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EYS
FIT FOR A KING
왕의 식탁을 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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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호

오늘날 마드리드의 거리 곳곳에서는
스페인 전역의 식재료와 유서 깊은 레시피가
어우러진 미식의 향연이 펼쳐진다.

디에사 레스토랑에서 말린 문어를 넣고 지은 아로스 데 풀포 세코 밥.
(오른쪽 페이지) 마요르 광장에 있는 라 캄파나 레스토랑.

마드리드 만다린 오리엔탈 리츠 호텔에는 미쉐린 별 2개를 받은 디에사Deessa 레스토랑이 있다. 식당의 성스러운 정적을 깨는 것은 접시 가장자리에 정교하게 얹힌 초록색 거품이 부드럽게 바스러지는 소리뿐이다. 식탁 위로 이어지는 요리의 행렬을 모두가 숨죽인 채 지켜본다. 초록 커리 거품을 곁들인 비나로스산 새우, 갈리시아식 단단한 치즈를 얹은 갈리시아산 숭어, 알리칸테 지역의 방식으로 쌀과 피망을 향긋하게 익힌 요리까지, 모든 풍미는 강렬하면서도 우아하게 균형을 이룬다. 음식을 맛보면 스페인의 땅과 바다를 기반으로 한 섬세함이 느껴진다. 눈앞의 식탁은 마드리드가 스페인 전역에서 선별한 식재료와 요리 기술을 세심하게 모아 완성한 하나의 모자이크 작품 같다.
식사가 끝나갈 즈음, 젊은 헤드 셰프 도메니코 빌다치Domenico Vildacci가 인사를 건네러 온다. 그는 지리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마드리드가 지닌 역동성이 이 도시 요리의 정체성이라고 설명한다. “신기하죠. 마드리드는 바다에서 약 300km나 떨어져 있는데 스페인 최고의 수산시장이 있어요. 해산물은 매일 아침 마드리드에 먼저 들어온 뒤 다시 해안가로 팔려갑니다. 고기와 채소도 마찬가지예요. 최고의 식재료는 이곳에 먼저 모이죠. 마드리드는 스페인의 ‘장터’인 셈이에요.”
이 공은 16세기에 스페인을 지배했던 필리페 2세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그는 권력의 중심을 스페인 한가운데 두기 위해 1561년에 궁정을 마드리드로 옮겼고, 평범한 도시였던 이곳은 단숨에 제국의 수도로 탈바꿈했다. 왕을 비롯한 궁정 사람들은 최고의 음식만을 원했고, 그 결과 신선한 식재료를 수도로 실어 나르기 위한 거대한 도로망이 구축되었다.
오늘날에도 시장은 여전히 마드리드의 미식적 면모를 발견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디에사에서 서쪽으로 20분 남짓 걸어 레티로 지구Retiro district의 웅장한 대로와 미술관들을 지나면 마드리드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인 라 라티나La Latina가 모습을 드러낸다. 마을은 중세 무어인의 요새 위로 골목들이 미로처럼 얽힌 모습이다.
교회 광장에서는 아이들이 모여 뛰노느라 이따금 돌벽 너머로 축구공이 튀어 오르곤 한다. 동네 곳곳의 이름은 이 지구의 거칠고 투박한 느낌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과거 건초 시장이었던 플라사 데 라 파하Plaza de la Paja(‘지푸라기 광장’이라는 뜻), 도축장이 있던 탓에 ‘핏자국’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일요 벼룩시장 엘 라스트로El Rastro 등이 그렇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 메르카도 데 라 세바다Mercado de la cebada, 일명 ‘보리 시장’이 있다. 1500년대에 야외 시장으로 시작해 지금은 19세기에 지어진 파스텔 톤의 돔 지붕을 얹은 2층 건물에 들어섰다. 시장을 방문한 현지인들은 주정강화 와인인 피노 셰리를 한 잔 들이켜는 동안 길다gilda(이곳에선 칸타브리아산 안초비, 작고 매운 귄디야 고추, 만사니야 품종 올리브 등을 꼬치에 끼워 만든다)를 맛보고 신선한 농산물을 구매한다.
필리페 2세가 마드리드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만 해도 토마토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건너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낯설고 귀한 식재료였다. 그러나 수 세기를 거치며 토마토는 스페인 식탁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빵 위에 갈아 올려지거나, 진한 소스로 졸여지거나, 각종 샐러드에 들어가는 등 스페인 요리의 핵심 재료가 되었다. 메르카도 데 라 세바다 시장 1층에서 ‘토마토 왕’이라고 불리는 페드로 디아스의 가판대에 들러본다. 이 시장에서 장사하던 아버지를 보고 자란 그는 분주히 움직이며 다양한 품종의 토마토를 보여준다. 생선알처럼 선명하게 반짝이는 방울토마토부터 가스파초를 만들 때 쓰이는 길쭉한 페리타perita, 뒤틀린 거대한 호박 같은 우에 보데토로huevo de toro 등이 있다. 페드로가 비현실적으로 매끈하고 동그란 붉은색 품종 하나를 가리키더니 웃으며 설명한다. “이건 유통기한이 길어요. 이런 건 프랑스로 보내버리죠.” 손사래 치는 모습을 보니 겉만 번지르르하고 맛은 떨어지는 모양이다. 대신 호랑이 줄무늬가 있는 암브로시아ambrosia 토마토를 집어 썰더니 올리브오일과 소금을 뿌려 내게 건넨다. ‘신들의 음식’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믿을 수 없을 만큼 달콤하면서도 볼 안쪽을 짜릿하게 자극하는 산미가 일품이다. “오랫동안 스페인 사람들은 토마토를 당연하게 여겨왔어요. 흔한 식재료였으니까요. 그런데 최근 마드리드의 레스토랑들은 토마토를 썰어 스테이크처럼 굽고 올리브오일과 소금만 더해요. 좋은 토마토라면 그걸로 충분해요.”

(왼쪽부터) 그란비아 거리에 있는 에디피시오 카리온 빌딩은 외벽에 슈웹스 탄산음료 간판이 있어 ‘슈웹스 건물’로도 불린다. 마드리드 앤 다라코트에서 베르무트를 시음할 수 있다.
(왼쪽부터) 페드로 디아스가 파는 달콤한 맛의 스페인산 로사 토마토. 메르카도 데 라 세바다에서 토마토를 판매하는 페드로 디아스.

베르무트의 시간
소박한 토마토처럼 마드리드에서 르네상스를 맞이한 클래식한 음식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주정 강화 와인인 베르무트vermouth다. 본래 이탈리아에서 즐겨 마시던 술이지만 지금은 이 도시에서 일요일 예배 후나 식전주로 자연스럽게 곁들이고 있다. 한때는 다소 고리타분하고 구식으로 여겨졌으나 최근 화려하게 부활하며 마드리드 곳곳의 와이너리에서 장인정신을 더한 수제 베르무트가 생산되고 있다. 그 세계를 들여다보기 위해 메르카도 데 라 세바다에서 조금 떨어진 와인 저장고 마드리드 앤 다라코트Madrid &Darracott에 시음을 예약했다. 2018년 로케 마드리드와 루크 다라코트가 현지인과 여행자에게 스페인 와인을 알리겠다는 사명으로 문을 연 와인 바다.
“베르무트는 스페인 문화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요.” 루크가 테이블에 병을 늘어놓으며 말한다. “오래된 작은 바에는 생맥주처럼 탭에서 나오는 베르무트 데 그리포vermut de grifo가 있죠. 1975년에 프랑코 정권이 종식된 후에는 젊은 사람들이 맥주와 와인으로 눈을 돌렸어요. 더 현대적이고 세계적인 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죠.”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상황은 변했다. 수제 베르무트 시장이 급성장한 것이다. 주정 강화 와인에 쑥이나 다양한 식물로 단맛과 향을 입히는 베르무트는 정의가 비교적 느슨해 다소 품질이 낮은 와인으로도 저렴하게 만들 수 있다. 루크가 시음용 잔 몇 개를 내어놓는다. 화이트와인으로 만든 전통적인 베르무트 외에도 레드와인으로 만든 것, 홉과 보리로 향을 낸 것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각각 미묘하게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걸쭉하고 달콤하며 약초 같은 풍미를 지녔다. “새로운 베르무트가 쏟아져 나와 이제는 다 맛보는 게 불가능할 정도예요.” (루크)
일부 전통이 부활하고 재해석되는 동안 마드리드 요리의 근간은 지금껏 그래왔듯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드리드 앤 다라코트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유서 깊은 음식점 보틴Botin이 바로 그렇다. 1725년 문을 연 이 레스토랑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운영 중인 레스토랑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건물 오른쪽 위 발코니의 휘어진 기둥에는 스페인 내전 당시 날아든 파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체커보드타일 바닥과 천장의 나무 들보 역시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주방을 엿보니 선반 위에 새끼 돼지 구이가 가지런히 쌓여 있다. 이곳의 시그너처 메뉴로 매일 100마리의 돼지가 서빙된다. “레시피는 지난 300년 동안 단 한 번도 바뀌지않았습니다.” 트위드 재킷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회색 수염을 기른 식당 오너 호세 곤살레스가 말한다. 그는 레스토랑의 두 번째 운영을 맡은 가문의 3대손이다. 실내엔 달콤한 타라곤 허브, 화이트와인, 양파, 월계수, 타임 향기가 은은하게 감돈다. 이 재료들을 새끼 돼지고기에 바른 뒤 주방 한쪽 화덕에서 가시나무 장작으로 2시간 이상 구워내면 코치니요cochinillo가 완성된다. “매일 아침마다 셰프는 열기가 남아 있는 숯을 긁어내고 다시 불을 지핍니다. 300년 동안 한 번도 식은 적이 없어요.” (호세)

(왼쪽부터) 마드리드에서 전통적인 노동자 계층의 동네로 알려진 라바피에스의 칼레 데 부에나비스타 거리. 보틴에서 코치니요를 굽고 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식당인 만큼 수백 년간 쌓인 유명인들의 에피소드도 무궁무진하다. 18세기에 프란시스코 고야가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가 되기 전 이곳에서 설거지를 했다는 소문도 전해진다. 호세는 구석의 작은 테이블을 가리키며 또 다른 일화를 들려준다. 세금 문제로 도망쳐온 헤밍웨이가 저 자리에 앉아 국세청 직원이 들어오지는 않는지 노심초사하며 코치니요를 먹었다는 것이다. 마드리드와 얽혀 있는 작가는 헤밍웨이뿐만이 아니다. 호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나와서 바리오 데 라스 레트라스Barrio de las Letras 문학 지구로 향한다. 우에르타스 거리Calle Huertas의 보도블록에는 문학작품들의 구절이 새겨져 있다. 황금빛 글자들은 저녁 햇살 아래 은은하게 빛난다. 그중에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쓴 <돈 키호테>의 첫 구절도 있는데, 그가 글을 썼던 장소는 오늘날 베르무트로 유명한 붉은 외관의 타파스 바 카사 알베르토Casa Alberto가 들어서 있다.
한 초콜릿 가게 외벽에는 자신들의 추로스가 라몬 델 바예 인클란의 집필 원료였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의 희곡 <보헤미안의 빛>은 눈먼 시인의 목소리를 빌려 1920년대 마드리드를 기괴하고 비극적으로 풍자한 작품이다. 바예 인클란은 자신의 문학 스타일을 ‘에스페르펜토(그로테스크한 왜곡)’라고 불렀는데, 한때 가토 골목Callejón del Gato에 있던 거울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뒤집히고 일그러진 형태로 비추던 거울 중 두 개는 지금도 같은 자리에 남아 있는데, 스페인식 매운 감자튀김인 파타타스 브라바스의 원조를 자처하는 라스 브라바스 입구 옆에서 행인들을 비춘다.

(왼쪽부터) 보틴의 주인 호세 곤살레스. 1725년에 문을 연 보틴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으로 알려져 있다.

최고의 베르무트 바 3

타베르나 라 콘차
타파스로 유명한 카예 데 라 카바 바하Calle de la Cava Baja 거리에 자리한 이 바는 파란색 외벽이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라 콘차에서는 베르무트를 마티니 잔에 담아 주는데, 이는 1780년대에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탄생한 베르무트의 기원을 기리기 위해서다. 주문하면 잔에 진을 가볍게 뿌린 뒤 올리브 한 알과 쌉쌀한 오렌지 향이 감도는 이탈리아 캄파리 몇 방울을 더해 완성한다.
laconchataberna.com

라 길데리아
이 현대적인 베르무트 전문점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술과 곁들여 먹는 길다에 집중한다. 꼬치에 안초비와 올리브, 작은 피클용 코르니숑 오이, 절임 고추를 꼬치에 꿰어 내주는 타파스의 일종으로, 베르무트와 환상적인 궁합을 이룬다. 이곳에서는 직접 제조한 베르무트도 마셔볼 수 있다.

보데가 데 라 아르도사
마드리드에서 가장 유명한 베르무트 바 중 하나다. 1892년에 문을 연 이곳은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짙은 나무 벽과 스페인 전통의 아술레호 타일로 꾸며져 있다. 천장에는 하몽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자리가 없을 때는 오크통에 기대어 술을 마실 수 있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정통 스타일을 고수하는 베르무트. 생맥주처럼 탭으로 따라 마시는 베르무트 데 그리포vermut de grifo는 항아리에 보관해 두었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바로 따라 내어준다.
grupoardosa.es

 

*** 더 많은 기사는 <내셔널지오그래픽 트래블러> 4월호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글. DANIEL STABLES
사진. BEN ROBE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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