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EYS
DEEP-ROOTED TEA
뿌리 깊은 차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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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호

남원 보련산에는 야생 차나무가 군락을 이룬다.
그곳에서 찻잎을 따고 장작불로 덖고 키질을 해 고려단차를 만드는 장인이 있다.

 

매화와 닮은 동네

차는 언제부터 마셨을까. 아마도 중국의 운남이나 사천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그 지역에서는 찻잎을 차로 우리기 전 소금으로 절여 김치처럼 먹기도 했다고 한다. 그만큼 차를 일상적인 식재료로도 두루 활용한 모양이다. 우리나라 차 문화의 황금기는 12세기 고려 시대로 꼽힌다. 초기에는 승려들을 중심으로 사찰 주변에 다촌茶村이 형성됐다. 특히 전라도에서 그 흔적을 찾기가 수월한데, 이 지역이 겨울에도 비교적 온화한 기후를 유지해 차나무가 잘 자랐기 때문이다. 후기에 들어서자 선비들이 차 문화의 명맥을 이어갔다.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혹은 밀려난 이들은 산과 강을 벗 삼아 차에 흠뻑 빠져들었다. 이때 활약한 이자현, 이규보, 이색 등 여러 문인을 통해 전통적인 차 문화가 스러져가는 성벽의 틈을 비집고 다음 세대에 전달됐다. 덕분에 고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훌륭한 차인인 김시습이 등장했고, 전라도 지역에서는 여전히 차를 생산하고 유통할 수 있었다.

남원역에서 차를 타고 20분 거리에 위치한 매촌마을로 향했다. 마을의 생김새가 매화와 비슷해 이와 같이 이름 붙여졌다. 사군자 중 하나인 매화는 언 땅 위에서도 맑은 향기를 품는다 하여 흔히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삼는다. 선비의 풍모를 닮은 매촌마을에 들어서자 논과 밭이 널찍하게 펼쳐진다. 멀리 벌초하는 어르신도 눈에 띈다. 마을 깊숙이 들어갈수록 길이 더 좁고 구불구불해진다. 집과 집의 간격도 크게 벌어졌다. 집에 대문이 없어 마당과 마루가 훤히 보인다. 경사진 골목을 따라 올라가니 커다란 나무 사이로 낯선 모양의 초가지붕이 삐죽 솟아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상투를 틀고 수염을 기른 한 남자가 나온다. “여기가 매화낙지입니다. 매촌마을에서 매화 가지가 늘어진 부분이죠.” 그의 말과 그가 입은 베옷과 그가 나온 초가집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조선 시대 화가 김홍도가 한지에 먹을 칠해 그렸을 법한 오래된 풍속화 말이다.

 

돌담을 쌓고
억새 지붕을 이다

돌로 쌓은 담벼락이 초가집 주변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다. 벽돌처럼 크기가 균일한 것도 아닌데 제각기 다른 형태의 돌이 촘촘하게 메워진 형태다. 살짝 벌어진 틈은 햇살과 바람만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하다. 여타 집과 마찬가지로 대문이 없다. 돌담이 끊긴 지점이 입구다. 한편에는 ‘매월당’이라고 적힌 작은 푯말이 놓여 있다. 이곳은 남원의 차 문화를 고스란히 경험할 수 있는 다실이다. 두 채의 초가집이 있는데, 한 채는 불을 지펴 차를 덖는 제다실로 다른 한 채는 차를 음미하고 교육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손수 억새를 이어 지붕을 올리고 목재로 실내를 갖춰 나무 향이 은은하게 어우러지게끔 했습니다.” (오동섭, 매월당 장인) 삿갓을 본뜬 듯한 지붕이 행랑채를 우직하게 덮고 있다.

약 15년 전, 오동섭 장인은 남원에 차나무가 존재한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다. “그렇게 차밭을 찾아 헤매다가 보련산 자락에서 대규모 야생차 군락지를 발견했어요.”(오동섭) 장인은 본래 김시습을 흠모하던 차인이었다. 선생이 차에 관해 쓴 시 80여 편은 그에게 긴 여운을 남겼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가 찾아낸 군락지는 김시습이 지은 한문소설 <만복사저포기>의 무대가 되는 장소이기도 했다. 과거 보련산 내에 자리한 보련사는 소설 속 두 주인공이 이별한 절이며, 산꼭대기에 있는 샘은 사랑의 증표인 은잔이 깃든 곳이다. 이를 계기로 오동섭 장인은 보련산 앞에 다실을 만들기로 한다. 그리고 김시습의 걸림 없는 사상과 초암에서 차를 즐겼을 탈속의 모습을 본받고자 선생의 호를 따서 이곳을 ‘매월당’이라 칭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장인 역시 어느 스님으로부터 호를 받는다. 그는 ‘신목’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잘 헤아려 믿음과 신념으로 차를 만드는 중’이다.

 

자연과 바람과 빛

장인의 뒤를 따라 바삐 움직이니 어느새 주변이 녹음으로 뒤덮인다. “야생에서 여러 식물과 경쟁하고 조화를 누리며 자란 차나무는 향이 달라요. 근처에서부터 특유의 향이 감돌죠.”(오동섭) 그는 천연한 야생차 군락지를 거침없이 걷는다. “사람들에게 간섭받지 않아서 더 풍부한 향을 표현한다고 생각해요.” 그러고는 걸음마다 사방에 있는 찻잎을 톡톡 따낸다. 내 눈에는 다 같은 연두색 잎인데 그는 그늘진 위치에서도 망설임 없이 손을 내민다. “옳게 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른 방법으로 따면 악취가 나요. 대부분 어린 순을 따는 게 좋다고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요. 충분히 자라 잎이 반짝일 때 수확해야 합니다. 입하 전후의 잎이 가장 적절하죠.” 그가 건네는 찻잎을 만져보니 매끄럽고 윤기가 돈다. 이곳의 차나무는 적어도 400년 이상 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기 촉촉한 흙바닥을 걷는 동안 간혹 무언가 발치에 걸리는데, 대부분 고려 시대에 사용했던 기와나 토기 일부라고 한다.

장인의 양손에 찻잎이 가득 찼을 무렵, 보련사가 있던 자리에 도착했다. 키 큰 나무들이 터 주변을 울창하게 감싸 마치 누군가 감춰놓은 공간에 몰래 들어선 느낌이다. 둥글게 자리한 터에 햇살이 가득 담긴다. 여기서 자라난 식물들만 키가 낮아 어디부터 어디까지 절이 자리했을지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 천천히 하산하려는데 물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보련산과 얽혀 있는 만학동 계곡은 장인이 휴식하는 장소다. “저녁 즈음 반딧불이가 하나둘 불을 밝힙니다. 평평한 돌 위에 누워 흐르는 계곡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요.”(오동섭) 이곳의 돌은 찜질에 자주 쓰이는 맥반석이다. 물에 깎여 날카로운 부분도 있지만 대개 앉기 좋은 목이 돼준다. 장인이 진행하는 ‘야생차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숲 해설사와 함께 산을 둘러본 뒤 학생들과 계곡에서 자연을 만끽하기도 한다고. 바람, 햇살, 강물 등 모든 것이 차 문화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쉬어갈 겸 잠시 맥반석에 자리를 잡고 계곡물을 바라봤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이 시원한 걸 보니 아직 여름이 다 가지는 않았나 보다.

 

한 모금의 미덕

산에서 채취한 야생 찻잎은 고려단차의 뿌리가 된다. 단차는 묶을 단, 즉 하나의 덩이를 이루는 차 형태를 뜻한다. 동그랗게 뭉쳐진 까닭에 덩차나 떡차라 불리기도 한다. 오동섭 장인은 전통 고려단차의 기본기에 본인만의 해석을 덧붙여 현대인도 편히 단차를 접할 수 있게 재창조했다. “차는 향기가 나는 물입니다. 그래서 저는 조향사의 마음으로 차를 만들어요. 의도한 차향을 완성하기 위해 잡향이 스며들지 않도록 청결에 가장 신경을 씁니다.” 장인이 갓 따온 찻잎을 시들리며 말한다. 시들리는 것은 위조萎凋라고도 하는 수분을 증발시키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잎의 촉감이 더 부드러워지고 독특한 향기가 생성된다.

그 후 그는 제다실 안쪽에 있는 솥을 수세미로 힘 있게 닦아낸다. 여러 차례 반복해 솥이 빛을 반사할 정도가 되고 나서야 아궁이에 장작을 넣는다. 장인이 장작불을 고수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뜨거운 솥에 차가운 찻잎을 넣으면 온도가 급격히 낮아지기 마련인데, 장작불은 원래의 온도로 돌아가는 복원력이 좋기 때문이다. 솥 내부가 300℃에 이르자 “어잇!” 하는 외침과 함께 찻잎을 넣고 덖기 시작한다. 녹색 잎이 솥 안에서 빙글빙글 빠르게 돈다. 대개 2분마다 교대로 차를 덖으며, 한번 작업 시에 100~200솥 정도를 덖는다고 한다. 덖은 찻잎은 멍석 위에서 둥글리듯 비빈다. 약간의 상처를 내 고유의 성분이 잘 드러나도록 돕는 방법이다. 이후 잎을 낱낱이 털어 햇볕에 건조하고 키질을 한다. “키질을 하면 옳은 잎은 안으로, 그른 것은 밖으로 튕겨 차가 더욱 정직해집니다.”(오동섭) 마지막으로 증제를 거쳐 만든 찻잎 덩이를 반복해 말렸다가 항아리에 담아 숙성시킨다.

 

정교한 과정을 거친 고려단차를 시음하기 위해 다실로 자리를 옮겼다. 나무 테이블 위에 투명한 잔이 쪼르르 늘어서 있다. “좋은 다구보다 분수에 맞는 다구를 사용해야 합니다. 잔은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죠.” 찻잔 옆에 있는 모래시계가 고운 가루를 천천히 낙하시킨다. 약 3분 후 영롱한 금빛을 띠는 차가 잔에 따라지며 색을 자랑한다. 다도 예법을 몰라 편한 대로 잔을 들고 차를 마셨다. 쓴맛이 전혀 없고 숲에서 맡았던 은은한 향이 코와 입에 감돈다. 몇 번 우린 차가 가장 맛있는지 묻자 장인이 웃으며 답한다. “차는 기호식품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다릅니다. 뒤로 갈수록 맛이 달아지니 입맛에 따라 첫 번째 우린 차가 맞을 수도, 다섯 번 우린 차가 마음에 들 수도 있죠.” 대화를 나누며 고려단차를 거의 열 번 반복해 우렸는데도 향에는 변함이 없다. 시음을 마치자 길쭉한 나무집게로 찻잔을 살며시 집더니 뜨거운 물에 담가 소독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결함을 유지하는 모습이다.

그는 한때 1년치 차를 뭉텅이로 버린 적이 있다고 했다. 근심, 걱정 없는 차를 내놓는 것이 그의 신조였기 때문이다. 다만 한 톨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절대 밖으로 내보이지 않았다. “분수를 아는 것이 중요해요. 그러려면 제대로 버릴 줄도 알아야 하죠.” 좀처럼 무언가를 내려놓기 어려울 때가 있다. 이렇게 되면 어떡하지, 하고 고민하다 보면 결국 내가 쥐고 있던 것이 근심, 걱정임을 알게 된다. 찻잔을 채우려면 먼저 비워야 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다.


 

TRAVEL WISE: 남원

WHERE TO STAY

함파우 소리체험관
‘물결이 머무는 고요한 곳’이라는 뜻을 가진 이 체험관은 남원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지어진 곳이다. 농악, 사물놀이, 천연염색, 압화, 천문대 별 관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경험할 수 있다. 한옥으로 지어진 숙박동은 명인관, 풍류관, 신명관, 대동관으로 구분되며 총 9개의 방이 있다. 2인실부터 10인실까지 다양한 크기로 나뉜다. 넓은 마당과 저수지 주변을 산책하며 남원의 자연을 충분히 누릴 수 있다.
전북 남원시 술미안길 14-19

남원예촌
켄싱턴호텔에서 운영하는 한옥 스테이다. 스탠더드, 디럭스온돌, 디럭스대청, 슈페리얼대청, 디럭스스위트, 로열스위트 룸이 있다. 디럭스온돌 룸은 아궁이에 직접 참나무 장작을 때 열기가 방바닥에 고스란히 퍼지는 구들장을 재현했다. 호텔 주변에 남원추어탕거리, 춘향관, 완월정 등이 자리해 남원 이곳저곳을 편히 둘러볼 수 있다.
전북 남원시 광한북로 17

 

WHERE TO EAT

집밥, 담다
어느 남원 가정집의 식탁에 초대받고 싶다면 이곳으로 향하자. 꽃이 그려진 벽화를 지나면 아기자기한 한옥이 나온다. 메인 요리는 단호박매콤돼지갈비찜, 한그릇에 담다, 특별하게 담다, 엄마손맛 청국장, 어린이 돈가스다. 이 중 한그릇에 담다는 매주 다른 이곳만의 가정식을 선보인다. 소박하면서도 정감 가는 분위기 덕분에 현지인도 자주 찾는 식당이다.
전북 남원시 하정1길 28

산들다헌
요령을 피우지 않은 빙수로 잘 알려진 카페다. 일반적인 라테 종류와 함께 쌍화차, 매실차, 오미자차, 유자차 등 전통 음료를 판매한다. 그중에서도 대추를 활용한 스무디와 빙수가 인기다. 적당히 달아 세대를 불문하고 선호도가 높다. 호롱불을 연상시키는 조명 아래서 고즈넉한 시간을 보내보자.
전북 남원시 향단로 21

 

WHERE TO GO

광한루원
남원에는 조선 전기에 건축된 목조건물인 광한루가 있다. 그리고 광한루, 연못, 오작교 등을 포함한 일종의 정원이 광한루원이다. <춘향전>에서 제일 승지로 언급되는 곳이기도 하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평일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문을 연다. 오후 7시부터는 무료로 개장하니 참고하자.
전북 남원시 요천로 1447

원각사 전망대
높이 288m 덕음봉 위에 자리한 원각사 전망대에 올라보자. 남원 시내가 한눈에 담긴다. 굽이치는 산의 형상과 그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이 단란한 장면을 연출한다. 바로 앞에 요천이 흘러 마음까지 잔잔하게 평정을 찾게 한다. 도보로 10분 거리에 남원향토박물관도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전북 남원시 양림길 23-52

글. 김호경HO-KYUNG KIM
사진. 박하선HA-SEON PARK, 박용희/한국관광공사(광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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