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LORE THE WORLD
ARTISTS ON EXPEDITION
노르웨이의 맑고 차가운 여름
FOLLOW US :
2023년 01월호

 

“드로잉 작가를 따라 떠난
북유럽에서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다.

 

스톡홀름을 출발한 기차가 작은 역들을 거쳐 서쪽으로 달려간다. 5시간의 여정 내내 짙푸른 숲과 반짝이는 호수, 때때로 앙증맞은 마을들이 창가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기차가 조금씩 속력을 늦추더니 곧 목적지인 오슬로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들려온다. 신화와 피오르의 나라 노르웨이에 도착했다는 생각에 심장이 뛰었다.

노르웨이에서 가장 길이가 긴 만인 송네피오르.

 

피오르를 만나다

북유럽에는 다채로운 문화유산이 존재한다. 하지만 여행자들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이곳만의 매력은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북유럽의 독보적인 자연이다. 노르웨이에 온 이상 피오르를 보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열차를 타고 산을 넘고 터널을 지나 송네피오르Sognefjord로 향했다. 피오르Fjord는 ‘내륙 깊이 들어온 만’이란 뜻을 지닌 노르웨이어로, 빙하가 침식시킨 U자형의 깊은 골짜기에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바닷물이 유입되어 형성된 좁고 기다란 만을 뜻한다. 그중에서도 송네피오르는 그 길이가 204km에 달해 노르웨이에서 가장 긴 만으로 알려져 있다.

피오르를 끼고 있는 마을인 플롬Flåm에서 구드방엔Gudvangen까지 운항하는 크루즈에 탑승했다. 병풍처럼 솟은 높은 절벽들이 호수처럼 잔잔한 내륙의 바다를 감싸 안고 있다. 갑판 위에서 내려다본 피오르의 수면은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물빛이 몹시 짙고 푸르러 그 깊이를 쉽게 가늠하기 어려웠다. 끝을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 같아 이내 시선을 거두어야 했다.

크루즈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서서히 움직이는 먼 풍경 때문에 배의 속도를 실감하지 못했는데, 뱃머리가 가르는 물결을 보니 제법 빠른 배의 속도감이 느껴졌다. 전방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예고 없이 콧물이 흐르고 머리카락은 어지럽게 춤을 추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출발 전 반소매 차림에 햇볕을 즐기던 여행자들은 어느새 모두 점퍼를 챙겨 입고 있었다. 피오르의 본류에 들어서자 물길이 넓어졌다. 양옆으로 수백 미터 높이의 화강암 절벽이 호위하듯 둘러싼 모습이 마치 줄지어 서 있는 거인의 어깨처럼 느껴졌다. 감탄을 자아내는 거대한 풍경 덕분에 대형 크루즈들이 마치 작은 장난감처럼 보였다. 피오르의 잔잔한 수면 위로 오후의 햇살이 닿아 보석처럼 반짝였고, 가까이 다가온 절벽 곳곳에서 하얀 실처럼 하늘거리는 폭포는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웠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브릭스달 빙하.

위대한 침식의 시작

스트륀Stryn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투어버스에 탑승했다. 이 버스의 목적지는 브릭스달 빙하Briksdalsbreen다. 피오르를 만들어낸 근원인 노르웨이의 빙하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버스는 브릭스달 빙하의 입구인 브릭스달렌Briksdalen 계곡에 승객들을 내려주었다. 계곡 입구에서부터 빙하가 보이는 지점까지는 계속 오르막길이었다. 탐방로 옆으로 경쾌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계곡물이 보였다. 깨끗하다 못해 투명에 가깝다고 할 만한 계곡물은 해발 1200m 고지대에 있는 빙하가 녹아내린 것이다.

어느새 브릭스달 빙하가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암벽이 한 방향으로 깊은 V자 협곡을 만들고 그 사이로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선명히 보였다. 빙하를 생각하면 막연히 하얀 얼음덩어리가 떠올랐는데, 브릭스달 빙하는 멀리서 보아도 묘한 푸른빛이 감돌아 매우 신비로웠다. 남아 있는 탐방로 끝까지 걸어가자 빙하 바로 아래쪽에 숲으로 감춰져 보이지 않았던 작은 호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빙하의 냉담한 푸른빛과 그것이 녹아 만들어진 처연한 옥빛 호수가 빚어내는 경이로운 풍광 앞에서 언덕길을 올라온 수고로움은 어느새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한자리에 멈춰 있는 듯 보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빙하는 끝없이 움직이고 있다. 다만 이동속도가 무척 느려 그 움직임이 우리 눈에 쉽게 띄지 않을 뿐이다. 빙하는 억겁의 시간 동안 서서히 미끄러지며 커다란 바위를 부수고 깊은 골짜기를 만들어 왔다. 바닷물이 들어와 골짜기를 채우면 그것이 바로 피오르가 되겠지. 위대한 그 힘의 출발점 앞에 와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헬레쉴트에서 보낸 기억에 남을 만한 밤.

헬레쉴트의 밤

노르웨이에서는 오슬로나 베르겐 같은 도시가 아닌 이상 합리적인 가격의 공용 숙소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일박을 할 요량으로 헬레쉴트Hellesylt 마을을 선택하게 된 것은 이곳이 아름다운 게이랑게르피오르Geirangerfjord와 가깝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마을 안에 저렴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는 유스호스텔이 있었기 때문이다.

막상 마을에 도착하고 보니 그곳이 발산하는 분위기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암벽과 피오르가 어우러진 독특한 풍광 아래로 키 작은 건물과 좁은 골목들이 정답게 들어서 있다. 외부인에게도 열려 있는 마을 교회를 둘러보며 주민들의 일상을 엿보거나, 가파른 능선을 따라 쉼 없이 흐르는 헬레쉴트 폭포 근처를 산책하며 느슨한 시간을 보냈다.

숙소는 마을에서 조금 벗어난 비탈길에 자리 잡고 있어 해가 저물기 전에 도착해 체크인을 마쳐야 했다. 쿱Coop에서 미리 장을 봐온 것들로 간단히 저녁 식사를 해결하고, 배정받은 도미토리에 짐을 풀었다. 이 방에 나를 제외한 다른 손님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엔 얼마나 기쁘던지. 저렴한 비용으로 넓은 방을 독차지하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밤이 깊어지자 방 안 공기가 서늘해졌다. 침대 옆 작은 창가에 앉아 따뜻한 꿀차 한 잔을 마셨다. 모아 쥔 두 손으로 찻잔의 온기가 퍼졌고, 피오르와 맞닿은 작은 마을 위에는 여름 저녁의 어스름이 푸른 물감처럼 번져들었다. 모든 것들이 담담하고 차분해지는 시간 속에서 내일의 운항을 준비하는 페리의 불빛과 속삭이듯 들려오는 낮은 폭포 소리만이 휘영한 가슴을 채워주었다.

푸르게 침잠하는 그 풍경에서 쉽게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대단한 이야깃거리가 있는 저녁은 아니었지만, 왠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자꾸만 생각이 날 것 같았다. 경건히 아침을 기다리는 이 푸른 순간이.

 

리모는 삼성전자 소프트웨어 연구원으로 재직하다 티베트 여행을 계기로 여행 드로잉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독일 문구업체인 스테들러의 후원 작가이며 저서로 <시간을 멈추는 드로잉>, <네가 다시 제주였으면 좋겠어> 등이 있다.

 

글. 리모RIMO
사진.
RELATED
TRAVEL WITH PASSION AND PURP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