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세기 동안 ‘바다의 여인’이라 불려온 해녀들은 거친 조류에 맞서 성게와 각종 조개류를 채취하며 가족의 식탁을 책임졌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들어서며 노동 강도가 덜한 새로운 직업들이 생겨나자 해녀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이제 남은 이들은 대부분 일흔을 넘긴 고령이 되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 고된 직업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살아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인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세이렌의 노래
제주 북서쪽 해안 바로 앞 작은 섬 비양도에서 자란 고순애 씨는 이곳을 “누구나 고기를 잡거나 물질을 하는 곳”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가 처음부터 해녀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었다. 해녀였던 그녀의 어머니는 딸이 자신의 뒤를 잇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기에, 고 씨는 육지에 정착해 자신의 삶을 꾸려나갔다. 그러다 스무 살에 결혼을 하며 제주 한림에 오게 된다. 비양도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 항구 마을에서 살아가며 자신이 태어난 섬이 늘 시야에 들어왔고, 해녀가 되고 싶다는 마음 또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해녀들은 안전을 위해 팀을 이루어 물질을 하는데 제주 전역에는 수십 개의 팀이 활동 중이다. 그로부터 10년 뒤, 고 씨는 어머니의 동료들을 설득해 마침내 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1998년, 그녀는 그들과 함께 바다로 나섰다. 사진을 촬영할 당시 그녀는 55세로, 비양도에서 젊은 해녀 축에 속했다. “어르신 중에는 아흔을 바라보는 분도 계시죠. 아침에 일을 시작할 때면 다들 허리는 뻣뻣하게 굳어 있고 무릎도 말썽을 부려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들 물속에만 들어가면 다시 젊어지죠.” 고순애 씨는 해녀의 이런 활력이 승부욕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망사리를 가장 묵직하게 채워 돌아오는 날이 최고의 날이에요. 어제 제 망사리는 60kg이나 나갔답니다.”

공동체에 스며드는 법
이유정 씨가 해녀가 되겠다고 했을 때, 농부인 그녀의 어머니는 며칠 밤낮을 울었다. 아버지는 어부였지만, 적어도 그의 배는 거친 비바람을 피할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어머니는 딸에게 말했다. “그건 바다의 처분만 바라는 일이야. 바다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고, 너에겐 몸을 피할 지붕조차 없단다.” 하지만 이유정 씨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바다와 땅의 결실을 모두 아우르는 자신만의 공간을 꾸리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현재 그녀는 물질을 하며 제주시 남서쪽에서 바비큐 식당 해녀고기를 운영하고 있다. 직접 채취한 신선한 해산물과 제주의 토종 흑돼지 요리를 함께 선보이는 방식이다. 서른한 살에 ‘한수풀 해녀학교’를 졸업한 지도 어느덧 5년이 흘렀다. 이곳은 정부가 지원하는 해녀 양성 기관으로, 매년 단 30명만을 선발해 교육한다. 하지만 졸업이 끝이 아니며, 해녀가 되기 위해서는 팀의 기존 구성원 전원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이유정 씨는 이렇게 말한다. “기존 해녀분들은 때로 신참을 경계하기도 해요. 그들에게 제가 믿음직한 동료이고, 공동체의 질서를 흐트러뜨리지 않을 사람이라는 확신을 주는 데 시간이 필요했죠.”

가족의 가치
강단 있고 독립적인 고료진 씨는 독학으로 물질을 배워 해녀가 되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삶을 그대로 빼닮았지만, 올해 서른아홉인 그녀도 이십 대 후반까지는 이 길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10년 전, 고 씨가 지독한 우울증을 앓고 난 뒤 어머니 박숙리 씨가 그녀에게 물질을 권했다.
그 선택은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그녀는 정식 해녀 자격증을 취득하고, 공동 운영 식당인 ‘평대성게국수’를 열었다. 가게 이름처럼 이곳은 성게알을 듬뿍 넣은 국수로 유명하며, 단 6개뿐인 테이블을 하나라도 차지하려는 손님들로 긴 줄이 늘어선다. 고료진 씨의 팀과 제주 동쪽 평대리 마을의 다른 두 해녀 팀은 이 식당의 핵심 식재료를 공급하는데, 채취 시즌 동안 이들은 매일 약 100kg의 성게를 확보해야 한다. 7월부터 9월까지 모녀는 일주일에 엿새를 바다로 향한다. 매번 물질을 나갈 때마다 마을의 바위 해안에서 시작해 한 시간씩 헤엄쳐 나가고 들어와야 한다. “몸은 고되지만 마음은 오히려 편안해져요. 바다는 깨끗하고 물살마저 잔잔한 날이면 저 바다 위에서 세상 모든 시름을 내려놓고 나 자신을 온전히 비워낼 수 있거든요.”

일찍 일어나는 새처럼
임정순 씨는 여러 일을 능숙하게 병행하며 살아간다. 예순여섯인 그녀는 새벽 6시부터 남편과 함께 소규모 밭을 일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후 잠수복을 입고 바다로 뛰어들어 소라, 전복, 성게를 채취한다. 물질 시간만 해도 최대 6시간에 이른다. 늦은 오후가 되면 그녀는 제주 북동부 북촌 마을에 있는 식당 ‘해녀의 부엌’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수석 셰프로 일한다. 그녀는 때때로 전통 방식의 하얀 무명 해녀복(물소중이)을 입고 손님들에게 바다 너머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비교적 늦은 나이인 스무 살에 해녀 일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곧 최고 등급인 상군 해녀 자리에 올랐다. 상군 해녀는 한 번의 호흡으로 최대 5분 동안 숨을 참으며 수심 20m 깊이까지 잠수할 수 있다. 5남매 중 막내인 임 씨는 어머니와 언니들이 모두 해녀였다. 가족들은 그녀가 어릴 때부터 다른 길을 가기를 권유했지만, 젊은 나이에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던 그녀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이제 장성한 두 아들은 더 이상 그녀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덕분에 물질로 번 돈은 예전보다 훨씬 여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시작
“처음에는 제가 해녀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기가 꺼려졌어요.” 서른여섯 살의 신혜림 씨가 털어놓는다. “혹시라도 제가 바이오테크 벤처 사업이 실패해서 내려온 거라고 생각할까 봐서요.” 그녀는 몇 년 전, 보다 의식적이고 탈소비적인 삶에 열망하며 제주로 내려왔다. “부모님은 제 안전을 걱정하셨지만, 무엇보다 제가 행복하기를 바라셨죠.”
그녀는 법환 해녀학교 교육 과정을 통해 제주 남쪽 해안 서귀포에서 동쪽으로 약 14km 떨어진 남원읍의 작은 해녀 팀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했다. 동료 인턴들과 함께 쑥잎 한 움큼으로 수경 안쪽을 닦는 법을 배웠다. 김 서림을 방지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은은한 풀 내음이 주는 안정감도 이유였다. 3개월의 인턴 기간은 어느덧 1년이 되었고, 그녀는 여전히 이곳에 머물며 장기적인 정착을 준비하고 있다. “이곳이 제 집이에요. 이제 저도 영락없는 섬사람이 다 되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