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으로 도시를 마주한다. 책 속에서 불멸로 남은 풍경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여행자를 기다린다.
“졸음으로 반쯤 덮인 눈꺼풀을 가볍게 들어 올리는 순간, 녹음이 우거진 초록색 산꼭대기 위로 우뚝 솟은 중세 마을과 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삼은 석조 건축물과 탑은 그 자체로 한 폭의 풍경화였다. 지면의 자욱한 안개는 하얀 띠를 이루며 올리브 나무 숲과 포도밭을 살포시 가로질렀다.” —줄리안 맥클리, <그 여름으로 데려다 줘>, 해피북스투유, 37p
눈부신 낭만적 풍경
어느 여름, 창밖으로 굵은 빗줄기가 내리고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플로리다에 살던 피오나가 존재조차 몰랐던 생부의 부고와 거대한 유산 소식을 듣고 토스카나로 향하면서 소설 〈그 여름으로 데려다줘〉는 시작된다. 유서 깊은 와이너리에서 맞이한 첫 아침, 피오나는 눈부신 햇살 아래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 수백 년을 버텨온 석조 저택, 아침 안개가 감도는 언덕과 올리브나무와 마주한다. 이후 소설은 현재와 1986년 여름을 오가며 피오나와 어머니 릴리언이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모습을 교차해 그려낸다. 뜨거운 태양 아래 생명력이 넘치는 포도밭과 대저택 지하 깊숙이 자리한 비밀이 잠든 와인 저장고가 극적 대비를 이룬다.
소설 속에서처럼 토스카나에는 비밀스러운 와이너리가 여럿 있다. 지역 곳곳의 오래된 와이너리에서는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와인 저장고를 공개하는 투어를 운영한다. 언덕을 품은 나선형 와인 저장고가 돋보이는 안티노리 넬 키안티 클라시코Antinori nel Chianti Classico와 언덕 위 중세 성에 자리 잡은 카스텔로 반피Castello Banfi에서는 포도밭과 숙성고를 둘러보며 토스카나 와인의 역사와 시간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여행 방법 여름이 깊어질수록 포도가 익어가고 중세 도시는 활기를 띠며 지역 곳곳에서 오랜 전통을 간직한 축제가 이어진다. 매년 8월 16일 시에나에서는 ‘팔리오 델란순타Palio dell’Assunta’가 열린다. 시에나의 캄포 광장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전통 경마 축제에서는 중세 복장을 한 시민들의 화려한 행렬과 안장 없이 말을 모는 기수들의 박진감 넘치는 경주를 만날 수 있다.
“그 당시 옥스퍼드 로드 북쪽에는 건물이 거의 없고 나무숲이 우거져 있었으며, 아직 사라지지 않은 들판에 야생화가 자라고 산사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결과 소호에는 시골의 공기가 거주지 없는 떠돌이 빈민들처럼 맥없이 축 늘어지지 않고 교구 구석구석을 활기차고 자유롭게 누비고 다녔다.” —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문학동네, 163p
삶이 깃든 골목에서
작품 속 문장을 하나 더 인용하자면, ‘최고의 시대이자 최악의 시대였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대혁명의 피바람이 유럽을 휩쓸던 시기. 한쪽에서는 단두대 칼날이 쉬지 않고 떨어지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을 이어간다. 찰스 디킨스의 1859년 작 〈두 도시 이야기〉는 파리와 런던, 두 도시의 풍경을 교차하며 인간성과 혁명의 의미를 묻는다.
소설에서 런던은 화려한 도시가 아니다. 안개가 자욱한 거리와 낡은 건물, 계급 갈등이 남아 있는 답답한 도시지만, 적어도 일상이 유지되고 인간다움을 회복할 수 있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프랑스 혁명의 광기와 폭력이 도시를 집어삼킨 순간, 런던은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피난처가 된다.
실제로 당시 런던의 소호는 프랑스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의 보금자리였다. 종교 박해를 피해 망명한 위그노Huguenot와 프랑스 대혁명을 피해 온 시민들이 좁은 골목에 터를 잡으며 새로운 삶을 꾸렸다. 〈두 도시 이야기〉에서도 18년간 바스티유 감옥에 갇혀 있던 마네트 박사는 런던 소호에서 딸 루시와 함께 지내며 조금씩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인간성을 되찾아간다.
여행 방법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는 소호를 천천히 거닐다 보면 1700년대의 흔적이 엿보인다. 개성 넘치는 카페와 서점이 들어선 골목은 주인공이 구두를 닦던 빅토리아 시대의 붉은 벽돌 건물이 남아 있다. 주인공 일가가 머물던 소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런던에서 가장 포용적인 공간 중 하나다. 오래된 레코드 숍과 독립 서점, 세계 각국의 식당, 다양한 인종과 퀴어 문화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풍경은 이곳이 18세기 후반에나 지금에나 오랫동안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존해 온 거리임을 보여준다.
“공원 위쪽 보도에서 시작되어 수련 연못 주위를 돌고 이제는 아리아나 호수와 정원 입구 쪽을 향해 나아갔다. 머지않아 독수리다리까지 이르렀다. (중략) 5월의 해질녘은 저항의 오후에서 남은 흔적을 가리기 위해 미묘하게 애쓰고 있었다.” —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타임 셸터>, 문학동네, 276p
소용돌이치는 역사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가시겠습니까?” 2023년 불가리아 문학 최초로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한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타임 셸터〉는 독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소설은 과거의 시대를 그대로 재현하는 ‘시간 클리닉’이 만들어지면서 시작된다. 유럽 각국은 국민투표를 통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선택하려 하고, 저마다 과거의 황금기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거세진다. 주인공의 조국인 불가리아 역시 예외는 아니다. 급격한 자본주의화 이후의 혼란스러운 현재와 통제 받았지만 안정적이었다고 기억되는 사회주의 시절, 그리고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뤄낸 19세기 말 민족 부흥기 사이에서 사회는 첨예하게 갈라진다. 작품 곳곳에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는 소피아의 면모가 드러난다. 소피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공원인 보리소바 그라디나Borisova Gradina는 평화로운 휴식처처럼 보이지만, 민주화 시위와 정치 집회가 열렸던 장소이기도 하다. 소설의 주요 배경인 도심 중심부의 라르고Largo 광장에 서면 시간의 층위가 한눈에 펼쳐진다. 사회주의 시대에 지어진 거대한 정부 청사들 아래로 약 2000년 전 로마 도시 세르디카Serdica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여행 방법 소설은 낡고 빛바랜 불가리아의 모습을 담아내지만, 오늘날의 소피아는 활기가 가득하다. 오래된 주택가 골목엔 수준 높은 스페셜티 카페와 베이커리가 들어섰고, 역사적인 건축물 주변에는 젊은 크리에이터들의 디자인 숍과 갤러리가 자리한다. 도시를 더욱 생동감 있게 하는 것은 다양한 예술 축제다. 매년 여름 열리는 동유럽 최대 규모의 야외 재즈 축제 ‘에이 투 재즈A to JazZ’에 이어, 9월에는 도시 곳곳을 무대로 그라피티와 벽화 프로젝트를 선보이는 ‘소피아 어반 아트 페스티벌Sofia Urban Art Festival’도 이어져 소피아의 거리를 하나의 거대한 전시장으로 바꿔놓는다.
“서서히 계곡 바닥으로부터 오르는 동안, 동이 틀 것처럼 어둠이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사물의 본래 색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산의 헐벗은 쪽에 자라는 나무들 사이에서 나와 정상에 자리 잡고 있는 이끼가 자라는 편평한 바위를 만나자, 호리칸 계곡의 반대편에 있는 언덕의 푸른 소나무 위로 동이 텄다.” —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 <모히칸족의 최후>, 열린책들, 196p
사라지지 않는 대자연
끝을 알 수 없이 이어지는 원시림과 맑고 깊은 호수, 유럽에서 건너온 식민 개척자와 대대로 이 땅을 지켜온 아메리카 원주민.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의 〈모히칸족의 최후〉는 프랑스-인디언 전쟁의 한복판으로 독자를 이끈다. 소설의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269년 전인 1757년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북미 대륙의 패권을 놓고 맞서던 시절, 소설은 뉴욕주 북부의 숲을 배경으로 외세의 탐욕에 휩쓸려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원주민들의 비극과 그들의 생존 투쟁을 그려낸다.
개척의 시대를 지나던 무렵,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길을 잃기 쉬운 미지의 공간이 되는 거칠고 원초적인 자연을 담는다. 1789년 뉴저지에서 태어난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는 어린 시절부터 경험한 풍경과 개척민의 삶을 작품 속에 녹여냈다. 주요 배경인 호리칸 계곡은 애디론댁 지역의 조지 호수Lake George를 모티브로 했고, 애디론댁산맥과 허드슨강 상류, 글렌스 폴스 일대의 험준한 지형은 추격전과 전투의 무대로 생생하게 그려진다.
여행 방법 뉴욕주 북부는 여전히 장대한 자연을 간직하고 있다. 뉴욕이나 버펄로 같은 인근 대도시를 벗어나 허드슨 밸리와 애디론댁 지역으로 향하면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애디론댁 공원은 뉴욕주 헌법의 ‘영원한 야생’ 조항에 따라 원시림이 지금까지 보전되고 있다. 소설 속에서 원주민들이 몸을 숨기던 조지 호수는 19세기 후반 뉴욕 부호들이 별장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미국 동부를 대표하는 휴양지가 되었다. 특히 역사적인 건축물을 활용한 개성 있는 숙소가 곳곳에 자리한다. 19세기 퀸 앤Queen Anne 양식의 석조 저택을 개조한 디 인 앳 얼로웨스트The Inn at Erlowest와 1917년 개인 보트하우스를 개조해 마치 호수 위에 떠 있는 듯한 더 보트하우스 베드 앤 브렉퍼스트The Boathouse Bed & Breakfast가 대표적이다.
“아테네오는 -지금도 그렇지만- 19세기에 미처 작별을 고하지 못한 바르셀로나의 여러 외진 곳들 중 하나였다. 웅장한 안마당에서부터 시작된 돌계단은 보이지 않는 그물처럼 얽힌 열람실들과 회랑들로 이어졌다. 그곳에서 조급함과 전화나 손목시계 같은 발명품들은 미래파적인 시대착오의 산물이었다.” —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바람의 그림자>, 문학동네, 1편 32p
미로 같은 골목 속으로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는 스페인 내전 직후인 1940년대 바르셀로나를 배경으로 한다. 프랑코 독재 정권 아래 검열이 일상이 된 도시에서 10대 소년이 우연히 발견한 한 권의 책을 계기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작가의 비밀을 추적하는 미스터리 소설이다. 사폰은 바르셀로나를 눈부신 지중해의 도시가 아닌, 좁고 어두운 골목과 희미한 가스등 불빛이 비추는 미로 같은 거리로 표현해 억압되어 있던 당시의 분위기를 그린다.
특히 작품 속 지식인들의 아지트로 등장하는 아테네오 바르셀로네스Ateneu Barcelonès는 문밖으로 비극이 펼쳐지는, 이전 세기의 낭만과 지성이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묘사된다. 오늘날에도 직접 방문할 수 있는 이곳은 30만 권 이상의 장서를 보유한
바르셀로나의 대표적인 문화 기관이다. 소설에서 묘사되듯 1층에는 고즈넉한 정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19세기풍 가죽 소파와 낡은 스탠드 조명이 놓인 고풍스러운 열람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밖에도 주인공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헌책방이 자리한 미로 같은 고딕 지구의 골목, 바르셀로나를 내려다보는 티비다보Tibidabo 언덕 등 실제 도시 곳곳이 작품의 무대가 된다. 광고회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던 사폰의 경력 덕분에 공간을 묘사하는 장면마다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생생함이 느껴진다. 〈바람의 그림자〉의 주요 무대를 따라 걷는 문학 워킹 투어에 참가하면 엘스 콰트레 가츠 카페와 산타 마리아 델 마르 성당 등 소설 속 공간을 직접 걸으며 작품과 현실이 교차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여행 방법 바르셀로나의 세월을 머금은 건축물들은 오늘날 여행자의 발걸음을 이끈다. 특히 올해는 140여 년에 걸친 공사 끝에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상징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 탑이 완공되었다. 동시에 유네스코와 국제건축가연맹이 바르셀로나를 ‘2026 세계 건축의 수도’로 지정하면서 다양한 건축·문화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도시 곳곳에서는 전시와 포럼, 문화 행사가 이어지고, 고딕 지구와 보른 지구의 오래된 골목에서는 새로운 예술 공간과 팝업 전시를 만날 수 있다.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낀 숲을 상상해보자. 기차 한 대가 안개를 헤치며 나오더니 길고 긴 기적 소리를 낸다. 심금을 울리는 듯한 소리다. 기차의 바퀴는 철로를 단단히 물고, 반드시 올라가고 말겠다는 강철 같은 의지로 조금씩 높은 산에 오른다. 사람을 매료시키는 장면이다. 안개가 흩어지는 순간,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늘 끝 구름과 안개 사이로 높고도 곧게 뻗은 신목이 줄지어 철로를 감싸고 있었다.” — 양솽쯔, <1938 타이완 여행기>, 마티스블루, 133p
안개 낀 철로를 따라
작가 양솽쯔는 〈1938 타이완 여행기〉의 서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이 소설은 제가 타이완이라는 섬에 보내는 러브레터입니다.” 소설은 1930년대 일본인 여성 작가 아오야마 치즈코가 타이완을 여행하며 남긴 여행기를 현대의 번역가가 발굴해 옮긴 것처럼 구성된 독특한 형식을 갖췄다. 이야기 속에서 일본인 소설가와 대만인 통역사는 기차를 타고 섬 곳곳을 여행하며 풍경과 음식, 사람들을 기록해나간다. 배경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8년. 철도와 도시가 정비되며 겉으로는 근대적인 풍경이 펼쳐지지만, 그 이면에는 식민지의 긴장감이 짙게 드리운다. 안개가 감도는 산림과 험준한 산맥, 차밭과 해안, 강이 이어지는 대자연, 일본식 관청과 서양식 건물, 중국 전통 사원이 공존하는 도시 풍경은 주인공 치즈코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은 서로 다르다. 일본인 여행자에게 아리산의 편백나무 숲은 감탄을 자아내는 절경이지만, 대만인 통역사에게는 일본제국이 대규모로 벌목해 반출했던 수탈의 현장이다. 아름다운 철도 역시 여행의 낭만인 동시에 식민 통치를 위해 놓인 기반 시설이었다.
소설 속 풍경은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다. 타이완을 남북으로 잇는 철도는 여전히 섬의 핵심 교통망이며, 아리산의 삼림과 차밭, 산악지대의 안개 낀 풍경도 여행자를 맞이한다. 일본 통치 시기에 지어진 건축물 역시 철거 대신 보존과 재생을 거쳐 미술관과 카페, 문화시설로 새롭게 활용되고 있다.
여행 방법 작품 속 여정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관광열차에 올라보자. 2024년 운행을 시작한 아리산 관광열차 허열호栩悅號는 360도 파노라마 창을 통해 울창한 숲과 계곡을 감상할 수 있고, 복삼호福森號는 객차 내부를 타이완산 편백나무로 꾸며 아리산의 숲을 오감으로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