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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플레이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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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호

2019년 늦여름, 사진작가 안웅철이 서울을 떠나 제주에서 한 달여의 시간을 보냈다. 매해 제주를 수차례 오가며 여행하고 사진을 찍어온 그가 이번엔 조금 오래 머물러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길게 머물면 또 다른 게 보이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숲의 소리: 낯선 것들에 대한 탐닉

오전 10시, 곶자왈을 찾는다. 제주에 내려와 머물다 보니 곶자왈에 자주 들를 수 있어 좋다. 이곳을 걷다 보면 뜻밖에 자연이 선사하는 음악을 듣게 된다. 숲을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소리는 나지막한 첼로 소리가 되고, 이파리와 바람이 부딪치는 소리와 마른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피아노 소리와 닮았다. 그렇게 곶자왈은 오케스트라 연주가 한창인 공연장처럼 느껴진다. 화산이 분출하면서 용암이 땅을 뒤덮고, 돌이 크고 작게 쪼개지며 만들어진 독특한 지형의 제주도. 그 땅을 돌과 이끼 그리고 덩굴로 덮고 있는 독특한 지형이 바로 곶자왈이다. 숲은 남방한계 식물과 북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며 넘치는 생명력을 느끼게끔 한다. 지구상에 이렇듯 기묘한 지형이 또 있을까 싶다. 전체 곶자왈 중 이미 60% 이상은 개발로 사라지고 나머지도 언젠가는 사라질지모른다고 들었다. 이 같은 현실이 나에게 카메라를 들고, 이곳으로 오게 만드는 이유가 됐다. 결국 나는 해마다 그리고 몇 번씩 곶자왈을 찾고, 기록하고 있다.

 

카메라 뷰파인더와 라디오의 공통점

사진 찍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의 피사체는 제법 변화무쌍하다. 자연을 기록하기도 하고(곶자왈과 같은), 집을 찾아다니며 시리즈로 엮는 작품 활동을 벌이기도 한다. 여행의 순간을 담는가 하면 포트레이트(초상 인물 사진)를 찍기도 한다. 이번 제주에서 한 달 살기를 감행한 가장 큰 목적 중 하나는 제주에 사는 사람의 사진을 찍는 프로젝트를 위해서였다. 정해진 기간 내에 신청을 받고, 장소와 콘셉트를 정해 포트레이트를 찍었다.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사람을 마주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친밀하고 진실한 작업이다. 오로지 일대일의 소통이 되는 것이므로. 이번 제주에서 내 카메라 앞에 선 사람들 중에는 가족도 있고, 부부도 있고, 항암치료를 무사히 마치고 회복 중에 영정사진을 찍은 이도 있다. 저마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동안 한 달이 훌쩍 지났다.

나는 4일 이상 여행할 경우 반드시 ‘나의 라디오’를 가지고 떠난다. 물론 내가 원하는 음악을 자동차 안에서라면 충분히 들을 수 있지만, 내 의지와 별개로 음악이 나오는 라디오는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나는 듣고, DJ는 들려준다. 온종일 비가 내리는 날엔, 제주도의 숙소 안에서 그저 커피 한잔에 누군가가 틀어주는 음악에 마음을 맡기면 그만이었다. 내겐 여행에 동행하는 앤티크한 라디오가 하나 있다. 낮게 깔리는 소리가 좋아 머무는 방 하나를 채우기에 충분하다. 따뜻한 소리가 방 안을 채우면 서울 내 집에서 듣지 못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여행지에서 자꾸 주파수를 맞추게 되는 이유가 된다.

그러고 보니 뷰파인더와 라디오는 그런 점에서 닮았다. 일대일 소통이라는 점, 주파수를 맞추고 DJ의 목소리를 들으면 왠지 대중을 향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를 향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파도를 듣고, 바람을 보다

나는 뭐든 보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그만큼 듣는 것도 좋아한다. 나의 사진은 음악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시작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래서 항상 듣는 사진, 보이는 음악을 추구한다. 자연은 나의 사진과 음악의 취향을 완벽하게 투영한다. 나는 어정쩡한 풍경보다는 극도로 빡빡한 도시나 세상없이 황량한 자연 풍경을 좋아한다.

유독 제주라는 섬은 소리와 관계 깊은 곳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바다에서 듣는 파도소리 물소리는 기본이고 곶자왈 숲속에서 듣는 바람소리 역시 그러하다. 오래전 제주 토속 굿인 ‘칠머리당 영등 굿’ 소리를 들어본 일이 있다. 그 어느 음악보다도 몽환적이면서 엠비언트Ambient(일렉트로닉 음악 중에서도 가장 긴 역사를 가진 장르) 음악에 가깝다. 범섬 안에서 조용히 파도소리를 채집하며 소리를 듣는다.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바다의 구멍 사이로 물이 들어오면 흡사 그리스 신화의 ‘사이렌Siren’ 소리처럼 들린다.

 

비로소 알게 된, 인생에 필요한 만큼의 짐

송당나무의 주인장은 서울을 떠나 제주땅에 정착했다. 널따란 땅에 씨를 뿌리고, 계절마다 새로운 꽃을 피워냈다. 그녀를 보며, 인생에 필요한 만큼의 짐에 대해 생각해본다. 사실 매번 먼 길 혹은 긴 여정에 오를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여행은 무언가를 채워오는 행위이자 반대로 많은 것을 비우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매번 제자리로 돌아오면 비움과 채움의 양이 정확히 비례한다. 그렇다면 결국 여행은 가도 안 가도 그만인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떠나려면 차라리 되도록 멀리 그리고 되도록 길게 떠나라는 일종의 계시이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많은 걸 비우려면 여행을 떠나는 게 좋고, 역시 새로운 것으로 채우려 해도 여행만큼 좋은 게 없다. 삶이란 게 그렇다. 결코 모자람도 남음도 없는 딱 거기라고.

가끔 집 정리를 하면서 필요 없는 것들을 부지런히 비워낸다. 결국 새로운 것으로 채우려는 방법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워야 한다. 그 종착 지점에 이르러서 하나도 남김없이 비워내야 남은 자의 수고로움이 줄어든다.

 


PLAYLIST AT 10:00 AM

이루마 <Dance>

곶자왈 사진에 영감을 받은 이루마가 2015년에 발표한 앨범이다. 2017년에는 이곳을 모티프로 한 향수가 발매되기도 했다. AN[ahn]이라는 이름으로. 포토그래퍼 안웅철은 곶자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곶자왈이 가치 있는 자연일 뿐만 아니라 예술가에게는 영감을, 사람들에게는 위안과 휴식을 주는 장소라고 말하고 싶어요.”

 

PLAYLIST AT 01:00 PM

Pat Metheny Group <San Lorenzo>

정규 앨범에도 있지만 팻 매스니 그룹이 1983년에 발매한 라이브 앨범 <Travels> 안에 수록된 연주곡을 꼭 들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분명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할 것이다.

 

PLAYLIST AT 03:00 PM

브로콜리 너마저 <유자차>

그들의 첫 번째 앨범의 수록곡인데, 내가 제일 아끼는 가요다. 오래전 옛사랑이 떠오를 만큼 소중한 기분이 들게 한다.

 

PLAYLIST AT 06:00 PM

Sigur Ros <Festival>

아이슬랜드 출신 뮤지션의 이 음악은 사실 드라이브 뮤직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감상용으로는 이만한 것도 없다. 음악에서 아이슬랜드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글. 안웅철AN WOONG CHUL
사진. 안웅철AN WOONG CH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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