오고 이후 따로 익힌 생선이 등장한다. 진한 국물이 목으로 넘어가자 깊은 곳까지 뜨끈해지면서 “시원하다!”라고 절로 외치게 된다. 국물은 생선 육수와 사프란, 양파, 토마토, 각종 허브의 풍미가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크루통에 매콤한 루유를 바른 다음 국물에 적셔 맛보고, 생선은 국물에 담갔다가 또는 루유나 아이올리를 번갈아 찍어 먹는다. 따뜻한 국물을 계속 채워 주므로 한겨울에 잘 어울리는 음식이다.
또는 발롱 데 조프의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오포Auffo에서 저녁 식사를 즐겨도 좋다. 〈톱 셰프 프랑스 시즌 7〉의 준우승자로 프랑스 미식계에서 주목하는 여성 셰프 콜린 폴키에Coline Faulquier가 이끌고 있다. 시그너처Signature에서 미쉐린 1스타를 거머쥔 마르세유 최초의 여성 셰프가 되었지만, 이를 뒤로한 채 오래전부터 눈여겨온 발롱 데 조프에 새로이 자리를 잡았다. 기존의 정형화된 파인다이닝 코스에서 탈피해 당일 발롱 데 조프 어부에게 공급 받는 생선, 시장에서 매일 들여오는 싱싱한 프로방스 채소와 지중해 허브 등에 따라 메뉴를 유연하게 변주한다. 다채로운 색감의 담음새와 이채로운 식감의 대비가 미각을 깨우며 지중해의 맛과 향을 풍성하게 감각할 수 있다. 전통 부야베스 맛의 본질은 유지하되 질감과 온도는 완전히 색다르게 재해석한 요리를 선보이기도 한다.
chez-fonfon.com, auffo-restaurant.com

생장 요새 아래에서 바라본 낭만적인 석양.


아름답고, 인간적인
네모난 콘크리트 아파트 안에 부분 부분 빨강, 노랑, 파랑 등 원색의 면이 배치된 모습이 마치 몬드리안의 작품을 입체화한 것 같다. 아파트를 둘러싼 공원에서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는 주민들도 예술의 일부를 이루듯 활기찬 색채를 더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마르세유는 폭격 피해로 인해 심각한 주택 부족 문제를 겪고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전후 재건을 위해 르코르뷔지에에게 공동주택 설계를 의뢰했고, 그는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 그리고 건축과 도시 계획에서 자연의 역할 등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집대성한 자신의 주거 철학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마침내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주거, 교육, 커뮤니티 등의 모든 기능을 하나로 모은 ‘수직 도시’를 마르세유에 구현한다. 바로 눈앞에 서 있는 ‘시테 라디외즈Cité Radieuse(빛나는 도시)’다. 프랑스의 르제Rezé뿐 아니라 독일의 베를린 등 유럽의 다른 도시에도 이와 동일한 건축 형식인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é d’Habitation을 지었으나 마르세유에 있는 시테 라디외즈가 첫 시도였다. 이는 근대 건축의 혁신적 실험으로 여겨질 뿐 아니라 현대 주상복합의 뿌리이기도 하다.
호텔과 레스토랑, 건축 전문 서점, 편집숍 등이 있는 3층과 4층은 누구나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또한 마르세유관광안내소를 통해 예약하면 가이드 투어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한 643호를 방문할 수 있다. “총 스물세 가지 주거 유형이 있어요. 표준화를 통해 건축 방식의 효율을 추구하면서도 1인 가구부터 자녀를 둔 가정까지 다양한 삶의 방식을 고려한 거예요.” 가이드 카미유 장Camille Jean이 두꺼운 자료집을 넘기며 설명한다. “이 우편함은 현대에 설치된 것이고, 집마다 문 바로 옆의 직사각형 틈새로 우편을 받았어요. 그 아래에 음식뿐 아니라 얼음 배달함도 있죠.” 카미유가 배달함을 각각 열어 보이며 이야기한다. 같은 건물 내에 슈퍼와 빵집이 있었기에 신선한 빵과 우유 등을 쉽게 배달받을 수 있었다고. 슈퍼는 르 코르뷔지에 호텔에서 사용하는 행사 공간으로, 빵집은 찻집으로 바뀌었다.
643호로 들어가자마자 정면으로 거실이 보인다. 햇살이 들어오는 큰 창문은 근사한 산을 품고 있다. 현관 옆은 주방이다. 언뜻 작은 공간 같지만, 카미유가 장갑을 끼고 U자형 주방의 선반과 서랍을 하나둘 열자 숨어 있던 갖가지 기능이 드러난다.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 샤를로트 페리앙Charlotte Perriand이 여성으로서 자신의 경험에 기반해 세심하게 설계했어요. 밖의 음식 및 얼음 배달함이 이렇게 주방과 연결되고, 빵을 자르는 나무 도마도 서랍식으로 여닫을 수 있죠. 동선이 효율적이라 많이 움직이지 않아도 돼요.” 지금은 이런 주방이 보편적이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이었다. 알루미늄 같은 기능적 소재와 알록달록한 색깔로 구분된 수납장은 시각적으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으면서도 미적으로 아름답다. 무엇보다 거실과 이어진 열린 주방으로 가족과 함께 소통하는 공간을 추구했다. 643호는 복층 구조여서 거실의 계단을 올라가자 복도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안방, 다른 쪽은 미닫이문으로 공간을 분리하거나 합칠 수 있는 아이들의 방 두 개가 있다.
마치 내가 살 집처럼 구석구석 살펴보다 다음 투어 예약자를 위해 옥상으로 자리를 옮긴다. “옥상은 조깅 트랙과 체육관, 야외 극장, 어린이용 수영장 등으로 쓰인 공용 공간이었어요. 체육관은 마르세유 출신의 유명 디자이너인 오라이토Ora-ïto가 만든 현대 예술 공간 ‘마모MAMO’로 변모해 가끔 전시가 열릴 때만 개방되고 있죠. 야외 극장은 여전히 같은 용도로 사용되고 있어요. 외부인 출입 금지인 저쪽 구역은 어린이용 수영장이 딸린 유치원이에요. 다만, 르 코르뷔지에 호텔 투숙객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답니다. 그리고 여기 작은 정원도 있어요.”(카미유)
옥상에서는 샤넬의 2024/25 크루즈 컬렉션 패션쇼가 개최되기도 했다. 옥상의 한쪽에는 지중해가, 다른 쪽으로는 칼랑크 국립공원의 산악 지대가 드넓게 펼쳐진다. 여기서는 마르세유의 산과 바다를 모두 아우를 수 있다.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당의 성모마리아상이 저 멀리 반짝이는 것도 보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내려가는 도중에 한 층에서 아빠와 아이 그리고 반려견이 탑승한다. 아이가 해맑게 활짝 웃으며 “봉주르Bonjour(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넨다. 나도 똑같이 미소 지으며 마음을 전한다. 여기서 또 한 번 밝은 색조가 덧칠되면서 사람 사는 냄새가 진하게 밀려온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시테 라디외즈는 노출 콘크리트를 활용한 브루탈리즘 건축의 시초이기도 하다. 643호 아이들의 방 창문을 통해 지중해가 서정적으로 펼쳐진다. 시테 라디외즈의 색감을 닮은 르 코르뷔지에 호텔 레스토랑의 디저트. 르 코르뷔지에 호텔 레스토랑의 감각적인 내부.
시테 라디외즈는 인체 비례에 기반하는 ‘모듈로르Modulor’를 적용한 건축이다. 키가 약 183cm인 사람을 기준으로 황금비를 활용해 층고 높이와 창문 크기 등을 정했다.
석회암 절벽과 협곡 그리고 지중해 바다가 절경을 이루는 칼랑크 드 소르미우.

찬연한 대자연 속에서
마르세유 남쪽에 자리한 칼랑크 국립공원Parc National des Calanques을 탐험하는 날이다. 프로방스 방언에서 유래한 ‘칼랑크’는 바다가 석회암 절벽을 깊게 파고 든 좁고 긴 만을 뜻한다. 햇빛에 하얗게 빛나는 석회암은 약 1억 년 전에 형성된 것이다.
다양한 액티비티 투어를 운영하는 마르세유 칼랑크 파시옹Marseille Calanques Passion의 전문 가이드 바니나 솔리나스Vanina Solinas와 함께 하이킹에 나선다. 오전 9시 30분, 셰 제Chez Zé 레스토랑 인근 주차장에서 출발한 우리의 목적지는 칼랑크 드 소르미우Calanque de Sormiou(이하 소르미우만)다. 소르미우만으로 향하는 등산로가 다양하기 때문에 ‘메 칼랑크Mes Calanques(나의 칼랑크)’ 앱을 통해 루트 등을 확인하고, 하이킹 할 때는 바위에 칠해진 표지도 살펴야 한다.
숲을 헤치며 로즈메리 향을 맡고 반려견과 함께 온 하이커뿐 아니라 산악자전거 타는 이들을 만난다. 그리고 출발한 지 약 15분 만에 지중해가 보이는 근사한 풍경이 나타난다. 웅장한 석회암 협곡 너머로 리우섬Île Riou의 모습이 빼꼼히 드러난 것이다. 여기서부터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내려갈수록 눈에 담기는 바다의 면적도 점차 늘어난다.
겨울의 낮은 보통 12℃ 내외의 기온이라 하이킹하기 좋다. 매서운 미스트랄(지중해로 불어오는 차갑고 건조한 북서풍)이 땀을 식혀주는 고마운 존재가 되기도 한다. 땀을 씻어내기 위해 기꺼이 차디찬 바다에 뛰어들어도 좋다. 비록 나는 상상에 머물렀지만, 막 해수욕을 하고 뭍으로 나온 수영복 차림의 할아버지를 발견한다. 그 옆에는 도톰한 옷을 입고 앉아서 또는 누워서 겨울의 햇살을 즐기는 이들이 보인다. 소르미우만은 여름에 특히 붐빈다고 하나 겨울에는 적당히 고요하고 한적하다.
소르미우의 바다는 신비로우면서도 청량한 푸른빛이 돌고 군데군데 짙은 군청색 물감을 푼 것 같다. “바닷속에 서식하는 포시도니아Posidonia 해초 때문이에요. 이 해초 군락의 밀도가 높을수록 수면이 남청색을 띠죠. 단위 면적당 탄소 저장 능력이 열대우림보다 뛰어나요. 우리 지구를 지키는 존재죠.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절벽 아래에 코스케 동굴이 있어요. 다이버인 앙리 코스케Henri Cosquer가 처음 발견하면서 그의 이름이 붙었죠.” 바니나가 설명해준다. ‘어제 다녀온 코스케 메디테라네의 진짜를 여기
서 만나게 될 줄이야!’ 빙하기에는 해수면이 현재보다 훨씬 낮았기 때문에 동굴이 육지에 있었다. 기후 변화로 인해 현재는 동굴이 바다에 잠기게 되면서 벽화가 지워질 위기에 처하자 보존 목적으로 똑같은 코스케 메디테라네를 만든 것이다. 나는 먼 옛날 지중해에 펭귄이라고 불린 큰바다쇠오리Great Auk(남극의 펭귄과 다른 멸종된 종)가 살았다는 것이 눈앞에 펼쳐진 풍경 속에서 더욱 신기하게 다가온다. 바니나는 현재 칼랑크 국립공원에 여우와 프랑스에서 희귀한 흰배줄독수리Bonelli’s Eagle 그리고 참고래와 여러종의 돌고래 등이 살고 있다고 알려준다.
“소르미우는 프로방스 방언으로 ‘최고의 샘’을 뜻해요. 석회암 지형의 특성상 물이 귀했는데, 이곳에 샘이 솟아나는 우물이 있었거든요. 덕분에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었죠. 지금은 샘물이 말라버렸지만요.”(바니나) 곧이어 작은 배들이 정박 중인 소르미우 포구에 닿는다. 소박한 포구 주변에는 프로방스의 전통 가옥인 카바농Cabanon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과거에 어부들이 그물 등 어구를 보관하며 잠시 거처하던 창고형 집인데, 요즘은 별장처럼 쓰인다고 한다.
카바농에서 낚시한 생선으로 끓인 부야베스에 파스티스를 곁들이고, 페탕크를 즐기며 바다를 품는 것. 내가 여기서 떠올린 소설의 한 장면이자 마르세유식 삶의 단편이다.

(위부터 시계 방향) 바다 빛깔이 영롱한 소르미우만의 풍경. 하이킹 중에 멀리 떨어진 아찔한 절벽에서 클라이밍하는 이들을 발견한다. 칼랑크 국립공원에서 산악자전거도 즐길 수 있다.

TRAVEL WISE
항공편
에어프랑스가 파리를 경유하는 인천-마르세유 항공편을 운항한다.

현지 여행법
‘마르세유 시티패스’를 구매하면 버스, 지하철, 트램 같은 대중교통을 무제한 이용하고, 주요 명소에 무료입장 가능하다. 코스케 메디테라네와 뮤셈 관람,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로 향하는 꼬마열차 탑승 등의 혜택이 포함된다. 24/48/72시간권이 있으며 패스를 처음 개시한 시점부터 해당 시간이 적용된다.

겨울 날씨
마르세유는 지중해성 기후를 가진 도시로 겨울에도 온화한 편이다. 프랑스 기상청 통계에 따르면 마르세유는 거의 매년 연간 일조 시간 전국 1위를 차지하는 도시로, 1년 중 약 300일 맑은 날을 자랑한다. 햇빛이 내리쬐면 따뜻하나 미스트랄이 세게 불면 추울 수 있으므로 여행하는 일정의 기온과 바람 등을 확인해 옷을 챙기는 것이 좋다.

더 많은 정보
프랑스관광청 france.fr/ko
마르세유관광안내사무소 marseille-tourisme.com/ko

평온한 소르미우 포구.

 

 

글. 김민주MIN-JOO KIM
사진. 김은주EUN-JU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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