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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호

“도시와 시골이 공존하는 청주에서

자신만의 러스틱 라이프를 그려나가는 여정.”

 

향기와 향수 

연제리 모과나무 

시골 하면 오랜 세월을 간직한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마을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청주에서 그런 풍경을 보고 싶어 연제리 모과나무를 찾았다5. 00여 년의 시간을 품은 나무의 가지마다 노란 모과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나무를 그저 바라보다가 빙 둘러 걸어봤다. 내심 ‘모과 하나 떨어졌으면 좋겠네’라고 생각했다. 마침 뚝 하고 떨어진 모과하나. 순간 그윽한 향이 퍼지며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어릴 적 충북의 할머니 댁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이맘때쯤, 차 안에는 늘 모과가 놓여 있었다. 은은하게 밀려오는 모과 향을 맡으면, 방금 떠나온 시골집에 대한 그리움이 일었다. 몇 년 전 여행 중에 어느 마을에서 모과나무 사진을 찍은 적이 있는데, 그 모습을 본 주인 할아버지가 모과를 한아름 챙겨 주셨다. 처음에는 사양했고 그다음에는 한 알이면 충분하다고 했는데 결국엔 모과를 두 팔로 겨우 안아 들어 차에 싣고 있었다. 그때도 드라이브 내내 향수에 젖었다. 이 나무를 둘러싼 과거의 풍경은 모과울이라는 유서 깊은 시골 마을이었다. 현재는 오송생명과학단지가 대신 자리한다. 첨단기술을 육성하는 도시이자 오래된 시골 마을의 모습이 공존하는 청주에서 어떤 여행이 펼쳐질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첫 모과나무를 뒤로한 채 ‘러스틱 라이프’를 찾아 헤맨다. 

 

 

미감과 진심 

미호천과 비담집 

연제리 모과나무에서 멀지 않은 곳에 미호천이 흐른다. 지구상 오직 한반도에서만 서식하는 민물고기 미호종개가 처음 발견된 곳이다. 1980년대만 해도 미호천 팔결다리 밑에서는 족대질 한 번에 미호종개가 스무 마리씩 잡혔다고 한다. 이후 서식지가 오염되면서 미호천에서 자취를 감추고 멸종 위기에 처한 미호종개. 다행히 지난 6월에 미호천 하류에서 한 마리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편 물 밖 세상은 여전히 날것의 풍경이 야생처럼 펼쳐져 있다. 그 풍광과 마주한 비담집에 도착했다. 내부는 비우고 바깥의 풍경을 담은 집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1층 거실의 폴딩도어를 활짝 열면 미호천의 풍광이 액자 속 사진처럼 담긴다. 차경(借景)이다.

“도심에서 멀지 않고 생활하기 편한 곳에 집을 짓고 싶어 터를 둘러보던 차에 이곳을 발견했어요. 호박 농사를 짓고 있는데 여기서 가깝기도 하고 미호천의 경치가 정말 인상적이었죠. 3년 동안 마음속에 품고만 있다가 연이 닿게 된 거예요. 예전부터 남편이 미호천 얘기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요. 어린 시절 미호천에서 고기를 잡았다고 하더라고요. 밤에는 친구들이랑 강변에서 캠핑도 했는데 그때는 참 무서웠다고 하네요.(웃음) 아, 남편은 미호종개를 직접 본 적 있다고 해요.” 수화기 너머로 호스트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평소 생활하는 공간을 에어비앤비를 통해 가끔 공유하는 호스트는 게스트가 편히 머물 수 있도록 집을 비워주고 다른 곳에서 지낸다. 식탁 위에는 그녀가 남긴 정성스러운 손편지가 놓여 있었다. “에어비앤비를 시작한 후 날씨 예보를 챙겨 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대로 모든 날들이 그로써 완벽하지만, 그래도 저희 집을 찾는 손님께 햇살을 선사하고픈 마음이 앞서더라고요. (중략) 편안히 머물다 가시길 바랍니다.” 이날은 비 예보가 있었고 온종일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했다. 그러나 호스트의 고운 마음 덕분인지 날이 갰고 나는 비담집에서 아주 근사한 풍광을 감상할 수 있었다. 테라스에 러그를 깔고 라탄으로 만든 흔들의자에 앉아 풍경을 가만히 바라만 봤다. 미호천 수풀 사이로는 새들이 유유자적 날아다녔다. 

 

여행자를 위해 실제 거주하는 집을 떠나는 불편함을 감수하는 호스트의 여정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직접 살아보니까 참 좋아요. 그래서 다른 분들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었어요. 행복감이 느껴지는 후기를 읽다 보면 숙박을 허투루 준비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비담집에 머무는 모든 분이 여기서 좋은 추억을 쌓아 가시길 바랄 뿐이에요. 진심은 통한다고 하잖아요.” 호스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긴 풍경에 진심을 버무린 집이다. 그래서 감동은 경치에서 끝나지 않고 호스트의 세심한 정성으로 이어진다. 여행자에 대한 섬세한 배려가 곳곳에 묻어나 있다. 

어스름한 저녁, 2층 욕실 창가 욕조에서 미호천의 야생을 여유로이 바라보면 피로가 절로 씻겨나갈 수밖에! 비움으로 인해 생긴 마당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며 채운 것은 마음의 풍요일 수도 있겠다. 

 

도시향, 시골향 

초정행궁과 청남대, 옥화9경 
그리고 추정리 메밀밭 

세계 3대 광천수 중 하나로 알려진 초정약수는 청주에서 난다. 그곳에 세종대왕이 초정행궁을 짓고 머물며 심신을 치유하고 한글 창제를 마무리하였다고 한다. 또한 청주에는 대통령의 별장이었던 청남대도 자리한다. 나라를 통치하는 이념과 마음가짐은 전혀 달랐지만, 시대를 초월해 쉼을 선택한 곳이 청주라는 공통점이 묘했다. 누군가는 감천천을 따라 옥화9경을 돌아보는 옥화구곡길을 걷다 플라잉 낚시하는 이를 발견하고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이 떠올랐다고 한다. 영화의 배경이 된 미국 몬태나주의 블랙풋강 못지않은 풍경이 청주에 숨어 있었다. 감천천에서 올갱이(다슬기의 충청 방언)를 줍는 한 컷의 사진에도 끌렸다. 동시에 지금 가장 힙한 노래를 들려주는 원슈타인의 고향이 논밭이 펼쳐진 청주의 내수읍이라는 사실도. 그리고 여긴 수도권 외에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한 유일한 곳이다. 이런 상반된 모습에 시골의 향수를 느끼며 도시적 감성 역시 잃고 싶지 않은 러스틱 라이프를 찾아 청주로 떠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된내기골로 향하다 내비가 알려준 길이 못마땅해 마침 지나가던 동네 할머님께 길을 여쭸다. 저쪽 길로 가면 된다고 알려주시면서 나지막이 덧붙이신 말은 “여기 뭐 볼 거 있다고!” 시골에서는 익숙한 풍경이 인스타그램에서는 핫하다. 하얀 눈꽃 같던 메밀꽃은 지고 갈색으로 물든 메밀밭이 펼쳐졌다. 메밀밭 사이의 길을 따라가다 저 멀리 보이는 가장 높은 농막으로 방향을 잡았다. 생각보다 가파른 비탈에 숨을 고르며 농막에서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가을로 물든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갈색 메밀밭도 아름다웠다. 이곳에 메밀을 심게된 이유는 토종벌의 밀원을 제공하기 위해서라고. 꽃이 만발했을 때는 벌들이 윙윙거리는 소리도 함께 들렸을 것이다. 메밀밭에 놓인 쓰레기통도 양봉 농가에서 사용하는 나무 상자다. 양봉인들 사이에서 청주의 밀원지가 좋다고 정평이 나 있다. 벌이 꿀을 빨아오는 원천이 좋다는 말은 청주의 자연이 그만큼 맑고 깨끗하다는 거겠지. 청남대 가는 길에 터를 잡은 한 양봉 농가로 향했다. 

 

 

전원의 달콤함 

꿀벌과 해밀당 

가덕면에 자리한 양봉 농가에 알록달록한 상자가 일렬로 늘어서 있다. “보통 벌통과 다르죠? 귀농하면서 온 가족이 나무판에 못을 박아 만들고 친환경 페인트로 직접 색칠도 했어요. 그래서 다른 양봉 농가에서는 볼 수 없는 하양, 하늘, 분홍 등 색깔이 다양해요. 이렇게 칠하면 나무가 썩는 것을 방지할 수도 있거든요. 처음에는 상자를 300개 제작했는데 점차 늘어나고 있네요.” 

해밀당의 도해밀, 최고야 부부는 분주한 도시에서 시골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벌통을 고정해둔 채 채밀하는 고정식 양봉을 하는데, 이렇게 얻은 꿀에는 청주 지역의 토양과 기후에서 자라는 수백 가지 야생화의 생명성이 담겨 있다.

“기온이 내려가면 벌이 활동하지 않아요. 혹시 추위에 언 벌을 발견하시면 입김을 호 불어주세요. 1분 이내라면 다시 살아날 수도 있어요. 아이에게 알려주니 한여름에도 길가에 죽어 있는 벌만 보면 입김을 불어대서 말리느라 혼났네요.(웃음).” 호기심에 가득 찬 내가 양봉 상자 속을 궁금해하니 뚜껑만 살짝 열어 보여주는데 담요로 덮여 있었다. 좋은 꿀을 생산하기 위해 벌의 건강을 제일 신경 쓴다고. 

700평의 대지 중 약 60평을 실내 공간으로 조성하는 중이다. 문의면 시내에 있던 공방을 이곳으로 이전할 예정이라고. 12월 완공 이후에는 밀랍초 클래스를 재개할 계획이다. 언뜻 거대한 치즈 덩어리 같았는데 만져보니 밀랍은 아주 딱딱했다. “제가 직접 충청북도의 농가에서 모은 벌집만 녹여 밀랍덩어리를 만들어요. 믿을 수 있는 천연 밀랍을 구하기 쉽지 않다 보니 인기가 높은 편이에요.” 주전자에 밀랍을 녹인 후 모양틀에 넣으니 순식간에 굳는다. 그렇게 밀랍초가 완성되었다. 최고야 씨에 따르면 이 밀랍초를 태운 뒤에는 창문을 열어 환기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한다. 

 

키가 큰 나무의 가지에 네모난 무언가 걸려 있다. “꿀벌은 집단생활을 하지만, 야생벌은 벌집에 살지 않아요. 벌이 있어야 꽃도 피고 생태계가 균형을 이룰 수 있잖아요. 우리가 먹는 다수의 과일과 채소도 벌의 수분 활동으로 열매를 맺거든요. 그런데 환경오염 등으로 서식지가 점차 사라지면서 야생벌의 개체수도 급격히 줄어들고 있어요. 그래서 창고에 남아있던 자투리 목재, 떨어진 솔방울, 죽은 대나무, 버려진 방충망 등을 이용해 야생벌이 머물 수 있는 집을 만들었어요. 일명 ‘비 호텔BEE HOTEL’이에요. 나중에 못이 녹슬거나 쓰레기가 될까 싶어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나무 못을 사용했어요. 비호텔 만드는 키트를 펀딩했는데 반응이 좋아서 보람찼죠.” 

다만 아직 벌의 반응은 그저 그렇다고. “벌이 호텔에 들어가면 진흙으로 입구를 막아서 바로 알 수 있어요. 겨우 구멍 하나 막힌 걸 발견하고 얼마나 뿌듯했는지 몰라요. 벌뿐만 아니라 곤충들도 비를 피하거나 잠시 쉬어 갈 수 있어요. 외국에서는 대나무 구역 혹은 솔방울 구역 등 구획을 나누어 만들기도 하는데, 곤충마다 좋아하는 곳에 머무른다고 해요.” (해밀당 최고야 대표) 

비 호텔 목판 한 면에는 ‘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이라고 적혀 있다. 비담집에서도 봤던 글귀다. 

 

 

도시와 시골의 교집합 

지지구구와 정북토성 

현재 충북선 청주역은 흥덕구에 있지만, 1921년 최초로 개통한 청주역은 상당구에 위치했다. 옛 청주역 터에 과거의 역사와 운행하던 열차 등을 고스란히 재현해놓은 옛청주역사 전시관에서 추억 속 기차 여행을 잠시 떠나봤다. 뉴트로풍의 옛청주역사전시관 바로 옆에는 도시재생허브센터가 자리한다. 이 근처에 위치한 카페 지지구구는 고양이가 사는 시골의 작은 농장을 일부 옮겨놓은 것 같았다. 기차를 타고 막 도착한 시골의 정겨운 정서가 느껴진다. 고양이 두 마리가 따스한 햇살을 쬐고 있는 듯 편안하게 늘어져 있다. 붉은 벽돌로 마감한 내부에 놓인 나무 탁자와 의자는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냉장 진열대에는 주말마다 농장을 찾는다는 지지가 가져온 농작물이 가득하다. 지지는 카페를 운영하는 김민재 씨를 친근하게 부르는 별명이다. “처음에는 충북 지역 위주로 다녔는데, 점점 발이 넓어져서 요즘엔 전라북도 진안까지 가고 있어요.” 귤이 세 개 달린 작은 토분 옆으로는 충북 지역의 제철 작물과 제로웨이스트 소품이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단순한 카페와 달리 지지구구에서는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진다. 한 달에 한 번씩 팝업 레스토랑을 열어 제철 작물로 손수 요리한 음식을 내는 것처럼 말이다. 곧 운영할 팝업 레스토랑 메뉴 하나를 요리하며 지지가 이야기했다. “모두 토종 감자인데 모양이 제각각이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잠시 중단한 상태지만 충북 여러 농장에서 채소 도슨트를 진행해 왔어요. 미술관에서 하는 도슨트가 작품의 배경 지식을 설명하며 이해를 돕잖아요. 채소 도슨트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먹는 채소가 어디에서 왔는지 등 잘 몰랐던 그 이면을 살펴보는 거예요. 농부가 되어 농장의 일손을 돕고 채소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요. 채소 도슨트를 하며 수확한 작물이 농사짓는 농부를 닮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저도 언젠가는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고 싶어요.” 버섯, 사과, 연근, 호박 등의 채소를 썰고 구워 올린 밥에 정성스럽게 우린 차를 부어 오차즈케를 완성했다.

“요즘은 ‘테이스티 오브 팔레트’라는 프로그램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어요. 채소를 자세히 관찰하고 연구한 다음 채소 물감을 만들어보는 거예요. 채소마다 고유의 색깔이 있잖아요. 채소로 색을 내고 그림을 그리면서 요리까지 하는 건데 정말 재미있어요. 이외에도 지지구구에서는 다채로운 워크숍을 준비하고 있답니다.” 지지는 매달 동부창고에서 열리는 생태교류시장 달장도 운영하고 있다. 거리가 멀어 참여하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에서도 동시에 진행한다. 

 

“지지구구가 동네기록관으로 선정되었어요. 청주가 문화도시로 지정되었거든요. 더 나아가 기록문화 창의도시를 꿈꾸며, 그 일환으로 저희는 중앙동에서 친환경을 주제로 마을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어요. 기억을 모으는 동시에 여러 활동을 계획하는 중이에요. 버려진 자전거를 수리해 대여하는 것처럼 주민들이 동참할 수 있는 교류의 장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차와 디저트 메뉴를 개발하는 구구(이재경)가 지지구구의 또 다른 면면을 알려주었다. 

제철 재료로 디저트를 만들다 보니 계절별로 메뉴가 달라지는데, 이번 겨울에는 딸기를 주제로 한 메뉴를 선보일 예정이라고. 나는 청주 문의면 마동리에서 생산한 보늬밤으로 만든 몽블랑 크로플과 바스크 치즈케이크를 맛봤다. 그리고 홍차 베이스에 호박과 홍화꽃잎을 블렌딩한 ‘노을 지는 정북토성’ 차를 곁들였다. 카페 중앙에 시골집에나 있을 법한 난로가 눈에 띄었다. ‘곧 있으면 난로를 켜서 더욱 포근해지겠네.’ 

노을 지는 정북토성을 표현한 차를 마시며 향토적 후각과 미각이 발동한 덕분인지 마음이 평온해졌다. 잠시 뒤 이 차에 영감을 준 정북동 토성으로 향했다. 마침 해가 뉘엿뉘엿 지며 미호천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산책하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드랍게 느껴졌다. 그 안에 나도 있었다. 

글. 김민주MIN-JOO KIM
사진. 김현민HYUN-MI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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