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EYS
ASAN // KOREA
짓고 담고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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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호
(왼쪽부터) 
온양민속박물관 구정아트센터의 나선형 계단.
거북선 형상의 구정아트센터.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중환이 전국을 유람하며 저술한 인문지리서 <택리지>에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가장 좋은 곳이다”라는기록이 있다. 여기서 내포는 가야산 둘레에 자리한 10개의 고을로 오늘날의 아산과 예산, 당진 등지를 가리킨다. 비록 기암괴석 등의 수려한 경치는 다른 지역에 비해 적지만 서쪽에는 바다가, 북쪽에는 아산만이, 동쪽에는 너른 평야가 자리하니 좋은 땅이라 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렀고 아산의 풍요로운 대지 위로 근사한 건축물이 여럿 들어섰다. 이곳 지형과 어우러진 건축의 조형미뿐 아니라 그 안을 채운 무수한 아름다움을 품으며, 어떤 마음이 모여 세워졌을지 생각에 잠긴다. 그렇게 가을날의 여정이 짙게 무르익는다.”

 


 

 

지혜는 시대를 초월한다,
온양민속박물관

 

온양민속박물관 본관 2층의 차경.

가을이 완연한 곡교천의 은행나무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온양민속박물관이다. 정문을 통과해 태극 문양처럼 휘어진 완만한 길을 걸어 오르다 보면 어느새 본관이 나타난다. 1978년에 개관한 박물관 건축은 여전히 역사적이며 현대적이다. 역사에 진심이라면 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무령왕릉을 자연스레 떠올릴 것이다. 벽돌의 색감은 물론 쌓는 방식까지 무령왕릉에서 영감을 얻었다. 긴 처마와 누마루에는 한국의 전통미가 배어 있다.

 

(왼쪽부터)
주변 풍경을 관망하듯 걷다 도착한 온양민속박물관 본관.
다양한 유물이 자연과 호흡하는 온양민속박물관 정원.

본관을 설계한 김석철 건축가는 국내에서 여러 박물관을 지었다. 그가 남긴 글에 따르면, 건축가로서 박물관과의 인연은 이곳의 설계를 맡으면서 시작된다. 그는 한국적 모더니즘 건축의 창시자라 불리는 건축가 김중업과 김수근, 두 거장에게 사사한 유일한 제자이다. 온양민속박물관 건축을 위해 그는 한 달 동안 유럽의 박물관을 탐방했다. 유명한 런던의 영국박물관, 암스테르담의 국립미술관, 파리의 퐁피두센터뿐 아니라 네덜란드 라이덴의 풍차박물관Molen De Valk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통신박물관처럼 전문 박물관도 방문했다. 이윽고 그는 박물관 건축 설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설립 목적과 컬렉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전시 기획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를 온양민속박물관의 설립자인 김원대 선생이 존중해준 덕분에 반년 넘게 건축 설계보다 전시 기획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선조의 얼이 깃든 일상의 유산이 그 가치가 제대로 밝혀지기도 전에 사라져갔다. 그 문화를 보존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민속품을 수집하고, 미래를 이끌어갈 이들이 우리 고유의 정신을 함양할 수 있기를 바란 김원대 선생의 뜻이 그렇게 세워졌다. 

 

온양민속박물관에서 전국 각지의 탈춤놀이를 만날 수 있다.

 

1층에서 동선을 따라 2층까지 상설 전시를 돌아보며, 온양민속박물관이 조상의 지혜를 온전히 담고 있음을 느낀다. 무수한 과거의 시간을 품은 이곳을 한 번 쓱 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여러 번 와서 공들여 찬찬히 살펴보고 싶다. 실생활과 밀접한 슬기로운 미감은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유물 중 옛 선비들이 먼 거리를 여행할 때 허리춤에 차고 다니며 물 마시는 데 사용한 표주박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텀블러보다 표주박을 들고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다. 재질과 꾸밈이 다양한데 세상에 이렇게 힙할 수가 없다! 민속이 고리타분하다는 인식이야말로 고리타분하다. 현재도 언젠가는 과거가 된다. 그렇게 일상은 역사로 거듭난다. 

 

품안에 문화유산

온양민속박물관이 소장한 공예 유물을 다양한 관점으로 포착한 도록 시리즈. 유물을 뒤집거나 확대하는 등 사진가가 여러 방식으로 재해석한 유물은 그 면면이 새롭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다각도로 유물을 살피다 보면 자연스럽게 선조의 지혜에 감탄하게 된다. 도록의 만듦새와 완성도가 훌륭해 소장 가치가 높으며 두고두고 보고 싶은 책이다. 현재 기능과 유희, 수납과 구조, 재료와 질감, 동물과 문양. 이렇게 네 편이 나온 상태이며 올해 두 권을 추가로 발간할 예정이다.

 


 

 

흙으로 빚은 조형,
구정아트센터

 

구정아트센터에서는 곧 야간 개장 프로그램 ‘자연의 경청’ 일환으로 루즈리프의 전시 <일상의 기록>이 열린다.

 

“건축은 인간에 대한 찬가이자 자연 속에서
인간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바치는 또 다른 자연이다.”
– 유동룡(이타미 준)

 

온양민속박물관 본관을 나서 석조와 너와집 등이 아늑하게 어우러진 정원을 천천히 둘러보다 마침내 구정아트센터에 닿는다. 김원대 선생의 호인 구정을 따서 이름 붙인 곳으로 현재는 주로 기획 전시가 열린다. 이곳은 세계적인 건축가 이타미 준이 우리나라에서 설계한 첫 번째 건축물로 1982년 개관했다. 이후 거의 20년이 지나서야 국내에서 그의 두 번째 건축물이 탄생했으니 어떤 비화가 있지 않을까 궁금했다. 본관과 마찬가지로 온양민속박물관의 김홍식 초대 관장과 건축가의 깊은 인연에서 비롯되었다고. 

재일 교포로 예명인 이타미 준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는 한국인으로서 긍지가 매우 강했고 평생 한국 국적을 유지했으며 끝내는 고국에 묻힌 유동룡이다. 대학생 때 홀로 국내 곳곳을 여행 다니며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된 그는 한국의 옛 건축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건축물이 세워질 장소의 고유한 지역성을 존중했다. 구정아트센터는 충무공이 성장한 땅이라는 지역의 상징성을 살리기 위해 지붕을 거북선처럼 만들었고, 아산 일대 풍부한 돌을 활용해 돌담도 조성했다. 현재는 일부 남아 있지만, 초창기 구정아트센터는 박물관 외부에서 건축물을 보는 방향으로 돌담을 쌓았고 전면부에도 약 1.2m 높이의 돌담을 두어 마치 돌 위에 건축된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의 딸인 유이화 건축가에 따르면, 이는 종묘를 본뜬 것이라고 한다. 바닥에 자연스럽게 돌을 깔고 그 위에 건축물을 지은 종묘를 보고 유동룡 건축가는 한국적이라고 생각했다고. 건축물의 주 외벽 재료인 황토벽돌은 도고에서 가져온 황토와 백회를 7:3 비율로 섞고 태양에 건조하는 과정 등을 거쳐 현장에서 직접 만든 것이다. 그렇게 그의 건축은 자연스럽게 아산에 뿌리내렸다. 

구정아트센터의 문을 열고 곧바로 정면의 홀로 들어간다. 시선이 거대한 두 원기둥을 따라 올라가며 타원형의 천장을 받치고 있는 촘촘한 나무 구조까지 이르자 거대한 함선 안에 있는 것만 같다. 건축으로 거듭난 거북선이랄까. 천장은 타원형이지만 발을 딛고 있는 바닥은 충청도의 가옥 구조처럼 미음(ㅁ)자형이다. 진흙 벽을 재현하려 직접 구운 벽돌처럼, 아산의 외암민속마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유동룡은 땅의 문맥을 추출해 사람의 온기를 담아 감동을 주는 건축을 추구했다. 구정아트센터 역시 그 철학을 잘 드러낸다. 땅의 지형과 바람의 노래가 들려주는 언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만하지만, 이곳에서 열리는 특별 전시 역시 각별하다. 올해 온양민속박물관이 펼치는 전시 주제는 ‘자연’이다. 9월 30일부터 10월 10일까지 이곳은 호주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 루즈리프Loose leaf(배원아와 찰리 로우러)가 아산의 풍경을 표현한 설치미술 작품으로 채워진다. 야간 개장하는 구정아트센터에서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다시 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윽하다.

 

(왼쪽부터)
카페온양의 스위트 리코타 플레이트와 레몬 민트 에이드.
카페온양 속 온양온천을 구현한 공간에 예술이 흐른다.

 

공존하는 시대,
아산공예창작지원센터와 카페온양

구정아트센터 근처 기다란 일자집은 아산공예창작지원센터와 카페온양이다. 창작센터는 규방 및 한지 공예에 특화된 곳으로 지역 예술 활성화를 위한 여러 작업이 이루어진다. 나막신의 테두리가 독특한 무늬로 재탄생하는 등 전통 소재에 현대적 디자인을 입힌다. 김원대 선생은 온양민속박물관을 설립하며 이곳이 교육의 장이 되기를 바랐다. 그 철학은 그대로 이어져 이곳에서 다양한 공예 워크숍도 열린다.

창작센터와 카페온양은 각 공간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임정주 디자이너가 소나무로 빚은 의자에 앉아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볕을 맞이한다. 빛에 따라 정원의 가을 풍경이 시시각각 달라진다. 달콤한 맛의 작품도 맞이한다. 스위트 리코타 플레이트는 구운 캄파뉴 빵에 초콜릿 잼과 리코타 치즈를 바르고 바나나브륄레를 올린 다음 정원에서 핀 꽃과 풀로 장식했다. 카페 속 작은 목욕탕 같은 공간은 삼국시대부터 역사를 이어 온 온양온천을 표현한 것으로 신진 혹은 지역 아티스트를 위한 팝업 스토어 등이 열린다. 전통 한지가 벽으로, 죽공예가 천장으로 또 다른 공간 속 공간을 구획하기도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친밀하게 소통하고 싶어 하는 온양민속박물관의 마음이 포근하게 느껴진다.

 


 

비추고 비치다,
모나무르

 

모나무르의 물의 정원 속 <시간의 흔적>은 밤이 되면 빛이 난다.

아산에서 나고 자란 한 소녀는 언젠가 고향에 행복을 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4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마침내 프랑스어로 ‘내(Mon) 사랑(Amour)’이라는 뜻의 복합문화공간 모나무르를 열며 그 꿈을 실현했다. 공사 과정에서 남은 콘크리트 구조물을 예술 작품으로 재생한 환경조형작가이자 모나무르 윤경숙 대표의 이야기이다.

이곳을 설계한 건축가 정효빈은 호수가 많은 아산의 지역적 특징과 아산의 전통 가옥을 두른 화강석 돌담에서 영감을 얻었다. 대지에 커다란 수공간인 ‘물의 정원’을 만들고 이를 중심으로 단층 건축물을 배치한 것. 건축물 사이에 콘크리트 벽과 돌담을 세워 독특한 동선도 그렸다. 대부분 경작지인 주변 환경이 건축과 동화할 만한 자연적 요소가 빈약하여 내부에 그 풍경을 만든 것이다.

 

(왼쪽부터)
갤러리 더 퍼플의 제1전시관에서는 목화솜으로 만든 작품이 상설 전시 중이다.
4개 동의 갤러리 더 퍼플 건축물 사이로 바오밥나무 형상의 작품이 보인다.

물의 정원에는 피라미드를 거꾸로 세워놓은 듯한 거대한 나무 형상 작품이 떠 있다. 생명의 근원을 탐구하는 최태원 작가의 <시간의 흔적>이다. 물의 정원은 이러한 조형뿐 아니라 하늘과 구름을 자연스럽게 담아낸다. 그러나 모나무르의 주 출입구인 컴플렉스 홀에서 출발한다면 물의 정원은 보이지 않는다. 2.3m 높이 차가 나는 지반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양옆으로 흐르는 벽천만이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곳 너머에 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그리고 45m 길이의 길을 따라 마치 수면 아래에서 위로, 물을 가르는 듯한 경험을 감각한다. 물소리가 휘감은 이 길의 끝에 이르면 비로소 물의 정원을 한아름 품을 수 있다. 길은 4개 동으로 이루어진 갤러리 더 퍼플의 한 틈으로 이어진다. 갤러리로 둘러싸인 중정에는 바오밥나무 형상의 작품이 우뚝 서 있다. 모나무르의 건축을 구성하는 주재료는 노출 콘크리트지만, 4개의 갤러리 더 퍼플은 스테인리스스틸 판넬로 지었다. 은은하게 반사하는 물성은 주변의 풍경을 건축물에 투영한다. 울룩불룩한 표면은 물결 치는 수면을 표현한 것 같은데, 실재하는 물이 반영되면서 자연과 건축이 감응한다.

모나무르 여정의 종착지는 갤러리 카페 더 그린이다.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 지나온 모든 길과 공간이 한눈에 보인다. 9월 30일부터는 갤러리 더 퍼플과 갤러리 카페 더 그린에서 각각 새로운 전시가 개최된다. 10월 11일에는 개관 3주년 기념으로 수변무대에서 다양한 공연도 열릴 예정이라고. 이날 방문하면 모나무르에서 준비한 작은 선물을 받을 수 있다. 결혼식이 거행되기도 하는 모나무르, 누군가는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큰 선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산꼭대기를 완성하다,
영인산산림박물관

 

(왼쪽부터)
영인산에 살았던 여름 철새, 팔색조. 
산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영인산산림박물관. 

 

해발 364m 영인산은 높지는 않지만 가파른 편이다. 예로부터 산이 영험하다고 하여 영인산으로 불렸다. 영인산자연휴양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30분 정도 산을 오르자 뜻밖에 영인산산림박물관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산속에 박물관이라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건축적 의미를 톺아보면 꽤 자연스럽다. 박물관이 들어선 부지는 이미 어떤 이유에서인지 꼭대기가 잘려나간 듯이 부자연스러운 지형으로 변질된 상태였다. 이에 이종호 건축가는 원래 이곳의 모습이 어땠을지 상상했다. 평평하지 않았을 지극히 자연스러운 산봉우리의 형상을 생각하며 건축을 통해 정상을 새롭게 복원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니까 영인산산림박물관은 산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다.

3개의 전시실로 구성된 본관에서는 아산에서 자생하는 식물을 분포하는 지역별・용도별로 분류한 표본과 영인산에 살고 있는 새의 박제를 만날 수 있다. 곤줄박이와 호랑지빠귀 등 전시된 새는 모두 영인산에서 자연사 상태로 발견된 것이다. 별관에서는 직접 여러 식물의 향을 맡거나 숲속에서 들리는 고유한 소리 그리고 자연의 색채 등 산이 발산하는 긍정적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탁 트인 전망대에 이르면 아산 시내의 풍경과 영인산 정상이 보인다. 박물관을 둘러본 후 가파른 길을 따라 시련과 영광의 탑, 깃대봉을 지나 영인산의 정상인 신선봉으로 향한다. 정상에 서서 삽교천으로 흐르는 곡교천의 물길과 삽교호, 아산만방조제 그리고 서해 바다를 한눈에 담는다. 지금 발을 딛고 서 있는 영인산의 정상에서 영인산산림박물관이 이룩한 산봉우리도 바라본다. 

 

같은 건축가 또 다른 건축물,
충무공이순신기념관

 

반대편에서 바라봐야 비로소 건축물임을 인지할 수 있는 충무공이순신기념관.

 

현충사에 들어서면 푸른 봉분이 보인다.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며 정체가 궁금해지는 찰나, 충무공이순신기념관임을 알리는 글귀를 발견한다. 영인산산림박물관을 설계한 이종호 건축가가 이 기념관도 지었다. 잔디를 입힌 언덕 모양의 두 건축물 속에 흙벽으로 이루어진 전시동이 안겨 있는 형상이다. 전통 건축인 현충사와 현대 건축인 기념관이 어우러지도록 자연 지세를 최대한 살려 건축했다. 지상 1층, 지하 1층으로 이루어진 전시관에는 충무공 관련 유물과 임진왜란 당시 해전 사료가 전시되어 있다. 상설 전시 외 특정 주제에 관한 기획 전시도 열린다. 3D 영상과 움직이는 의자를 갖춘 4D 체험 영상실에서 노량해전과 명량해전 등의 콘텐츠를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다. 

 

 

현충사에서 아산의 전경이 펼쳐진다.

 


 

고요하고 거룩하다,
공세리성당

 

공세리성당의 본당과 문지기 나무라 불리는 팽나무가 나란하다.

 

아산과 평택을 잇는 아산만방조제 가까이 자리한 공세리성당. 주위의 논밭은 조선시대까지 큰 배가 드나들 만큼 바닷물이 들어찼던 곳이었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커다란 배 모형을 마주하며 새삼 직접 겪지 못한 과거의 풍경이 겹쳐진다. 뱃머리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이 걸려 있다.

공세리성당의 역사는 18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프랑스에서 온 에밀 드비즈 신부가 신풍산 자락에 설계한 고딕 양식의 성당을 봉헌한 것은 1922년 10월 8일이었다. 성당의 윤곽선을 지긋이 따라가다가 마치 가을의 색감을 채운 듯한 풍경에 이른다. 외벽에는 붉은 벽돌을, 버팀벽에는 회색 벽돌을 쌓아 만든 성당의 꼭대기엔 뾰족한 종탑이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중세시대 파리에서 시작되어 유럽으로 널리 퍼진 고딕 양식으로 지었지만, 토착 자재인 회흑색 전돌을 사용하여 우리 정서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고딕 성당을 짓기 전 드비즈 신부는 직접 한옥 성당을 설계하기도 했다. 기와지붕과 흙벽 그리고 마루로 이루어진 전통 한옥이었다고 한다. 드비즈 신부가 설계한 옛 사제관이자 현재는 박물관에 약도 등의 자료만 남아 있는 것이 아쉽지만, 이후 고딕풍 성당을 지으면서도 한국적 요소를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 인상 깊다.

성당 옆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약 370년 수령의 팽나무가 지키고 있다. 25m 높이로 뻗은 나무의 아름드리 자태는 성당과 완연한 조화를 이룬다. 성당 내부에 들어가자 색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이채로운 빛 사이로 누군가 홀로 기도를 하고 있다. 공세리성당은 신유박해와 병인박해 당시 아산 지역 출신 순교자들을 모신 성지이기에 나 역시 경건한 마음가짐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유심한다. 여러 그루의 보호수뿐 아니라 수많은 고목이 드리운 성내를 천천히 돌아보며 고결하고 숭고한 정신이 밀려온다. 

 

박물관에는 에밀 드비즈 신부가 공세리성당에서 35년간 쓴 서한집이 전시되어 있다.

여행으로 맞이하는 100주년

올해 본당 건축 100주년을 맞은 공세리성당에서는 충청남도와 아산시가 주최하는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일명 2022 생생문화재 둘러보‘공’ 놀아보‘세’. ‘내 손안에 역사 가이드 놀토’ 앱을 다운로드하면 자세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기념품으로 공세리성당 건물 모양의 아기자기한 배지를 선물하는 등 추억은 배가 된다.

 


 

저수지의 기암괴석,
아레피

 

석양이 아름답게 물든 하늘과 빛을 입은 건축물이 조화를 이룬다.

아산에는 40여 개의 저수지가 있다. 대부분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용도이며 동시에 낚시터의 역할을 겸하기도 한다. 주로 낚시꾼이 찾던 아산의 저수지에 올해부터 지각변동이 예고된다. 영인상성저수지가 낚시가 아닌 다른 이유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들어선 ‘Asan levee Coffe(아산 제방 커피)’의 줄임말인 아레피ALEFFEE 덕분이다. 아산에 새로운 복합문화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유형노 대표의 의뢰를 받은 곽희수 건축가는 처음에 그저 둑방을 걷기만 했다고 한다. 한쪽은 저수지, 한쪽은 경작지인 둑길을 따라 탁 트인 하늘과 야생의 풀을 마주했다고. 그렇게 영인산과 저수지 그리고 경작지가 건축물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아레피가 탄생했다.

 

 

(왼쪽부터)
액체질소로 우유크림을 얼린 아레피의 독특한 빙수, 클라우드 화이트.
아레피 건축물의 편 날개에는 계단식으로 평상이 펼쳐진다.

주변의 풍광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중성적인 회색의 노출 콘트리트 건축물은 양쪽에 일명 날개가 달렸다. 둑방 방향으로 편 날개는 둑길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반대 방향의 날개는 접혀 있는 형상이다. 땅과 건축물을 자연스럽게 잇는 두 날개의 경사면은 모두 계단식 평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발을 벗고 잠시 평상에 자리를 잡는다. 편안하다. 파라솔 그늘에서 시원한 가을바람을 느낀다. 찬 공기가 밀려올 때쯤에는 내장된 온돌 위에서 감도는 온기를 느끼며 고유의 풍광을 담을 수 있겠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자주 등장한 평상은 이곳에서 고전적인 기능을 넘어선다. 아레피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좌측 벽면의 화면 속에서 흘러나오는 곽희수 건축가의 평상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우리에게 내재된 민속적 관념이나 요소를 건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건축의 법적 한계나 편견을 전통이나 조상의 지혜를 통해서 깰 수 있기도 합니다.” 

 

(왼쪽부터)
층고가 열려 있어 3층에서도 1층까지 조망할 수 있다.
루프톱에서 바라본 3층의 야외 공간 그리고 영인산과 저수지.

3층 구조로 이뤄진 내부는 공간이 모두 열려있다. 공간의 한가운데를 비우고 통유리창으로 연결된 창가에 탁자와 의자를 주로 배치했다. 커피와 디저트를 즐기며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오랫동안 시선이 머문다. 해가 질 무렵에는 루프톱에 올라 영인산 너머 곱게 물든 노을을 바라본다. 다시 3층으로 그리고 2층으로 내려와 접힌 날개 공간으로 나간다. 콘크리트 벽에 타원형 타공 면이 눈에 띈다. 이는 곽희수 건축가만의 표식으로 기암괴석을 건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자연 암석은 물의 흐름이나 풍화작용 등에 의해 다양한 형태의 구멍이 뚫리는데, 그 기묘한 아름다움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했다. 1751년에 쓰인 <택리지>에는 비록 아산은 기암괴석 같은 수려한 경치가 다른 지역에 비해 드물다고 했지만, 270년이 지난 지금 건축적인 기암괴석이 아산에 유려한 미감을 자아낸다. 이렇게 아산의 대지는 새롭게 깨어나고 있다.

 

풍요로운 아산 산물

아레피는 지역 농민과의 상생을 위하여 계절에 따라 아산의 산물로 시그너처 메뉴를 개발하고 있다. 기존의 아산 쌀 라테는 라이스 슈페너로 재구성 중이다. 쌀 농축액과 우유 베이스의 디카페인 콜드브루에 식물성 크림을 얹고 그 위에 직접 구운 쌀을 올린다. 카페인 부담 없이 커피를 즐길 수 있는 동시에 ‘아산 맑은 쌀’의 고소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 도고의 대파로 만든 피자는 훈연을 입힌 채로 나간다. 마술 부리듯 돔을 열면 그 안에 가득 찬 훈연 연기가 점차 흩어지며 볶은 대파를 토핑한 피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외에도 쪽파, 토마토, 포도, 배 등을 활용한 친근한 메뉴로 아산의 맛을 널리 알리고자 한다고.

 

글. 김민주MIN-JOO KIM
사진. 김현민HYUN-MI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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