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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ONG PALATE
안동미식, 고조리서를 따라서
2020년 01월호

제법 큰 프라이팬에 휘휘 참기름을 두른 다음 잘 손질한 닭을 팬 위에서 이리 저리 뒤집었다.

닭은 프라이팬에 오르기 전 방망이로 성의껏 두드려 둔 뒤였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우리는 지금 1670년에 집필된 고조리서<음식디미방>을 따라 수증계를 만드는 중이다.

고서에는 ‘살찐 암탉을 잡아 털을 뽑고 뼈마디를 잘 풀어준 뒤 엉치와 앙가슴을 잘 두드려야 한다’고 기록돼 있다. ‘솥을 달구고 기름 반 종지쯤을 쳐 고기를 넣어 익도록 잘 볶으면서도 그 옆으로는 펄펄 끓는 장작불에 맹물을 가득 담아 지펴두어라’라고 짧게 쓰여있다. 이제 닭을 푹 삶을 시간이다. 그 사이 고명을 올릴 쪽파와 오이, 계란지단을 준비한다. 토란도 잘 깎아 옆에 둔다.

여기는 경북 영양 석보면 두들마을이다. 여행은 암호와도 같은 고어로부터 시작됐다. 때로는 한 문장으로 또는 두세 문장으로 기록된 옛 조리법은 순 우리말로 쓰여진 탓에 그 뜻을 정확히 파악하기 쉽지 않지만 그만큼 상상력을 불러 일으켰다. ‘반쯤 익은 앵두를 씨를 발라내고 살짝 데쳐 체에 걸러서 (조린) 꿀과 한데 섞어서 굳어 엉기거든 썰어 쓰라’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세줄 요리보다 짧지만 강렬했다.

500년의 시간을 거슬러, 막연히 선조의 요리법을 만나보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 누가, 왜 만들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조리서를 쓰게 됐을까?

 

짙은 어둠이 걷히기 전 차는 조용히 안동에 들어섰다.

굽이굽이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국도를 따라 광산 김씨 예안파가 자리잡은 와룡면 오천리 군자마을로 향한다. 오늘의 첫 목적지다. 안동호가 가까워 물안개가 피어 오른다. 짙은 안개로 앞을 분간하기 어렵다. 그 때 어스름이 걷히며 군자마을이라는 마을 이정표가 잠시 보였다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산기슭을 올랐다. 야트막한 언덕 위 오래된 마을이 이제야 드러났다.

‘외내’라 불리는 군자마을은 광산 김씨 가문이 20여대에 걸쳐 600년을 이어온 집성촌이다. 안동 부사 한강 정구 선생이 외내에 들렀다가 김부필, 김부륜 등 김효로의 친손들과 외손들을 보고 ‘마을에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하여 군자마을이라 이름 지었다. 원래 현재의 자리보다 2km정도 아래에 있었으나 1974년 안동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상들이 물려준 땅, 낙동강의 품에 가만히 기대어 살아가던 많은 이들에게 큰 아픔을 남겼다.

 

고금의 선현들이 시를 읊조리며 진경이라 찬탄한 강변 길과 낙락장송들, 유유히 흘러가는 나룻배와 섶 다리는 모두 물에 잠겼다. 원래 예안은 조물주가 특별히 만들어 놓은 땅과 같았다. 강변 산들은 석벽을 이루었고 산의 발치는 살짝 물에 잠기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넓은 여울엔 햇살과 노을이 깃들었고 바람과 물, 세월을 그대로 맞은 강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그 자체로 경치였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영남 예안을 ‘살기 좋은 땅, 즉 ‘가거지지可居之地’로 전국 제일이라 했다. 아쉽게도 외내, 부포, 부내, 의인, 하계, 원촌 등 도산의 9곡은 그렇게 모두 물에 잠기었다. 외내는 도산 구곡 중 제1곡인 운암곡이다.

 

군자마을 설월당에서 광산 김씨 예안파 김도은 종부를 만났다.

그녀는 우리에게 맨드라미, 치자, 녹차 잎, 녹두 등을 꺼내 보여주었다. 옆에 놓인 청포묵의 총 천연색과 같았다. 분홍색은 맨드라미, 노란색은 치자, 녹색은 녹차에서 왔다. 이윽고 종부님은 마루에 앉아 얇게 펴 둔 묵을 썰어 가지런히 한쪽에 정렬한다. 그리고 그 위에 육수를 끼얹은 다음 소고기 몇 점을 중앙에 놓는다. 이 음식의 이름은 ‘분탕’이다. 쇠고기와 도라지, 미나리, 녹두묵, 국간장과 참기름이 주 재료다. 묵은 입에 넣는 순간 스르르 녹아 없어져버린다.  

이윽고 한 상이 차려졌다. 옆에는 육면이 놓였다. 엉치살을 얇게 저며 국수같이 썬 다음 끓는 육수에 담가 국수 먹듯 후루룩 맛볼 수 있는 음식이다. 생강이 들어간 오이 장아찌의 명칭은 ‘향과저’다. ‘저’는 과거 김치를 칭했던 단어다. 어린 오이를 소금물에 절인 후 그 속을 생강으로 채운 것인데 알싸하고 오묘한 그 맛이 일품이다. 놋그릇에 담긴 샛노란 치자밥은 윤기가 남다르다. 한쪽에 놓인 가지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더니 촉촉하면서도 물컹한 가지 특유의 식감이 살아있다. 숙성된 가지, 이 음식의 이름은 모점이다. 집에서 만들어보고 싶어 종부께 조리법을 물었다.

 

“먼저 가지를 넓게 썬 다음 이틀 정도 펴서 말려둬요. 그 다음에 참기름을 묻혀서 또 하루 저녁 말려두었다가 다음날 구워 먹으면 돼요. 방법은 간단하지만 그 맛과 향이 아주 깊어요” 오늘 차려진 요리는 종부의 말처럼 모두 순수한 본연의 향과 맛을 음미할 수 있는 것들이다. 분탕과 육면, 치자밥과 향과저, 모점이까지 한 상 가득 속이 편하고 든든하다. 그렇게 우리는 한끼의 식사를 마쳤다.

1540년 조선시대 탁청공 김유(1481-1552)와 그의 손자 계암 김령(1577-1641)이 대를 이어 써 내려간 고조리서 <수운잡방需雲雜方>은 ‘군자가 때를 기다리며 몸을 기르고 심지를 고르게 하기 위한 갖가지 음식 방문’이라고 뜻을 담고 있다. 도와 덕을 가슴에 품고 편안히 기다리되 음식으로 그 마음을 다스린다는 말로 해석된다. 책에는 총 121가지의 조리법이 기록돼 있다. 이중 59가지가 송엽주, 삼오주 등의 술이다. 당시 고급 식문화를 향유하던 선비의 입장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대접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 화려하고 품격 있는 음식과 주류를 주로 다룬다.

 

 

예로부터 영남은 문헌의 보고였다.

선비의 고장이자 학자의 고장인 안동에서는 조선시대 타 감영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책을 발행했다고 전해진다. 글쓰기가 가능한 지식인 양반층이 많았고 서원, 서당을 중심으로 한 교육도 활발했기 때문이다. 면 안동부와 예안현의 과거 급제자 수가 293인에 달하였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게다가 조선시대에는 각종 유교 의례에 술과 음식이 빠지지 않았다. 음식과 술의 격조가 곧 그 가문의 사회적 위상을 보여주는 수단이기도 했다. 가문의 전통을 유산으로 남길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16-17세기, 양반가에서 남성에 의해 조리서가 쓰여졌다는 점은 독특하다. 1449년 쓰여진 <산가요록山家要錄>은 최초의 조리서로 시기상으로는 100년이 빨랐지만 이는 궁중 어의인 전순의의 기록으로 민간에서 기록한 조리서와는 차이가 있다. 당시 음식 조리는 모두 여성이 담당했기에 남자는 주방에 드나들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유교문화가 깊이 자리잡은 안동 지방에서 남성에 의한 조리서가 쓰여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영양, 오지를 떠올렸다.

낙동강의 맥이 흐르긴 하지만 고랭 협곡지대다. 태백산맥의 내륙지역으로 동쪽은 울진군과 영덕군, 서쪽은 안동시, 남쪽은 청송군, 북쪽은 봉화군과 맞닿아 있다. 전반적인 해발고도 역시 경북에서 가장 높다고 하는데 문을 여니 찬 기운이 스쳤다. 적막한 강산이었다.

산맥을 감싸는 겨울날의 서늘한 공기를 느끼며 영양 석보면 두들마을로 방향을 잡았다. 석계 이시명 선생과 안동 장씨 장계향이 영덕 영해에서 돌아와 일가를 이룬 곳으로 석계고택과 종택 등이 남아있는 곳이다. 안동에서는 1시간 거리, 굽이 굽이 산길을 돌아가야 한다. 산과 계곡, 천을 따라 국도를 타고 가다 보면 오른편에 석보면 두들마을 ‘장계향 음식문화원’ 푯말이 나타난다. 고조리서 <음식디미방>요리를 체험하고, 숙박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음식디미방閨壺是議方>은 ‘좋은 음식 맛을 내는 방문(方文)’이라는 뜻을 담은 조리서로 1670년경 안동 장씨 장계향(1598~1680)에 의해 한글로 쓰여졌다. 고어에서는 ‘지’ 발음을 ‘디’로 하였다. 1600년대 중엽과 말엽, 경상도 양반가의 음식 조리법과 저장·발효 식품, 식품 보관법 등 146가지를 소개한 책이다. 특히 가루음식과 떡 종류의 조리법 및 어육류, 각종 술 담그기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언문을 금기하던 시대 안동 장씨, 장계향의 생각은 달랐다. ‘내 나라에서 내가 먹는 음식, 우리 고유의 식재료를 구태여 한문으로 표기할 수는 없다’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녀의 나이 일흔 둘이었다. 이 책의 서두에는 “이 책을 이렇게 눈이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을 알아 이대로 시행 하여라. 딸자식들은 각각 베껴 가되 이 책을 가져 갈 생각일랑 절대로 말아라. 부디 상하지 않게 간수하여 빨리 떨어져 버리게 하지 말아라.”라고 쓰여있다.

이 곳에서 재령이씨 석계파 13대 종부 조귀분님을 만났다. “안동 장씨로만 알려졌고 장계향이라는 할머니의 성함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때였어요.” 종부는 시집 와 음식디미방을 처음 알게 됐지만 고어만 보고서는 음식을 하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내림음식은 쭉 해왔지만 디미방의 요리는 그것과는 또 달랐으니까요” 이후 경북대 백두형 교수가 고어를 해석해 쓴 <음식디미방 주해서>를 참고해 디미방 요리를 조금씩 만들기 시작했다.

“요즘 능력 있는 여성을 슈퍼우먼이라 하는데 장계향 할머니는 그 이상이었다고 생각해요. 시, 한문, 요리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여자가 언문 하는 것을 금기시 하던 시대에 이러한 저작을 남기셨으니까요. 고조리서가 여러 권 있지만 음식디미방은 반가 음식으로 궁중음식 수준에 가까운 메뉴를 만들었기 때문에 특히 소중하다고 봅니다” 그녀는 당면 없이 고기, 채소, 버섯 등으로만 이루어진 잡채와 밤, 대추, 잣을 섞어 떡고물을 만드는 잡과편 등을 집에서 만들어 볼 수 있는 디미방 요리로 추천했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진동할 때 즘 팔팔 끓여둔 물에 닭을 넣어 40분간 푹 끓여냈다. 음식디미방 원문에는 ‘솟구치도록 끓여 내라’라고 되어 있다. 잘 삶은 닭은 일일이 뼈를 발라 두고 그 위에 계란지단과 부추, 오이채 등으로 장식을 했다. 잘 익은 토란과 미리 썰어둔 생강도 빠지지 않는다. 닭고기를 삶은 물에 밀가루를 두 국자 정도 타서 가룻기가 걸쭉해질 때 떠서 완성된 음식 위에 솔솔 뿌려주면 수증계는 완성이다.

 

안동으로 여행을 가기로 결정했을 때, 누구보다 음식디미방을 쓴 정부인 안동 장씨 장계향의 아버지인 경당 선생을 만나고 싶었다.

틈만 나면 딸아이와 마주 앉아 <소학>을 공부했을 경당 장흥효(1564∼1633) 선생의 마음을 가만히 떠올려보았다. 퇴계 학파의 학맥을 이어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 한강 정구 선생 등에게 사사를 받아 제자들을 키워냈던 그였지만 딸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총명했던 외동딸, 장계향은 일찍이 시와 언문에 밝았고 그는 어린 딸이 어깨너머로 학문을 익히는 것을 야단치지 않았다. 오히려 외동딸과 학문을 논할 정도였다. 그녀의 셋째 아들인 갈암 이현일이 기록한 <정부인 장씨 실기>에 의하면 그녀는 <사서오경>, <십구사략>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한다.

 

경당 고택은 경북 안동 서후면 금계리에 자리잡고 있다. 의성 김씨 학봉 종택과도 멀지 않다. 먼저 경당 장흥효 선생이 강학을 한 광풍정과 제월대가 눈에 들어온다. 많을 때는 2-300명 가까이 이곳에 모여 공부를 한 것을 전해진다. 넓은 정자와 바위 위에 앉아 마을을 내려다보며 시를 읊는 어린 소년들이 눈 앞에 그려졌다.

안동 장씨 11대 종손 장성진, 종부 권순님이 우리 일행을 맞았다. “경당은 퇴계 선생을 만나지 못했어요. 경당이 2살되던 해, 퇴계선생이 돌아가셨죠. 하지만 퇴계 선생의 제자인 학봉, 서애, 한강, 월천 중 학봉 김성일 선생이 가까운 곳에 살고 계셨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학봉 선생께 학문을 배우셨어요. 학봉은 이후 진주임란 때 돌아가시는데 그 분의 제사를 아버지의 제사보다 중시할 정도로 사제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셨지요.”

서애 류성룡은 56세에 안동으로 내려와 경당을 불러 서로 8년 동안 시, 담화 교류를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경당은 학문을 했지만 한 번도 과거에 나간 적은 없다.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어지러울 때였고 그래서인지 오로지 후학 양성에만 매진했다. 이 일대에서 제일 가는 학자로 퇴계의 제자들과 교류했지만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고 오히려 천거되지 않기를 바랐다고 하니 그 마음도 궁금했다.

특히 그 시대를 살다간 부녀의 이야기가 재미있어 며칠이고 고택 아랫목에 앉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장성진 종손이 말을 이었다. “경당 장경효 선생의 외동딸인 장계향 할머니는 영덕 영해(현재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로 1616년 시집을 가셨기 때문에 저희가 ‘영해 할머니’라고 존칭을 합니다. 영해 할머니는 19살에 재령 이씨 석계 이시명 선생과 혼인을 하셨어요.” 석계 이시명은 문과에 두 차례나 급제한 운악 이함의 셋째 아들로, 만석꾼 집안 출신이었다. 첫째 부인인 광산 김씨의 처가인 안동 예안에 왔다가 학식이 깊은 경당을 만나게 됐다고 전해진다.

석계 선생은 성균관에서 돌아온 이후, 전 부인인 광산 김씨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안동에 들렀다가 다시 경당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게 되면서 장계향과 연을 맺게 됐다. “애지중지 키운 외동딸을 석계 이시명 선생의 후처로 보낸 것은 그만큼 인품이 남달랐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장계향은 전부인 소생의 두 남매를 포함해 열 명의 자식을 키워냈다. 전부인의 소생 역시 업어서 매일 서당에 공부를 시키러 갈 정도로 교육에 대한 열의가 넘쳤다. 퇴계의 학맥을 이은 영남학파의 갈암 이현일 선생 등 걸출한 학자들이 모두 정부인 장계향의 피를 이어 받았다.

 

반가에서 최고의 상으로 쳤던 9첩반상을 권순 종부님이 내왔다.

안동 장씨 종부의 음식은 그 맛이 남다르다고 소문이 나 요즘도 손님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다. 놋그릇에 문어와 소고기찜, 시금치 나물과 젓갈, 더덕무침, 물김치, 우엉채 볶음, 보푸름, 탕 등이 가지런히 담겼다. 특히 북어를 얇게 썰어 간을 한 보푸름이 인상적이다. 안동 9첩반상에서 보푸름은 빠지지 않는다. 

“종부의 맛은 결국 간장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해요. 저희는 1년에 다섯 말 정도 콩을 사서 좋은 것만 선별해 매주를 쑵니다. 음력 섣달 그믐에 띄웠다가 2월에 장을 담가요.”

장독간으로 나가보니 독특한 점이 눈에 띄었다. 흙과 자갈이 고루 장독대 밑에 깔려 있었다. 기온차가 많이 발생하면 장맛에 영향이 생기기 때문에 지열 유지를 위해 옛날 방식으로 진흙과 마사토, 자갈을 차례로 깔고 다시 마사토로 다진 후 그 위에 소금을 고루 펴 넣었다. 숯가루, 마사토, 소금 다짐은 3회 정도 반복한다. 이렇게 만든 땅에 장독을 묻으면 그 온도가 일년 내내 유지돼 더욱 깊은 맛을 만들어낼 수 있다.

9첩반상도 유명하지만 종부의 안동국시 사랑도 남다르다. “옛날에는 쌀을 많이 먹지 못했기 때문에 국수를 만들었어요. 국수를 만들어 손님들과 나눠 먹으면 그 육수로 다들 배를 채웠습니다.” 웃지 못할 이야기였다. 안동국시는 제대로 만들려면 최소 5시간의 밀가루 숙성이 필요하다. 지금은 일부러 권순 종부님께 안동국시를 배우러 각 지역에서 찾아올 정도다. 엿기름과 고추로 맛을 낸 안동별식, 안동식혜까지 맛있게 비우고 다시 다음 여정을 향해 길을 떠난다. 몸이 편찮은 와중에 손님을 위해 9첩반상을 차려준 종부께 고마우면서도 못내 죄송한 마음을 안고 작별 인사를 건넸다. 경당고택 옆에는 작은 한옥 한 채가 지어지고 있다. 안동 장씨 종가의 요리를 배울 수 있는 체험관이다. 종가의 내림음식이 부디 명맥을 이어가기를 바랄 뿐이다.

 

경당 고택이 있는 서후면을 빠져 나와 안동 시내로 차를 몰았다. 다시 낙동강이 눈에 들어왔다. 한 상 푸짐하게 먹었으니 이제 안동에서 제일 가는 명주를 맛볼 참이다.

우리는 옛 방식으로 소주를 내리는 조옥화 명인의 안동소주를 만나러 갔다. 이 일대 사람들이 추억하는 술에는 은은한 곡향이 매력적인 안동소주가 빠지지 않는다.

안동지방에서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가양주라고 해서 집에서 술을 빚었다. 고조리서<수운잡방>에는 진맥소주라 하여 ‘밀(10되)을 쪄서 누룩(5되)과 함께 찧어 물(1동이)을 부어 발효시켜 5일 후 증류한다’고 돼있다. 음식디미방 역시 소주 제조법으로 ‘쌀(10되)을 쪄 누룩(5되)과 물(20되)을 섞어 발효시켜 7일 수 증류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옥화 명인의 안동소주 역시 쌀과 밀 누룩, 물 이외에는 어떤 것도 넣지 않는다. 순수한 곡향만을 내기 위해서다. “누룩에는 밀, 쌀, 보리누룩이 있는데 밀 누룩만을 사용해요. 따뜻한 방에 누룩을 띄우는 데에 20일, 술독에 넣어 자연 발효시키는 데에만 20일이 걸리니 총 40일 이상이 걸리는 셈이죠.” 98세 조옥화 명인의 대를 이어 소주를 빚는 김연박 안동소주 대표의 말이다. “어머니가 하시던 그대로 술을 빚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특히 누룩을 틀에 넣어 성형할 때 공기가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썩기 때문에 발로 디뎌 공기층을 모두 없애고 있어요.” 기계를 쓰는 경우 100% 압착이 되지 않아 버리는 양도 상당했다고 한다. “발로 디디는 게 가장 좋아요. 여기에도 역시 선조들의 지혜가 녹아있는 거죠.”

 

미리 말려둔 고두밥에 파쇄한 누룩, 물을 섞어 손으로 버무려 가면서 술독에 넣은 다음 20일간 자연발효를 시킨다. 이 전술을 소주고리에 넣은 다음 장작불을 때면 그 열기가 위로 올라가고 소주고리 위에 얹은 찬물 때문에 소주고리 내부 천장에 이슬이 맺혀 증기가 떨어진다. 이렇게 소주고리에 증기가 맺혀 술을 받기까지는 최소 2-30분이 걸린다. 기다림의 술인 셈이다. 소주고리의 중간엔 증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밀가루 반죽을 붙여야 한다. 처음에 이 술을 내리면 60도 정도가 되고 이후 차차 도수가 내려가는데 45도에 맞춰 소주를 내린다. 45도가 가장 맛있는 술이 되는 온도인 셈이다.

 

안동에서의 하룻밤을 보낼 수애당은 임하호가 내려다보이는 조용한 평지에 있다.

위치는 안동 임동면 수곡리. 독립운동가였던 수애 류진걸 선생의 호를 따라 수애당이라 지었는데 가서 보니 과연 물로 둘러싸인 아늑한 땅이다. 원래 수애당은 수곡동 612번지에 있었으나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수몰 위기에 처하자 현재의 자리로 1987년 옮겨왔다. 정침은 일자형 평면 구조로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로 구성돼 있다. 현재 주인 내외 류호진, 문정현씨가 잘 가꾸어 한옥 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 목재는 모두 춘양목으로 지어져 특유의 기품이 빛난다.

수곡에 도착해 보니 이미 해가 졌다. 마당으로 들어서니 주인 류호진씨가 반긴다. 아궁이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른다. 안을 들여다보니 감자와 고구마가 몇 알 들어있다. 그 정취만으로도 이미 휴식이다. 이윽고 주인이 내어 온 신선하고 따뜻한 보이차 한잔을 마신다. 고즈넉한 한옥 마루에 앉아 차를 마시는 시간이 하루의 선물로 느껴졌다. 피로를 풀기에는 뜨뜻한 구들장이 제격이다. 푹 한숨 자고 새소리를 따라 일어나 임하호를 산책하는 것, 정성으로 지어진 아침 밥을 먹는 것. 바로 수애당에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다.

 

안동에서 난 재료로 요리를 하는 주인장의 손맛은 아침밥상에서 드러난다. 마의 씨를 볶아 낸 무침이나 진미 보푸름 같은 특유의 식재료가 빛날 뿐 아니라 그 맛도 깊이가 있다. 손이 많이 가는 조리법으로 정성껏 해 낸 티가 난다. 안동에서 난 달콤한 사과 한 쪽으로 입가심을 하고 다시 옹기종기 아궁이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한옥 스테이가 총체적인 하나의 경험으로 여겨지는 것은 단지 한옥에서 잠을 자기 때문이 아니다. 그 곳에서 자연의 순환을 느끼고, 제철 식재료로 채워진 건강한 밥상을 만나고, 정성을 들여 손님을 맞는 주인의 따뜻함에 감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백이 있는 공간에서 건강한 기운을 채우고 돌아오는 것, 여행이 주는 진정한 깨달음이다.

고조리서를 따라간 자리에는 본인이 나고 자란 곳의 진면목을 경험하게 해주겠다는 그 마음이 가만히 보였다. 이는 과장되지 않았고, 있는 그대로가 천천히 드러날 뿐이었음에도 그 모든 것에는 감동이 있었다. 여행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지만 이 책에서 발견한 것은 단지 요리가 아니었다. 이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안동과 영양사람들의 멋과 맛, 이를 써 내려간 이들의 이야기였다.

글. 강혜원 HYE-WON KANG
사진. 김현민 HYUN-MI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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