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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PIRATION: TAIWAN
먹으려고 달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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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1월호

대만의 한 시골 마을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진수성찬이 차려진다.
먹으면서 달렸고, 전혀 알지 못했던 낯선 곳이 어느새 정겨운 여행지가 되었다.

 

 

먹으려고 달렸어요


 
“왜 달려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그때그때 다른 대답을 한다. 가끔 수줍게 “먹으려고 달려요!”라고 말한다. 뛰고 나면 맘껏 먹어도 살이 안 찔 것 같아서. 그런데 뛰는 도중에 먹는, 그러니까 진짜 먹으려고 달리는 게 아닐까 싶은 마라톤 대회를 경험했다. 바로 올해 8회째인 타이완 라이스 헤븐 티엔종 마라톤Taiwan Rice Heaven Tianzhong Marathon이다. 이름 그대로 대만에서 쌀 천국이라 불리는 티엔종(田中)에서 열린다. ‘왜 쌀 천국이라고 하지?’ 이전에는 티엔종을 잘 몰랐다. 그저 지도를 보고 ‘대만 중서부에 있구나’ 정도 알았다. 대회를 완주하고 나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다. 티엔종을 제대로 여행했다고! 단지 달리면서 먹었을 뿐인데!


Start Line


티엔종 마라톤 스타트 라인에 도착했다. 첫인상은 그냥 동네에서 열리는 작은 대회 같았다. 오전 6시 20분에 풀 코스(42km), 6시 40분에 하프 코스(22.6km)가 출발하는 것을 지켜봤다. “싼(三, 3) 얼(二, 2), 이(一, 1)”를 외치면 뱃고동과 비슷한 소리가 울리면서 밴드가 음악을 연주한다. 러너들이 뛰기 시작한다. 출발 물결이 생각보다 꽤 길다. ‘동네 대회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알고 보니 약 5만 명이 신청했고 그중 1만 6천 명 정도만 추첨으로 뽑혔다고 한다. 대만 10대 마라톤 중 하나로 굉장히 인기가 많은 대회였다. 설레기 시작했다. 이제 7시에 10K 코스가 출발한다. 드디어 내 차례다.

출발하고 1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짜요(加油, 힘내)!’를 외치는 응원 인파가 길 양쪽에 가득하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보라 등등 알록달록 곱슬 가발을 쓴 어르신들이 일렬로 서서 손을 내밀고 있다.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재빠르게 지나갔다. 어디선가 익숙한 음악이 들렸고 나도 모르게 리듬을 타며 달렸다. 유튜브에서 뮤직비디오가 37억 회나 조회되며 전 세계를 펑크에 빠뜨린 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음악이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니 학생들이 춤을 추며 흥겹게 응원하고 있다. 가사대로 ‘So Hot!’
 


1K


1km 지났을 땐 전혀 다른 풍경을 마주했다.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평야가 드넓게 펼쳐졌다. 군데군데 황금빛으로 물들긴 했지만, 대부분 푸른 논과 작은 집들만 보이는 한적한 길이다. ‘이래서 쌀 천국이라고 했구나!’ 일본이 대만을 점령하던 시절, 티엔종에 대만에서 가장 큰 쌀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대만 북부 지역에서 수확한 쌀을 모두 보관했다니 쌀 천국이라 불릴 만하다. 1980년대 티엔종은 쌀 무역의 중심지로 거듭나며, 쌀 거래가가 결정되는 곳이 되었다.

논 위에는 해가 동그랗게 빛나고 있었다. 농부들이 경운기에서 내려 부지런히 농사지을 채비를 한다. 농부셨던 외할아버지가 문득 떠올랐다. 논을 보며 달리니 어릴 적으로 돌아간 듯했다. 충청북도 진천에 있는 외가댁에 갈 때마다 논두렁에서 해맑게 뛰어놀곤 했다. 진천군 인구가 약 8만 명인데, 티엔종은 그 절반인 4만 명 정도가 사니 더 시골인 셈이다. 어린 시절과 비슷한 시골 풍경에 향수에 젖어 들었다. 온종일 뛰어다녀도 지치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빠르게 달렸다. 스마트워치를 보니 4분 50초 페이스다. 이 기세면 10K 코스를 50분 안에 완주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린 시절과 다르다고 느낀 하나는 야자수였다. 대만의 시골 풍경은 논과 야자수가 조화를 이룬다. 우리나라 논농사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논이 있는 구간이라서 그런가? 응원 소품에 나무 소쿠리가 등장했다. 나무 소쿠리에 영어, 스페인어 등이 적혀 있다. ‘안녕하세요’, ‘파이팅!’ 한국어도 보였다. 노르웨이, 필리핀, 케냐 등등 26개국에서 500여 명이 이 대회에 참가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3K


3K 지점을 지났을 때부터 배수로를 따라 달렸다. 마라톤 대회에서 코스를 짤 때 아무렇게나 그리진 않는다. 그래서 이 배수로도 뭔가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름은 에이트 포트 디치Eight Fort Ditch. 1709년 청나라 때 만들어졌고,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배수로 중 하나라고 한다. 배수로가 만들어진 후, 대만에서 가장 긴 쭈오슈이(Zhuoshui) 강의 물을 풍부하게 공급받을 수 있어서 논농사를 안정적으로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기존에 물이 고여 있던 땅도 점차 논으로 바꾸면서 벼농사를 확대할 수 있었다. 배수로를 바라보며 달렸을 뿐인데, 티엔종이 쌀 천국이 된 또 하나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날 평균 기온은 17도였는데, 뛰니까 역시 더웠다. 배수로 양쪽에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서 그늘을 만들었고 햇볕을 피할 수 있었다. 이 나무들은 사시사철 저마다 아름답게 변신한다고 한다. 에이트 포트 디치가 티엔종의 포토 스폿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도 달리면서 사진을 찍었다. 마침 배수로를 따라 대만 전통 의상을 입고 응원하는 주민들이 많았다.
 
5K
5K까지는 빨리 달렸는데, 그 이후부터 기록이 걷는 것보다 느려진다. 그러니까 거의 달리다 멈추다 달리다 멈추다를 반복한 것이다. 대회에서 멈추는 경우는 너무 아파서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때다. 그러나 아파서는 아니었다. 주로에 차려진 뷔페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본격적으로 먹부림을 시작했다. 사실 2km 지났을 무렵에 만난 첫 보급소부터 심상치 않았다. 보급소는 보통 5K 지점부터 있으니까 속으로 ‘벌써부터?’하며 거리를 확인했다. 물과 스포츠음료 그리고 라임, 바나나, 방울토마토, 수박, 오렌지 등등 가짓수도 다양했다. 그런데 이건 정말 다과에 불과했다. 5K부터는 진짜 눈이 휘둥그레지고 코가 절로 킁킁거리며 몸이 반응하는 음식의 향연이다. 동네 주민들이 테이블을 길게 연결해서 깔아놓고 온갖 요리를 차려놨다. 먹지 않고 가려고 해도 애절한 눈빛을 보내며 목소리로, 손짓으로 부른다. 나는 이때부터 뷔페가 나타날 때마다 멈춰서 먹었다.

일단 대만 사람들이 아침에 즐겨 먹는다는 딴삥(蛋餅)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얇은 밀전병 안에 달걀과 옥수수가 들어있다. 에그 토스트처럼 어디서 먹어본 맛인데, 자꾸 생각나서 더 챙기지 않은 게 아쉬웠다. 그다음에 먹은 건 겉모습만 보고 두부를 노릇노릇하게 부친 줄 알았다. 한 입 베어 물자 부드럽게 녹아내리면서 고소한 맛이 났다. 채를 썬 무 등을 납작한 네모 모양으로 빚어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지져낸 뤄보까오(蘿蔔糕)였다. 개인적으로 딱딱한 무가 아닌 흐물흐물한 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뤄보까오에서는 흐물흐물한 무 특유의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느끼하지도 않고 담백했다. 국도 있었다. 두부와 생선이 들어간 맑은탕과 비슷했다. 이게 웬 달리다가 갑자기 몸보신! 이외에도 감자튀김, 고구마, 구아바, 돼지머리 고기, 새우구이, 캐러멜 팝콘, 크림 파스타, 춘권 등등 다른 대회에서는 맛볼 수 없는 다채로운 음식들을 맛보았다. 마치 먹으려고 여기까지 달린 게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빨리 뛰어서 기록을 세우는 것보다 오랫동안 달려서 맛있는 거 많이 먹는 게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8K


달리는 데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중국어를 못 알아들었다. 이럴 때 쓰는 필살기가 있다. “워스한구어런(我是韓國人, 나는 한국인이야)” 이 말을 듣더니 영어로 나에게 중국어 잘한다며 칭찬을 해준다. 기분 좋아서 “니지아오션머밍즈(你叫什么名字, 이름이 뭐야?)”까지 써먹었다. 이렇게 귀여운 소녀 니코를 만났다. 나이는 열 살이고 이번에 처음 달리기 대회에 나왔다고 했다. 힘들어서 죽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정말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것 같았는데, 나랑 얘기하려고 쫓아오는 모습이 귀여웠다. 나는 달리면서 너무 많이 먹어서 죽을 것 같다고 장난쳤다. 이제 진짜 그만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응원하는 이들의 마음까지 막을 순 없었다. 이미 한 손에 먹을 것이 꽉 차서 더 이상 받을 수 없었는데, 응원하는 동네 주민들은 뭐 하나라도 더 전해주고 싶어한다. 그리곤 내 몸에서 음식을 담을 만한 공간을 기어코 찾아낸다. 내가 스쳐 지나가는 찰나에 말이다. 그 마음이 고마웠다. 그래서 주는 것을 다 받았다. 바로 먹어야 하는 건 해치우고 나머지는 손에 들고 계속 뛰었다.   
 


Finish Line


내가 피니시라인을 통과하자 누군가 “감사합니다”라고 외쳤다. 배번표에 태극기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자원봉사자가 “꽁시(恭喜, 축하해)”라고 말하며 완주 메달을 목에 걸어줬다. 메달 속에 벼를 들고 논을 뛰는 대회 캐릭터가 새겨져 있다. 웃음이 터졌다. 나는 벼 대신 음식을 들고 뛰었으니까. 완주하고 나서도 한 손은 쓸 수가 없었다. 달리면서 받은 간식이 가득해서 펼칠 수가 없었다. 구운 달걀, 사탕, 젤리, 쿠키, 크래커, 샌드위치 심지어 다 녹은 아이스크림 바까지! 내 손이 이렇게 많은 걸 쥘 수 있다니 새삼 놀랐다. 이미 내 배 속에 있는 것까지 합치면 나는 정말 먹으려고 달렸다. 시계는 내가 818칼로리를 소모했다고 알려줬다. 하지만 얼마나 먹었는지는 계산하지 못한다. 체감으로는 달리면서 소모한 칼로리보다 먹은 칼로리가 더 많다.

그런데 여기서 방심해서는 안 된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완주 후 받은 리커버리 백에도 먹을 것이 가득했다. 봉지 라면, 검은깨 크래커, 설탕과 파를 뿌린 꿀꽈배기, 대회 캐릭터가 그려진 과자 등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쫑즈(粽子)를 하나씩 비닐봉지에 담아준다. 쫑즈는 버섯 등의 채소, 고기, 메추리알 등을 넣은 주먹밥으로 댓잎이나 연잎, 갈대 줄기로 감싸 쪄낸다. 완주 후에도 먹는 걸 멈출 수 없다. 짭조름하면서 찰진 쫑즈를 먹으며 생각했다 ‘티엔종에서 난 쌀로 만든 거겠지?’ 이곳 쌀로 만든 음식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며 깨달았다. 티엔종이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쌀 천국이라 불리는 곳의 논을 달리며, 여기 사람들이 직접 만든 음식을 먹었다. 대회 참가자들이 무사히 완주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빚어낸 요리였다. 그러니까 1시간 넘게 달리면서 내가 먹은 건 결국 티엔종의 정이다. 그동안 수줍게 말하곤 했지만 이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에서 약 200km 떨어진 시골 마을 티엔종까지 가서 왜 뛰었어요? “(정을 듬뿍) 먹으려고 달렸어요!”

글. 김민주 Min-Joo Kim
사진. 박지연 Ji-Yeon Park(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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