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처럼 영롱한 윤기가 흐르고 연분홍빛 지방이 결처럼 퍼져 있는 짭짤하면서도 달콤한 하몽 이베리코는 샤퀴트리 보드의 왕관 같은 존재다. 스페인을 상징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이끼처럼 푸른 초원에서 도토리를 먹으며 자라는 돼지부터 능숙한 장인이 타파스 바에서 얇게 썰어내는 한 장의 슬라이스에 이르기까지, 하몽을 만드는 여정에는 수 세기에 걸쳐 이어진 전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돼지들이 우리 주변을 느릿느릿 돌아다니는
모습을 숨죽이고 지켜본다. 돼지의 길고
검은 거친 털이 은은한 아침 햇살을 받아 희미하게 빛난다.
젖은 흙에 검은 발굽을 꾹꾹 눌러 디디며 돼지들이 걸어 다닌다. 풀로 뒤덮인 평원 곳곳에서 낮게 울리는 꿀꿀거림이 파도처럼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한다. 몇 마리는 호기심을 보이며 내게 다가오고, 또 다른 돼지들은 내가 있는지조차 개의치 않는 듯 서로 모여 몸을 비벼대며 온기를 나누고 있다.
나는 지금 셰프 호세 피사로José Pizarro와 함께 작은 마을 이게라 데 라 시에라Higuera de la Sierra 근처의 데헤사dehesa(이베리아반도의 전통적인 목초림으로 참나무 등이 드문드문 자라는 방목지)에 서 있다. 이곳은 시에라데아라세나 국립공원 안에 자리하는데, 포르투갈 국경과 가까운 산악 지대로 스페인의 다른 지역보다 강수량이 많아 숲이 특히 울창하다. 이른 아침에 내린 소나기 덕분에 관목이 듬성듬성 자란 비탈 위로 옅은 안개가 살짝 걸려 있다. 녹슨 듯한 색으로 긁힌 줄기를 가진 뒤틀린 코르크나무 사이를 지나 들판을 걷다 보면 계절의 첫 도토리를 찾아 열심히 먹이를 탐색하는 또 다른 무리의 방목 돼지를 마주치게 된다.
사실 녀석들은 모두 평범한 돼지가 아니다. 이베리아반도를 터전으로 수천 년 동안 지중해성 목초림에서 살아온 이 돼지들은 그 유명한 하몽 이베리코 데 베요타jamón ibérico de bellota 생산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도토리를 먹여 키운 순혈 이베리코 돼지로 만든 이 하몽은 스페인의 육가공 식품 가운데서도 최고급으로 꼽히는 ‘블랙 라벨’ 등급이기도 하다. 2014년에 도입된 색상 라벨 제도는 돼지의 혈통과 사육 방식, 특히 먹이에 따라 하몽 이베리코를 구분한다. 이는 스페인의 미식 유산을 보호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돼지 무리는 하몽 이베리코 데 베요타의 명가 싱코 호타스Cinco Jotas를 위해 사육되고 있다. 이곳은 기업가 후안 라파엘 산체스 로메로Juan Rafael Sánchez Romero가 1879년에 설립한 회사다. 나와 함께 있는 또 다른 사람은 싱코 호타스의 이사인 마리아 카스트로 베르무데스María Castro Bermúdez다. “몇 주만 지나면 도토리로 바닥이 카펫처럼 뒤덮일 거예요. 이 돼지들은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달콤한 도토리를 찾아요. 꽤 까다로운 편이죠!” 그녀가 웃으며 말한다. 돼지들은 도토리뿐 아니라 야생 허브와 과일, 버섯도 먹으며 풀을 뜯는다. 이런 숲속 식단은 하몽에 여러 겹으로 겹치며 깊은 풍미를 더한다.
나는 바로 전날 저녁, 세비야 중심부의 타파스 바인 싱코 호타스에서 그 복합적인 맛을 직접 경험했다. 아페리티보(저녁 식사 전 가볍게 술과 안주를 즐기는 유럽 문화)의 활기로 북적이는 거리의 야외 좌석에 앉아 무의식적으로 하몽 슬라이스를 계속 집어 먹었다. 얇은 슬라이스에서 달콤하면서도 산뜻한 신맛, 고소함이 겹겹이 어우러지며 감칠맛이 터져 나왔다. 나는 셰리주를 한 모금 마실 때만 잠시 손을 멈추었다. 특히 피노Fino 같은 드라이한 셰리는 특유의 산뜻한 산미로 하몽의 풍부한 지방을 깔끔하게 정리해준다. 덕분에 하몽의 풍미가 입안 전체에 고르게 퍼져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페어링이 되었다. “이 돼지들은 긴 다리와 가느다란 발목 덕분에 이런 구릉 지형에 잘 적응해 왔어요. 지금은 몬타네라montanera(10월부터 3월까지 이어지는 방목 및 도토리 섭취 시기)라서 하루에 약 14.5km를 걸어요. 여름에 6.4km 정도 걷는 것과 비교하면 훨씬 많죠.”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를 다시 현재의 풍경으로 끌어온다.
이 돼지들은 근육 속에 지방을 더 많이 저장하는 유전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많은 운동량이 더해지면서 지방이 근육 깊숙이 자리 잡고, 바로 이것이 하몽 이베리코 특유의 핵심적인 풍미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많이 걸어 다니지만, 앞으로 석 달 동안은 도토리를 마음껏 먹으며 돼지들의 체중이 약 90kg에서 180kg으로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어날 거예요.” 마리아가 설명을 덧붙인다. 도토리 중심의 식단과 돼지 특유의 지방 성분 덕분에 라드는 올리브오일에 많이 들어 있는 올레산 함량이 높다. 그 결과 하몽은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특유의 식감을 갖게 된다.
장인의 한 조각
데헤사에서 싱코 호타스로 이동하는 동안, 나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몽 이베리코의 깊은 풍미 뒤에 숨겨진 오랜 전통을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 “최소 5년이 걸리는 과정이에요. 돼지를 키우는 데만 해도 약 2년, 고기를 숙성하는 데 또 3년이 필요하죠.”
우리는 근처의 아라세나Aracena 마을에서 잠시 차를 멈추었다. 이곳은 자갈이 깔린 골목과 산홋빛 지붕을 얹은 흰 건물이 어우러진 그림 같은 마을이다. 이곳에는 지역의 풍미가 마을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개성적인 델리 상점에서는 이 지역에서 채취한 풍성한 버섯으로 만든 각종 보존식과 지역 올리브오일은 물론 하몽 이베리코도 판매한다. 여러 콘피테리아confitería(스페인 전통 제과점)에서는 안달루시아를 대표하는 디저트도 만날 수 있다. 예를 들어 토시니요 데 시엘로tocinillo de cielo(달걀노른자와 설탕으로 만드는 매우 진하고 달콤한 전통 케이크)와 피오노노pionono(시럽에 적신 작은 롤 스펀지케이크 위에 토치로 그을린 크림을 올린 디저트) 같은 것들이다. 여기서 잠시 맛본 음식들은 이 지역 미식 세계의 단면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경험은 싱코 호타스의 저장고에 도착하며 더욱 깊어졌다. 데헤사에서 약 30분 거리의 하부고Jabugo 마을은 이베리코 하몽으로 유명해 중심 광장의 이름도 플라사 델 하몽Plaza del Jamón이다. 이곳에 있는 저장고에서 거의 150년 동안 같은 방식으로 고기를 숙성해 왔다고 한다.
붉은 벽돌로 된 저장고 계단을 내려가자 강렬하게 짭짤한 향이 코를 스친다. 베이컨을 떠올리게 하지만 더 달콤하고, 스모키한 기운과 함께 은은한 나무 향이 섞여 있다. 거대한 지하의 천장에는 황금빛 윤기가 흐르는 하몽이 끝없이 매달려 있다. 이곳은 싱코 호타스 생산 과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거대한 숙성 공간이다. 셰프 호세 피사로의 런던 레스토랑으로 보내기 위해 따로 표시된 하몽도 눈에 띈다. 해발고도 약 650m에 자리한 하부고는 하몽을 건조하고 숙성하기에 이상적인 미세 기후를 갖추고 있다.
저장고의 작은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차가운 산바람이 햄을 천천히 말려준다. 저장고 책임자이자 칼라도르calador(하몽의 숙성 상태를 향으로 판별하는 전문가)인 발레리아노 라모스Valeriano Ramos가 품질 검사 작업을 진행한다. “저는 오감을 모두 사용해요.” 그가 통통한 돼지 뒷다리를 손으로 주무른 뒤 칼라cala(하몽의 숙성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햄에 찔러 향을 맡는 얇은 탐침)라고 불리는 금속 도구를 꽂았다가 빼내어 코에 가져간다. 그는 미묘한 향의 차이를 통해 하몽의 상태를 판단한다. 더 숙성이 필요한지, 더 많은 공기나 습도를 요하는지 필요한지, 아니면 이미 최적의 단계에 도달했는지 말이다. 거의 30년에 걸쳐 다듬어진
그의 감각은 마치 와인의 향과 맛을 평가하는 소믈리에의 정밀함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하몽 이베리코에 대한 깊은 문화적 존중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장인의 기술은 시식실에서도 이어진다. 돌로 된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오르며 따뜻한 온기가 가득한 이 공간은 품격 있으면서도 아늑한 거실 같다. 길고 가느다란 칼을 손에 든 채 완벽한 집중력을 보여주는 세베리아노 산체스Severiano Sánchez는 30년 넘는 경력의 마스터 하모네로master jamonero(하몽 자르는 장인)이다. 무게감 있는 베요타 등심bellota loin(도토리를 먹고 자
란 이베리코 돼지로 만든 최고 등급 하몽 부위)을 은색 장치에 단단히 고정한 뒤 종잇장처럼 얇고 반투명한 슬라이스를 일정하게 하나씩 썰어낸다. 이 부위는 소매 가격이 약 119만원에 이른다. 전용 장비뿐 아니라 마치 발레 동작 같은 유연한손놀림은 이 작업이 단순한 음식 준비가 아니라 전통과 예술이 결합된 장인 기술임을 보여준다.
방문객들은 저장고 투어와 시식 프로그램, 하몽 슬라이싱 클래스에도 참여할 수 있다. 나는 마사maza(하몽의 앞쪽에 위치한 비교적 살코기가 많은 부위)를 맛본다. 얇은 직사각형 조각이 겹겹이 원형을 이루며 아름답게 담겨 있다. 이 부위는 육즙이 풍부하고 향이 깊다. 반면에 푼타punta(하몽 끝 부위)는 혀에 닿자마자 녹아내리며 달콤하면서도 짭짤하고 향신료 같은 풍미가 터진다. 그 사이사이에 과일 향이 풍부한 오스본 레어 셰리 솔레라 비씨 이백Osborne Rare Sherry Solera BC 200을 한 모금씩 마시니 매혹적인 페어링이 완성된다.
“하부고와 싱코 호타스의 역사와 경제는 서로 깊이 얽혀 있어요.” 마리아가 자신의 손가락을 맞물리며 그 관계를 설명한다. “하지만 하몽 이베리코는 스페인 전역에서 사랑받고 있고, 지역에 따라 즐기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테네리페Tenerife는 습도가 높기 때문에 숙성이 덜 된 하몽을 먹는 편이고, 카탈루냐에서는 팔레타paleta(돼지 앞다리로 만든 하몽)를 선호해요. 바스크 지방에서는 보통 더 강한 풍미로 숙성된 하몽을 즐기죠.”
지역마다 뿌리내린 각별한 존중
어디를 가든 하몽 이베리코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시장에서도, 식탁 위에서도, 그리고 돼지를 기르는 사람들에게서도 그 열정이 전해진다. 우엘바Huelva 지방의 리나레스데 라 시에라Linares de la Sierra는 인구 약 300명의 작은 마을이다. 마을의 붉은 벽돌 아치를 지나면 동화 속 장면 같은 안뜰이 펼쳐진다. 자갈 모자이크 바닥과 돌로 만든 우물, 감귤나무가 어우러진 뜰은 레스토랑 아리에로스Arrieros로도 이어진다. 이 소박한 레스토랑은 이베리코 돼지 요리에 바치는 찬가와도 같다. 하몽뿐 아니라 돼지 지방을 더해 깊은 풍미를 내는 토마토와 무화과 수프, 진한 소스에 조린 돼지 혀 요리, 부드러운 플루마pluma(이베리코 돼지 목덜미 쪽에서 나오는 매우 부드러운 고급 부위) 스테이크, 향긋한 카스타녜타스castañetas(돼지의 침샘을 이용해 만드는 전통 요리)까지 다양한 메뉴를 선보인다. 디저트 역시 이베리코 돼지 문화와 연관되어 있다. 과거 부유한 도축장 주인들 사이에서 인기 있던 향신료 와인에 절인 복숭아, 브륄레 스타일의 도토리 푸딩 같은 메뉴가 대표적이다.
훨씬 더 큰 도시인 말라가에서는 야자수가 늘어선 말라게타 해변Malagueta Beach이 시에라데 아라세나 국립공원의 숲 풍경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레스토랑 치링기토 트로피카나Chiringuito Tropicana에서 맛본 하몽 이베리코 역시 인상적이다. 짭조름한 바닷바람과 어우러져 더욱 특별한 풍미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해변가에 자리한 레스토랑에서 바삭한 새우 프리터, 주문하면 해변에서 바로 구워 주는 정어리, 겉이 바삭한 오징어 먹물 라이스에 마늘과 레몬 향이 나는 아이올리를 한 숟갈 얹은 요리 등을 함께 곁들여 먹었다. 여행을 시작했던 세비야로 돌아온 뒤 나는 또 다른 유서 깊은 타파스 바인 라스 테레사스Las Teresas를 찾았다. 이곳에서도 하몽 이베리코는 빠질 수 없는 대표 메뉴다. 천장에는 거대한 하몽이 마치 축제 장식의 깃발처럼 줄지어 매달려 있다. 가톨릭 성물과 빛바랜 사진으로 가득한 카운터 뒤에서 바텐더 아이토르 히메네스Aitor Jiménez는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하몽을 썰어 낸다. “하루에 하몽 세 다리를 소진해요. 주말에는 네 개 정도, 성주간(부활절을 앞둔 가톨릭 최대의 종교 행사 기간)에는 일곱 개나 나가죠.” 그는 하몽 이베리코가 일상적인 모임부터 성대한 축제까지 스페인 사람들의 삶 곳곳에 얼마나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지 이야기해준다. 이에 마리아가 미소를 지으며 덧붙인다. “스페인의 채식주의자 중에서도 하몽 이베리코만큼은 예외로 두는 사람이 많답니다.”
*** 더 많은 기사는 <내셔널지오그래픽 트래블러> 4월호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