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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서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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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3월호

 

과거 수많은 문인과 화가들이 이곳에 머물렀고, 오늘날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교류하며 작품 세계를 완성해가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래서 특별하고 여행자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서촌을 구성하는 건 수많은 골목들이다. 마치 미로처럼 얽혀 있어서 한 번 길을 잃으면 한 시간씩 헤매기 일쑤지만 이 또한 동네와 친해지는 방법 중 하나다. 오래된 한옥과 낮은 빌라들, 그 사이에 외지에서 들어온 젊은 아티스트들이 작업실을 차리고 동네 사람들과 소통하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 이 동네에는 이야기가 존재하고, 오래된 가게와 젊은 기획자가 만나 새로운 콘텐츠를 양산하기도 한다. 최근 몇 년 새 이 동네는 항상 변화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동네를 여행해보면 안다. 사실은 오래된 기억을 간직한 집들이 여전히 남아 있고, 새로운 트렌드와 공존하는 방법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중이라는 것을. 그 모든 것들이 얽히고설켜 창작의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하고, 여행자에게는 끊임없이 산책하며 새로운 요소를 발견하는 재미를 선사한다.

 

예술가의 흔적

서촌에는 옛 예술가의 숨결이 느껴지는 장소가 많다. 그들이 고뇌했던 시간을 마주하거나 공간 너머 존재하는 흔적을 찾아보며 서촌 여행을 시작해보는 것도 좋다.

처음 방문할 장소는 이상의집이다. 경복궁역 2번 출구로 나와 직진하다 보면 갓 구운 빵 냄새가 매혹적인 김용현 베이커리가 나온다. 40년 된 이 동네 빵집을 지나 은행 왼쪽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서면 1분쯤 걸었을까. 반듯한 기와지붕 아래 투명 유리문이 전면을 꽉 채운 건물이 나타났다. 문 위로 이상의집임을 알리는 간판의 자음과 모음이 도형 블록처럼 얼기설기 쌓여 있다. 1910년에 태어난 이상은 28년의 짧지만 강렬한 삶을 살고 생을 마무리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면 작가가 세 살부터 20여 년의 시간을 보낸 집터가 나온다. 성인 서너 명만 들어가도 북적대는 아담한 공간이다. 한쪽 벽에 걸린 액자에는 <문학사상> 창간호 표지가 들어 있는데, 화가 구본웅이 1935년에 이상을 모델로 그린 <친구의 초상>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왼쪽 벽에는 액자 속의 이상이 무표정한 얼굴로 어딘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 그 오른쪽 책장에는 그가 발표한 작품의 지면과 전집, 선집, 연구서 등이 나란히 모여 있다. 이상이 살던 터에 그의 상징을 부지런히도 모았다.

 

다음 행선지는 근대와 현대를 잇는 동양화가 청전(靑田) 이상범이 거주하던 청전 이상범 가옥이다. 1929년에 지어진 이곳은 그가 생전 43년을 내리 거주하던 곳. 생을 마감한 1972년까지 집이자 화실인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가옥은 ㄱ자 안채와 ㅡ자 행랑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선 전형적이지만, 도시 한옥에서는 보기 드문 부엌의 찬마루가 눈길을 끈다. 찬마루에 걸린 현판엔 누하동의 선경(仙境)이라는 의미의 ‘누하동천’ 네 글자가 흐르듯이 써 있다. 오른쪽 대청에는 그의 가족이 사용하던 흑백 텔레비전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윗방을 지나 다음 방으로 건너가면 청전의 방. 그대로 방을 지나면 화실이다. 여기저기 책과 그림이 가득하고 붓은 잘 정리되어 가지런히 걸려 있다. 금방이라도 집주인이 돌아와 그림을 그릴 듯 잘 보존된 모습이다. 이곳은 작품을 만들고 후학을 양성하는 ‘청전화숙’으로도 운영됐다. 옥인동에 위치한 박노수미술관의 남정 박노수가 그의 제자 중 하나다. 서촌은 이토록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제 누하동을 벗어나 윗동네 누상동으로 가보자. 이곳엔 시인 윤동주하숙집을 있으니까. 1941년 그가 연희전문학교에 재학할 당시 하숙 생활을 하던 집터다. 아쉽게도 그가 거주하던 하숙집의 원형은 사라졌지만, 소설가 김송을 따라 하숙 생활을 하던 흔적은 이렇게 남아 있다. 후배 정병욱은 수필 <잊지 못할 윤동주>에서 윤동주가 4학년, 본인이 2학년으로 진급하던 때를 회상한다. 그해 5월 두 사람이 소설가 김송과 문학 담론을 나누던 공간의 터가 바로 이곳이다.

영감의 보고

동네엔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장소가 여럿 있다. 먼저 소개할 곳은 ofr 서울. 파리 마레 지구에서 서점으로 출발한 ofr 파리는 갤러리와 굿즈를 제작하는 스튜디오로에서 출판사로 영역을 확장하며 파리의 창작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아왔다. 그 공간이 서울 성수동에 분점을 냈고, 이곳 서촌으로 옮겨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단독주택을 개조해 만든 매장은 안으로 들어서면 구멍이 뻥 뚫려 무심하게 허물어진 벽과 불규칙하게 진열된 상품들이 시크한 프렌치 무드를 자아낸다. 불규칙적이고 자유로운 인테리어 덕분에 긴장감 없이 다양한 콘텐츠를 구경할 수 있다. 패션`디자인과 관련된 예술 서적은 물론, 양팔을 벌려야 양끝이 닿을 수 있는 커다란 아트 포스터, 여기에 ofr 로고가 박힌 다양한 에코백이나 굿즈까지. 오직 이곳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아이템으로 가득하다. 모든 요소가 마치 먼 곳에 여행이라도 온 듯한 착각을 일게 한다.

 

이 기분을 유지한 채 이라선으로 간다. 이라선은 사진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잘 알려진 사진 전문 편집숍이다.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사진집을 모아 공간을 꾸렸다. 뱅상 페라네, 멜리사 오샤너시 등 국내뿐 아니라 해외 유명 포토그래퍼들의 포트폴리오도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는 기발한 주제와 색다른 구도의 사진을 마음껏 탐닉해보자. 사진집이 공간에 예술가의 숨결을 불어넣고, 주인장은 사람들이 이곳을 제대로 느낄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한다. 은은하게 빛나는 스탠딩 조명이 공간에 따뜻함을 불어넣고, 디자인이 각기 다른 의자들은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사진집의 사진을 직접 보고 고를 수 있는 까닭에 사진을 좋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그렇게 근처를 배회하다 보안책방을 발견한다. 한국 근대문학의 거점이었던 보안여관을 중심으로보안책방, 프로젝트 공간 보안클럽, 전시 공간 보안1942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2층에 자리한 보안책방에서는 넓게 뚫린 창밖으로 경복궁이 그대로 내려다보인다. 깨끗한 흰 벽에는 큼직한 포스터가 다닥다닥 붙어 있고, 색색의 책들이 책상과 책장 위를 지킨다. 이곳 역시 예술가들에게 영감이 되어줄 만한 예술 서적들을 갖추고 있다. 책과 공간을 자신만의 방식대로 즐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곳을 지키고 있는 안내견 연두와도 마주치게 된다. 마치 서점 전체가 잘 관리된 하나의 갤러리 같다.

 

예술가와

술을 사랑한 예술가들이 많았다. 예술가에게 영감과 고통을 동시에 맛보게 한 압생트는 화가의 작품 속에 소재로 종종 등장하기도 했으며, 문인과 시인 등의 술에 얽힌 일화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풍류를 사랑한 예술가들의 동네에 왔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술 한잔 기울여도 좋을 일이다. 지속 가능한 생활양식을 소개하는 라이프스타일숍 서촌도감에서는 다양한 전통주를 발견할 수 있다. 장식장에 가지런히 놓인 낯선 이름의 전통주들은 애주가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 충분하다. 예쁘게 포장한 술은 만족감을 배가시키는데, 막걸리 복순도가는 고운 보자기에 싸인 그대로 가져갈 수 있다고. 서촌도감은 건축 그룹 스테이폴리오와 친환경 경영 솔루션을 디렉팅하는 ADBO가 함께 구성한 공간인 만큼 다양한 친환경 아이템을 만날 수 있다. 흙으로 빚은 다기와 비건 비누, 돌을 가공해 만든 인센스 홀더 등 천연·리사이클 제품들이 서촌의 감성으로 잘 배치되어 있다.

 

조금 이른 오후, 음악과 함께 한잔 술을 곁들이고 싶다면 서촌블루스로 향하자. 어둡고 가파른 계단을 따라 2층에 오르면 LP와 CD가 빼곡한 공간이 나타난다. 자리는 테이블과 바 좌석으로 나뉘어 있으니 취향대로 골라 앉으면 된다. 이곳은 옛날 LP바처럼 신청곡을 적어 내면 음악을 틀어주니 테이블 위 작은 메모지에 좋아하는 곡을 적어 DJ에게 신청해보자. 요즘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아날로그 감성을 그대로 느껴볼 수 있다.

분위기 잡고 술을 마실 요량이라면 으로 가는 게 좋겠다. 이곳은 2015년 월드클래스 칵테일 대회에서 우승한 임병진 바텐더가 한옥을 개조해 문을 연 칵테일 바다. 자리를 잡고 앉으면 먼저 간단한 스낵을 내어준다. 이곳에서는 전통주와 지역 특산물을 결합해 독특한 스타일의 칵테일을 선보인다. 천안의 호두과자와 거봉으로 만든 칵테일 ‘천안’, 여주의 화요와 땅콩을 여름 감성으로 풀어낸 ‘여주’ 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 전통주로 만든 칵테일을 맛보는 새로운 경험이 여정의 즐거운 마무리를 도와줄지도. 참고로 술을 주문하면 토치로 컵에 불을 붙여 물처럼 흐르게 하는 등 놀라운 퍼포먼스도 감상할 수 있다.

글. 유수아SOO-A YOO
사진. 김현민HYUN-MI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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