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탈루냐의 수도 곳곳을 연결하는 미로 같은 거리를 탐색하며, 열정을 쏟아 만든 창의적인 칵테일과 전통 타파스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비밀스러운 바의 세계로 들어간다.
한 손엔 여행 책자를, 다른 한 손엔 스마트폰을 쥔 단체 관광객이 언제든지 사진 찍을 준비가 되었다는 태세를 갖춘 채 그라시아 거리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모더니즘 건축양식의 대가들은 이 고풍스러운 가로수길에 최고의 걸작을 남기면서 중세 시대에 머물러 있던 150년 전의 바르셀로나를 공간과 질서 그리고 창조의 시대로 이끌었다.
그중에서도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가 설계한 무지갯빛 유리 모자이크 외관에 놀랍도록 정교한 구조로 지어진 카사 바트요Casa Batlló와 석회암 외벽과 넓은 실내 공간으로 구성된 카사 밀라Casa Milà가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20세기 초반, 우월 의식에 사로잡힌 부유한 가문들이 의뢰한 이 건물들은 건축가들의 의도대로 확연히 눈에 띈다.
에샴플레Eixample 지구 인근 부촌에 도착한 나는 조금 다른 부류의 예술성을 찾고 있다. 바르셀로나의 바들은 으레 연상되는 쾌락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좀 더 진지하게 본질에 접근한다. 고리타분한 관행을 따르지 않는 자세와 대범한 혁신, 디테일의 향연은 모더니즘 정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시절과는 큰 차이가 있다. 지금은 눈에 띄는 것보다 비밀스러운 것을 더 선호하므로.
그라시아 거리에서 서쪽으로 세 블록 떨어진 평범한 주택가에 있는 더 알체믹스The Alchemix 입구는 해가 지기 전까진 그라피티가 그려진 철제 셔터 너머에 숨어 있다. 그리고 내가 막 도착했을 때는 은단풍나무 사이로 지는 해의 마지막 햇살이 비추고 문밖에는 이미 몇몇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손님들은 마치 극장 입장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어찌 보면 비슷한 상황이긴 하다.
바 안에서는 주인장인 이그나시오 우시아Ignacio Ussía와 에스토니아 출신 바텐더 에릭 바그멧Erik Bagmet이 칵테일 셰이커를 묘기하듯 돌리고 높은 데서 따르고 섞는 퍼포먼스를 통해 화려한 창조물을 만들고 있는 중이니까. 바에 일렬로 앉은 손님들은 이러한 광경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다.
이 바에는 무려 10여 가지의 독창적인 칵테일이 있다. 건장한 몸에 카키색 앞치마를 두르고 해적같이 수염을 기른 이그나시오가 내게 취향을 물어본 뒤 화이트 트러플 피스코 사워를 권한다. 포도 증류주인 피스코 케브란타, 레몬즙, 화이트 트러플 꿀, 술의 일종인 아마르고 춘초Amargo Chuncho, 그리고 화이트초콜릿을 혼합해 만든 향이 진하고 부드러운 질감에 달콤한 맛의 칵테일을 목이 긴 스템 글라스에 따라준다.
2018년 3월에 문을 연 더 알체믹스의 탄생기는 파란만장하다. 그때는 카탈루냐의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를 거부한 마드리드에 반기를 든 독립운동가들이 도시 곳곳에서 방화를 저지르던 시기였다. “쓰레기통과 자동차에 불을 질렀어요. 저녁 7시 반에 영업을 시작하자마자 바로 문을 닫은 적도 있었죠.” 이그나시오가 그때를 회상하며 말한다. 그는 카탈루냐의 독립에는 관심이 없지만, 세상과 동떨어진 자신의 독립된 바를 사랑한다. 다른 바와는 달리 은밀하게 운영되는 이곳은 걷다 보면 그냥 지나칠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로 인해 손님들의 방문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이그나시오가 말한다. 다음 목적지로 가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카탈루냐의 선구자 일데폰스 세르다Ildefons Cerdà가 19세기 중반에 격자 구조의 에샴플레Eixample(단어 그대로 ‘확장Expansion’이라는 뜻) 지구를 설계하면서 지상층에서 시야와 공간감을 높일 수 있는 기발한 방법을 고안했다. 바로 거리 모퉁이의 모서리를 잘라서 도시의 모양을 팔각형으로 만든 것. 그라시아 거리 안쪽, 경사진 모서리 맞은편에서 바르셀로나의 또 다른 최고의 바이자 최악의 이발소를 발견할 수 있다.
바비스 프리Bobby’s Free에 들어가 두꺼운 가죽 이발소 의자에 앉으니 몸이 거울을 향해 휙 돌려진다. 카운터에는 가위, 빗, 셰이빙 브러시 등이 줄지어 있다. 납작한 모자를 쓴 이발사의 반짝이는 눈빛만이 이곳에 다른 비밀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이 눈썹을 치켜뜬다. 나는 정답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대부님”이라고 말한다. 호텔 컨시어지로부터 겨우 알아낸 암호를 들은 이발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몸을 숙여 스위치를 누른다. 서랍, 카운터, 이발 도구가 있던 유리로 된 벽 전체가 열리면서 1930년대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한 세기 전, 금주령이 시행된 미국의 엄격한 통제 속에서 생겨난 비밀스러운 공간인 주류 밀매점에서 주인과 손님들은 항상 적발에 대한 두려움에 떨었다. 오늘날 그러한 위험은 사라졌지만 범법 행위가 가져오는 전율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지하’ 공간이 바로 그렇다. 짧은 계단을 내려가면 어둑한 조명 아래 활기찬 분위기의 내부가 펼쳐진다.
빨간 멜빵과 중절모를 착용한 직원들이 테이블 사이를 유영하며 진토닉을 비롯해 맞춤형 칵테일을 내온다. 어떤 칵테일은 휴대용 금고에 담겨 서빙되기도 한다. 윌리처 일렉트릭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부른 레이 찰스의 음악이 보이지 않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 이곳을 발견한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웃음 짓는 젊은 남자가 박자 따위 무시한 채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치며 분위기에 심취해 있다.
바 너머에서 소피아 다나노Sofia D’Agnano가 현란한 솜씨로 칵테일을 만들고 있다. 낮에는 사진작가로 일하는 이 젊은 이탤리언 바텐더는 실내의 기운을 빨아들이며 자신만의 활기를 만들어낸다. 음악이 고조되고 동료 바텐더가 바 뒤를 가로지르면서 천장의 펜던트 조명을 밀어낸다. 바가 우윳빛으로 덮이자 조명을 받은 얼굴이 환하게 빛난다.
음악 소리 틈으로 목소리를 높인 소피아가 자신이 좋아하는 매력적인 바들이 도시 전역에 있다고 설명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분위기라고 할 수 있죠.”
미로 속으로
중력처럼 거스를 수 없는 이끌림에 몸을 맡긴 채 도시의 해안선으로 향한다. 바르셀로나는 우리를 구시가지와 시우타트 베야Ciutat Vella의 기분 좋은 번잡스러움으로 이끈다. 바리고틱Barri Gòtic 지구와 엘보른El Born 지구의 미로 같은 골목에는 가볍게 지나가려는 여행자의 발걸음을 붙잡는 것들이 있다.
작은 바인 라 플라타La Plata는 1945년부터 바리고틱 지구 해안가 모퉁이에서 눈에 띄지 않게 영업을 이어오고 있다. 파란 바탕에 은색으로 글씨를 적어 바닷속의 고등어처럼 보이는 표지판은 몬세라트Montserrat 산에서 채석한 돌로 만든 두꺼운 건물 외벽과 대조를 이룬다. 파란색 타일로 정교하게 장식된 ‘ㄴ’ 자 모양의 바에서 페페 고메스Pepe Gómez가 67년 인생 중에서 52년 동안을 그리해왔듯 진두지휘하고 있다.
문을 연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도착한 나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라 플라타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선택지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구원과도 같은 곳이다. 이곳의 메뉴는 변하지 않는데, 네 종류의 간소한 타파스와 대구 치어Pescaditos 튀김, 카탈루냐식 부티파라Butifarra 소시지가 있다. 레드나 화이트, 로제 와인을 주문하면 바 뒤에 고정된 세 개의 와인 통에서 작은 병에 옮겨 담아 준다. 모든 메뉴가 저렴해 몇 유로를 넘지 않는다. 작은 강아지를 데리고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단골에게 음식을 내어준 페페가 나에게 지난 세월을 회상하며 말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현지 주민들이 주로 찾아왔지만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치른 이후엔 찾아오는 손님들의 국적이 다양해졌다고. “사람들이 단순한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 바를 ‘데 토다 라 비다de toda la vida(평생의)’ 바라고 부르죠. 변하지 않고 전통을 유지하는 곳이에요.”
라 플라타에서 몇백 미터 떨어진 파라디소Paradiso는 이와 반대되는 곳이다. 2015년에 문을 연 이후 가공육 상점으로 위장한 이 주류 밀매점은 세계적인 대회의 상들을 휩쓸었으며 세계 곳곳에 팝업 스토어를 열고 두바이에 지점도 냈다.
“스페인을 여행하다
마침내 바르셀로나에 도착하는 것은
고급 레드 와인을 마신 다음
샴페인 한 병으로 마무리하는 것과 같다.”
- 미국 작가 제임스 미치너James A Michener
‘널리 알려진 비밀스러운 바’라는 말은 역설적이지만,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상점 카운터 옆의 거대한 냉장고 모양을 한 은밀한 입구를 통해 들어간다. 그곳에서 마주하는 연한 황금색 장식과 원목으로 꾸민 실내는 부담스럽지 않고 멋스럽다. 이곳을 찾은 세련된 옷차림의 손님들은 감성적인 음악에 맞춰 분위기를 즐기고 있다.
열대우림을 누비는 표범이 그려진 유니폼에 뿔테 안경을 쓴 안드레아 프레디Andrea Freddi가 메뉴를 설명해준다. ‘마르코 폴로 - 나침반에서 얻은 영감’처럼 메뉴의 콘셉트는 다소 모호하지만, 정통 칵테일을 재해석한 ‘위대한 개츠비’는 정말 환상적이다. 12년산 맥캘란 위스키에 화이트 트러플 꿀, 허브 향이 나는 술인 아마로, 라벤더 에센스를 섞어 바닐라 초콜릿, 타바코 향을 풍기는 칵테일은 슈퍼히어로가 나타나는 것처럼 연기 가득한 유리 돔에 담아 손님에게 내어준다.
자리를 잡은 나는 바 안쪽에 관해서 물어본다. 직원들끼리 상의하더니 수석 바텐더 페데리코 롬바르디Federico Lombardi가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 말한다. “저를 따라오세요.” 화장실을 지나 주방에서 오른쪽으로 꺾더니 작은 창고 안으로 들어간다. “준비되셨나요?” 페데리코가 세면대를 어루만지니 서서히 비밀의 문이 열린다. 파라디소의 중앙 바가 위스키 통 내부를 연상 시킨다면, 촛불의 불빛이 호박색 낮은 천장에 반사되는 이곳은 구리 냄비 안쪽 같다. 열 명이 겨우 앉을 수 있는 공간은 누구든 오고 싶어 하지만 모두에게 허락되진 않는다. 롤링스톤스의 보컬인 믹재거가 바르셀로나를 방문했을 때 이곳에 왔다고 페데리코가 자랑스럽게 알려준다.
“한 잔 더 할까?” 바르셀로나에서는 언제나 가능한 질문이다. 파라디소를 나와 엘보른 지구의 골목으로 자연스럽게 이끌린다. 지나치는 낡은 문이 모두 주류 밀매점의 비밀스러운 출입구로 보인다.
수백 년 동안 도시의 엔진실 역할을 해온 이 지역은 장인과 수공예가들이 운영하는 공방들이 있었다. 골목은 이곳에 모여 있는 공방의 업종을 따서 ‘거울거리’라는 뜻의 카레르 델스 미라예르스Carrer dels Mirallers라고 불렸다. 이곳에 마지막 방문지이자 최고의 발견이 기다리고 있다.
어두침침한 골목 모퉁이에 아치형 창문과 어두운 색 나무문이 보이는 닥터 스트라빈스Dr Stravinsky 바가 조용히 자리한다. 버건디와 초록색으로 꾸민 높은 층고의 실내로 들어서면 실험실이나 진기한 물건이 가득한 방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든다.
별다른 표시가 없는 수백 개의 병과 유리잔, 비커, 실린더가 벽면의 3개 층 선반을 가득 채운다. 얼룩덜룩하고 왜곡된 거울들은 이곳의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증폭시킨다. 앞치마를 두른 리타 아유에Rita Allué가 미소를 지으며 바 안쪽으로 안내하고 메스칼 술, 카준 시럽, 파드론 고추 그리고 수제 자몽 소다를 섞어 훈연 향과 상큼한 맛이 나는 팔로마Paloma 칵테일을 권한다.
바에서 사용되는 술과 재료의 85%는 직접 만든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대량 생산되는 주류는 취급하지 않고, 오로지 칵테일만을 판매하기에 맥주나 와인을 원하면 바르셀로나에 있는 1400여 곳의 다른 바로 가면 된다.
“완벽한 칵테일을 경험하기 위해 이곳에 오셨죠?” 매니저 시저 몬티야Cesar Montilla가 묻는다.
어두운 색 셔츠에 빨간색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살바도르 달리처럼 콧수염 끝이 올라간 시저는 새로운 칵테일의 숙성과 침용, 증류에 관해서 이야기하거나 제작 과정의 미세한 조정을 논의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칵테일을 만드는 것은 완벽을 추구하는 작업이에요.” 진지한 표정의 그에게 예술과 비슷한지 묻자 “물론입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동네를 산책하다가 우연히 이곳에 들어왔다고 하자 시저가 즐거워한다. “저는 닥터 스트라빈스키가 숨어 있으면서 숨어 있지 않다는 말을 항상 해요. 길을 걷다가 저희 바를 지나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발견하기도 해요. 바르셀로나라는 미로의 보물이죠.”
*** 더 많은 기사는 <내셔널지오그래픽 트래블러> 8월호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