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EYS
THE SECRET LIFE OF SAKE
은근하게 즐기는 사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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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호

 

“인파가 붐비는 도쿄의 바부터
고요한 산 아래 양조장까지,
사케는 일본의 문화와 삶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

 

사케신주쿠에 있는 오모이데요코초Omoide Yokocho는 바와 꼬치 전문점이 늘어선 먹자골목이다.

알코올 도수가 15~20도 정도인 사케는 와인처럼 가볍게 즐기기 좋은 술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나는 도쿄의 어느 34층짜리 호텔 7층에 힘없이 널브러진 채 이 사실에 의문을 제기한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니 남은 27개 층이 내 이마를 짓누르고 있는 듯하다. 사케를 마시고 난 뒤의 숙취는 상상 이상이다.

사케는 일본의 일부다. 전국에서 맵쌀로 청주인 사케를 빚어낸다. 조금 더 나아가면 일본의 역사가 사케 안에 녹아들어 있다. 하지만 여행자가 사케를 이해하기란 어쩌면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일례로 일본에서는 사케를 사케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니혼슈nishonshu, 즉 일본의 술이라고 부릅니다.” 약 14시간 전 지금보다 정신이 맑았을 때 류조Ryuzo에게 들었던 설명이다. 나의 오랜 친구인 류조는 사케에 일가견이 있는 주당이다. 우리의 지난밤은 가라오케가 내려다보이는 고질라 조형물 옆 신주쿠 골목에서 시작됐다.

도쿄 나이트 라이프의 중심지인 신주쿠는 어리숙한 여행자를 대상으로 온갖 장사를 하곤 한다. 다행히 나는 토박이인 류조를 따라 마음 놓고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그는 눈에 띄게 화려한 바들을 지나 칙칙한 사무실 건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류조는 비품실 문처럼 허름하게 생긴 문을 활짝 열었다. 흘깃 지나친 문 옆에는 ‘NO SAKE, NO LIFE(사케가 없으면 인생도 없다)’라고 적힌 표지판이 놓여 있었다. 

쿠란드 사케 마켓Kurand Sake Market은 도쿄에 위치한 소규모 사케 전문점 중 하나다. 류조와 나는 사케를 90분 동안 제한 없이 마실 수 있는 티켓을 구입했다. 깔끔하게 단장한 채로 바에 앉아 있는 젊은 손님들을 둘러보면서 나는 만약 이처럼 제한 없는 술집이 영국에 있다면 어떤 난장판이 벌어질지 상상해 본다.

 

신주쿠의 번화가.

현시대에 접어들면서 사케는 사양길을 걸어왔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일본은 서방을 향해 두 팔을 벌렸고 그 무렵 술 창고도 함께 개방했다. 그러자 일본 내에서 와인과 맥주가 성행했고 사케를 찾는 이는 줄어들었다. 그렇게 약 30년 동안 사케 양조장의 절반이 사라졌다. 그런데 최근 들어 사케가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류조는 이 같은 현상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수제 맥주의 영향이라고 말한다. 덕분에 공장에서 만드는 대량생산 술은 입지가 줄어들고, 독특한 라벨과 현지식 가미를 내세운 수제 사케 양조장이 다시 떠오르는 중이다.

쿠란드 사케 마켓에서는 ‘그런’ 수제 사케가 즐비하다. 갑자기 사케를 보관해둔 냉장고 문이 열리면서 차가운 바람이 몸을 휘감는다. 마치 술의 나니아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다. 사케의 종류는 무궁무진하다. 담백한 것, 과일 향을 머금은 달큼한 것, 초보자를 위한 것과 전문가를 위한 것 등. 그리고 ‘개는 사케를 팔고, 고양이는 사케를 만든다’라고 적힌 다소 엉뚱한 사케도 있다.

90분이 시작됐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일본 전국 일주에 나선다. 히로시마에서 온 부드럽고 향긋한 사케에 이어 도호쿠 지방의 설산에서 만든 깨끗한 사케를 들이켠다. 45분이 지날 즈음에는 요거트처럼 걸쭉하게 흐르는 새하얀 사케를 마신다. 사케는 모든 감각을 일깨운다. 차갑고 뜨겁고 달콤하고 짭조름하고 속을 은근하게 데워준다. 

금세 90분이 흘러 우리는 신주쿠 거리로 다시 나온다. 이후 일어난 일들은 모두 다음 날 아침 영수증을 보고 나서야 기억해낼 수 있었다. 도쿄는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도시다. 다채로운 사케, 측정하기 어려운 데시벨, 수억 개의 전광판 등이 혼을 쏙 빼놓는다. 

그날 밤, 철로 아래 있는 작은 바에서 다시 사케를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치 고질라 조형물이 살아나서 건물을 파괴하는 것처럼 머리 위로 지하철이 요란하게 지나가고 유리잔이 요동쳤다. 초고층 건물 꼭대기에 있는 바에서 가로등이 불씨처럼 깜빡이는 모습을 보며 사케를 마시기도 했다. 하늘 높은 곳에서 맛본 사케는 하늘에 날려버리고 싶은 계산서를 남겼다. 

그 후 류조는 지하철 막차를 타고 집으로 갔고, 나는 자판기에 말을 걸거나 비둘기한테 노래를 불러주는 등 취기를 잔뜩 드러내며 도쿄의 거리를 걸었다. 내가 느낀 감정은 ‘기분좋은 혼란’에 가까웠다. 대체로 기분이 좋긴 한데,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와 사케의 관계도 그렇다. 잘해야 20%, 혹은 15% 정도만 이해한다. 

 

Caption

깊숙한 시골로


누군가 사케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도쿄를 떠나야 한다고 말해줬다. 수도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길은 한적했고 점차 푸른 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의 시골은 두 가지 인격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땅에는 자그마한 마을과 강과 기차가 있고, 하늘에는 구름에 둘러싸인 사원이 자리한다. 21세기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모양새다. 사케는 일본 시골의 지형이 만들어낸 술이다. 논에서 자란 쌀과 산에 흐르는 물로 빚어졌다.

“사케는 삶의 한 부분입니다. 생일과 결혼식 그리고 장례식에도 빠지지 않죠.” 고이치 하세가와Koichi Hasegawa가 말한다. 그는 도쿄에서 북쪽으로 이동할 때 첫 번째로 등장하는 마을인 치치부에 있는 부코 슈조Buko Shuzo 양조장을 13대째 운영해 오는 중이다. 이 양조장은 기둥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200년 된 건물 안에 들어서 있다. 고이치는 마치 승려 같은 헌신과 진지한 태도로 이곳을 이끌어가고 있다. 

내가 부코 슈조에 방문했을 때는 막 가을 추수를 끝내고 겨울 양조가 한창일 시기였다. 그래서 일꾼들이 술을 섞을 때 쓰는 거대한 막대기를 들고 걸어 다니는 모습을 종종 목격하곤 했는데 마치 길을 잃은 곤돌라 사공처럼 보였다. 사케를 만드는 과정을 이해하려면 학창 시절에 배운 화학 공식을 떠올려야 한다. 먼저 커다란 통에서 쌀을 쪄내고 물, 이스트, 코지koji라는 누룩을 넣은 뒤 섞는다. 그리고 며칠 동안 그대로 발효시킨다. 치치부의 물로 만든 사케는 드라이한 카라쿠치karakuchi로 분류되는데, 주로 도자기 컵에 따라 마시곤 한다.

“사케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죠.” 하세가와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사케를 마시지 않고 백 번 만나는 것이 사케를 마시며 한 번 만나는 것보다 못하다’라는 말도 있어요.”

나는 그에게 사케와 와인 사이에 공통점이 있는지 물었다. 사케에 와인처럼 옛 추억을 상기시키는 특별한 요소가 있는지 궁금해서다. “사케는 오래 보관하기 어려운 술이에요. 사케 양조업자는 전해에 만든 술을 다시 사용하지 않아요. 더 나은 사케를 만들려고 하죠. 과거에 연연하지 말아야 해요. 오로지 지금이 중요합니다.”

사케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 술은 주로 사원과 사당에서 빚어졌고 지금도 일본의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도맡고 있다. 어떤 이들은 사케를 마신 뒤 몽롱해진 상태가 이승을 초월하여 신과 대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순례자들은 사원에 들어가거나 신성한 산에 오르기 전 사케로 몸을 정돈하기도 한다고.

 

(왼쪽부터)
부코 슈조에는 사케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전용 우물과 샘이 있다. 
부코 슈조 양조장의 사케. 

 

“사케는 초자연적인 액체라고 생각해요. 처음엔 신의 말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됐거든요.” 치치부 남쪽 가와구치 호수 근처에서 21대째 이데 사케Ide Sake 양조장을 운영해온 요고에몬 이데Yogoemon Ide가 이야기한다. 양조장 지붕 너머로 후지산이 보이는 덕분에 이곳에서 생산된 사케에는 후지산이 그려진 라벨이 붙어 있다. 무엇보다 일본에서 가장 높고 신성한 산에서 흘러온 물이 양조장의 샘을 채운다. 이 물이 후지산의 돌 사이로 여과되어 양조장까지 흘러 들어오는 데 무려 40년이 걸린다. 치치부와 달리 이곳의 사케에서는 달콤한 향과 진한 맛이 난다. 요고에몬은 그 향과 맛이 화산 주변의 춥고 거친 기후에 대한 보상이라고 여긴다. 

“완성된 사케를 통해 해당 지방에 대해 추측할 수 있어요. 현지 물과 쌀로 만드는 사케야말로 그 지역의 문화를 응축한 것이나 다름없죠.” 이데는 다양한 등급의 사케를 내놓으면서 사케가 어떻게 일본 사람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이뤄왔는지 이야기한다. 애주가들은 모내기를 시작하는 봄에 벚꽃나무 아래에서 사케를 마시며 술잔에 떨어지는 분홍색 꽃잎을 보고 사색한다. 가을이 되면 그들은 보름달이 비친 술잔을 기울이며 인생의 마지막을 논한다. 

양조장 밖으로 나와 후지산을 올려다보니 사케의 재료가 한눈에 담기는 듯하다. 산비탈의 부드러움, 산 정상에 쌓인 눈의 순수함,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청명함. 이 모든 것 이 사케의 맛으로 연상된다. 

 

(왼쪽부터)
이데 사케 양조장 중앙에 자리한 에도시대 가옥.
이데 사케 양조장을 운영하는 요고에몬 이데.

 향긋한 사케 양조장 5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각자의 사케 맛을 이어오다.

 

이데 사케 양조장

후지산으로 향하는 여행자가 잠시 들르기 좋은 곳. 이 양조장에서는 사케 제조 과정과 일본식 정원을 살펴보는 투어를 제공한다. 또한 여행자들은 1인당 5000원 정도에 네 등급의 사케를 시음해볼 수 있다. 양조장 안 숍에서 최상급 사케인 다이긴조를 기념품으로 구입해도 좋다. kainokaiun.jp

 

부코 슈조

웹사이트에서 예약할 경우 치치부 중심에 자리한 이 양조장에서 무료 투어가 가능하다. 사케 입문자에게는 양조장 안 숍에서 판매하는 치치부 유자Chichibu Yuzu 사케를 추천한다. 가격은 약 1만5000원. bukou.co.jp

 

마쓰오카 양조장

마쓰오카Matsuoka 양조장은 치치부산에서 내려오는 풍부한 물을 적절히 사용한다. 숍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제품은 일본 서부에서 생산한 쌀로 만든 향기로운 다이긴조(약 12만원). 투어는 영어로도 진행하며, 사전 예약 시 무료로 참여할 수 있다. mikadomatsu.com

 

도쿄항 양조장

약 100년 동안 생산을 중단했다가 최근에 다시 문을 연 도쿄항Tokyo Port 양조장은 도쿄 시내에 자리한 몇 안 되는 양조장 중 하나다. 이곳에서는 도시의 수돗물로 사케를 만든다. 평일 저녁에는 양조장 밖에 사케를 시음하는 작은 매대가 문을 연다. 매실주를 약 2만5000원에 구입할 수 있다. tokyoportbrewery.wkmty.com

 

이시가와 양조장

19세기 창고를 탈바꿈한 이시가와Ishikawa 양조장은 도쿄 북서쪽 끝에 위치한다. 타마지만 사케뿐아니라 수제 맥주도 현장에서 빚는다. 투어는 무료이며 영어로 진행한다. tamajiman.co.jp

 

 TRAVEL WISE 

항공편

인천공항에서 도쿄공항까지 에어서울, 아시아나항공, 제주항공, 피치항공, 일본항공 등이 직항편을 운항한다. 약 2시간 30분 소요되며, 항공편마다 스케줄이 다르니 웹사이트를 참고하자. flyairseoul.com, flyasiana.com, jejuair.net, flypeach.com, jal.co.jp

 

머물 곳

이코이 노 무라 헤리티지 미노야마Ikoi no Mura Heritage Minoyama에서는 일본식 또는 서양식 객실에 묵으며 치치부 인근 산을 조망하거나 온천욕을 즐길 수 있다. 1박에 12만원부터. ikoinomura-minoyama.jp
가와구치 호수 풍경을 감상하고 싶다면 이데 사케 양조장 근처, 언덕 위에 있는 라쿠유 후지카와구치코로 향하자. onsenrakuyu.hotels-fujikawaguchiko.com


현지 둘러보기

사케 소믈리에인 사토코 우쓰기Satoko Utsugi가 1인당 9만원에 도쿄에서 야간 사케 투어를 진행한다. airbnb.co.kr
사케 투어스에서 북부 니가타Niigata 지역으로 가는 투어와 교토 남부 미에Mie, 와카야마Wakayama로 가는 투어를 1인당 399만원부터 제공한다. saketours.com

글. 올리버 스미스OLIVER SMITH
사진. 마크 패런 테일러MARK PARREN TAYL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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