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EYS
QUIET REVOLUTION
격식 없는 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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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2월호

유네스코가 인정할 만큼
창의적인 미식에
일가견이 있는 전주.
비빔밥이나 막걸리 같은
고전적인 음식을
살짝 비틀어본다면 어떨까.

가족회관에서 비빔밥을 주문하면 다채로운 반찬을 내어준다.

누군가가 내게 현대옥 가는 길을 묻는다면 나는 지도 앱을 켜는 대신, 시각과 청각에 의지해 찾아가 보라고 얘기해줄 것이다. 먼저 남부시장 골목에서 대나무로 짠 바구니들을 지나쳐 아날로그식 커피 광고가 나붙은 카페를 끼고 오른쪽으로 돈다. 그런 다음 양파 다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댓집 앞에서 왼쪽 길을 택한다. 방향이 헷갈린다면 무언가 두들기는 소리가 나는 쪽이 바로 왼쪽이다.
현대옥에 다다르자 요리사 두 명이 망치를 든 채 널찍한 조리대에 서서 마늘을 힘차게 두드리고 있다. 그러고는 얇게 썬 대파와 고추를 한데 모아 솥에 풍덩 빠트린다. 아침 9시도 안 된 이 시간에 이미 국밥이 얼큰하게 완성되어 있는 것이다. 조리대 겸 식탁인 자리에는 나와 가이드 댄 그레이Dan Grey 외에도 몇몇 손님이 더 앉아 있다. “오징어를 넣을 건가요? 넣지 않을 건가요?” 댄이 나에게 묻는다. “이곳에서 선택할 수 있는 건 오징어의 유무뿐이죠.” 나는 오징어를 빼달라고 대답한다. 그 즉시 작은 그릇에 가볍게 찐 수란이 담겨 나오고 김치, 깍두기, 새우젓, 김 등이 차례로 놓인다. 이어서 맑은 국물 아래로 콩나물과 밥이 엿보이는 큼지막한 검은색 뚝배기가 코앞에서 김을 모락모락 뿜어댄다.
옆자리 손님들을 힐끗 본 뒤 나도 식사에 동참해본다. 얼른 국밥에 수란을 붓고 고기 육수처럼 진한 맛이 우러나는 맑은 국물을 몇 숟가락 떠서 먹는다. “왜 사람들이 국밥을 해장국이라고 부르는지 알겠죠?” 댄이 웃으며 말을 잇는다. “뜨겁게 한 그릇을 싹 비우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거든요. 계속 피어오르는 연기 때문에 사우나를 하는 느낌도 들고요.” 

(왼쪽부터) 정겨운 분위기의 한옥마을.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한옥마을의 전경. 현대옥에서 정성스레 끓여내는 국밥.

현대옥은 전주를 대표하는 남부시장에서 아침 6시부터 오후 2시까지 문을 연다. 지역 주민들은 1979년부터 현대옥이 끓여내는 국밥으로 활기를 찾아왔다. 매주 주말에는 아침 7시부터 대기 줄이 생길 정도라고. 이 줄은 시장 안팎으로 늘어선 판두부 전문점, 참기름 방앗간, 다슬기 식당 등을 아우른다. 
전주는 물이 넉넉하게 채워진 논이 빼곡한 곡창지대로 품질 좋은 농산물을 생산하는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한국계 미국인인 댄은 언젠가 전주가 농산물로 세계를 뒤흔들 수도 있으리라 이야기한다. “양질의 농산물을 재배하는 전주가 미식의 성지가 되는 건 당연하죠. 전주 특유의 반항적인 기질도 창의적인 음식에 한몫하는 듯하고요.” 남부시장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나오는 가족회관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회관은 현대옥의 국밥처럼 비빔밥이라는 단일 메뉴로 정체성을 드러낸다.

(왼쪽부터) 옛촌막걸리의 주인장인 최인덕, 최전원 자매. 가족회관에서는 조선식 비빔밥을 놋그릇에 담아낸다

한국에서는 수백 년 동안 비빔밥을 다채로운 형태로 먹어왔다. 보통은 먹다 남은 음식들을 탈탈 털어 비벼가며 저렴하게 한 끼를 때운 식이었다. 하지만 가족회관에서는 비빔밥의 격을 한층 끌어올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식당 1층에 들어서니 병풍 너머에서 손님들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온다.
식탁 위에는 버섯볶음, 멸치볶음, 마늘종볶음, 무말랭이, 청매실절임, 고구마맛탕 등 12가지 반찬이 정갈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메인 요리는 반짝이는 놋그릇에 담긴 채 모습을 드러낸다. 밥, 당근, 오이, 시금치, 고사리, 육회, 고추장이 이루는 조화로운 색감이 가히 예술에 가깝다. 밥은 소꼬리 곰탕으로 천천히 짓고, 육회는 참깨와 생강과 마늘로 무쳐낸다. 고추장은 가족회관만의 숨겨진 비법으로 담근다. 내가 대충 밥과 나물로 흉내 냈던 비빔밥과는 준비 과정부터 다르다. 금속 젓가락으로 이 비빔밥을 섬세하게 섞어주면 각각의 재료가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다. 무엇보다 슴슴한 맛과 매콤한 맛이 기묘한 조합을 선사한다.
1979년 김년임 씨가 문을 연 가족회관은 현재 그녀의 딸인 김양미 씨가 운영을 도맡고 있다. 청바지를 입은 털털한 성격의 김양미 씨는 기꺼이 나의 식사 시간 동안 훌륭한 말벗이 되어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역사 서적으로부터 큰 영감을 얻었다고 설명해준다. 전주는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 왕조의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김년임 씨는 서적을 통해 과거의 유산을 복기했고 그 위에 그녀만의 고명을 얹어 지금의 비빔밥을 탄생시켰다. “비빔밥 자체는 전주의 전통 음식이지만, 가족회관의 비빔밥은 조선 시대의 것에 가까워요.” 김양미 씨가 말을 덧붙인다. “저희 어머니는 요리가 과거에만 멈춰 있지 않길 바라셨거든요.”
김년임 씨와 같은 창의적인 생각은 전주 한옥마을에도 무궁무진하게 펼쳐져 있다. 가족회관에서 남동쪽으로 약 800m를 이동하자 비빔밥 바게트와 비빔밥 크로켓이 발길을 멈춰 세운다. 한옥마을에는 지난 15년간 복원 작업을 거친 800여 채의 전통 건물이 모여 있다. 비빔밥 와플의 맛이 궁금하다면 동쪽으로 조금 더 걸어 자만벽화마을 경사로에 자리한 카페로 가야 한다. 벽화마을에 위치한 집들이 초승달에 앉아 있는 여인, 꼬리를 휘두르는 용 등 다양한 작품으로 꾸며져 산책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물론 조선의 왕이 오늘날의 전주를 본다면 탐탁치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점토 기와와 나무들보로 장식된 사찰을 지나 격식을 깨트린 한옥마을을 둘러보고 있자니 좀 더 자유로운 기분이 든다.

(왼쪽부터) 한옥마을의 가장자리를 따라 전주천이 흐른다.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한옥마을을 거닐고 있다.

전주에서는 길거리 음식 또한 적당한 요깃거리가 되어준다. 소나무 아래에서 두 친구가 미나리 만두를 오물거리고 부모의 손을 꼭 잡은 아이들이 다른 한손으로 끈적한 마시멜로 꼬치를 들고 있다. 골목 안에서는 한복을 빌려 입은 10대 소녀들이 소스를 흘
리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닭꼬치를 먹는다. 그 너머로 아이스크림, 브라우니, 민트 잎, 소나무 가지를 얹은 빙수를 들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한옥마을을 거닐다 은은한 향기를 피워내는 전통찻집 앞을 지나, 잠시 뒤 나는 마을 끝자락에 자리한 어느 한옥으로 들어선다. 건축적으로 화려한 곳은 아니지만 옛촌막걸리는 단정한 멋을 자랑하는 주막이다. 주인장인 최인덕 씨와 최전원 씨 자매가 손수 빚은 막걸리에서 고상한 맛을 느껴볼 수 있다고 한다.
황금색 양은 주전자에 가득 담긴 막걸리가 나오자 기대감이 한층 고조된다. 최인덕 씨가 막걸리를 그릇에 부어주면서 “특히 전주는 물이 아주 깨끗해서 막걸리 질도 좋을 수밖에요”라고 말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릇째로 술을 들이켜자 입안 가득 블루치즈를 떠오르게 하는 걸쭉하고 탁한 맛이 감돈다. 전주 삼천동을 거점으로 알코올 함유량이 6~9도 정도로 낮은 막걸리와 소량의 안주를 먹으며 이 술집 저 술집을 옮겨 다니는 문화가 자리잡았다고 하는데 이곳 막걸리는 그런 트렌드에도 잘 부합한다는 생각이 든다.
안주로 먹을 만한 메뉴를 살펴보니 철판에 구운 보리굴비, 들깻가루를 듬뿍 넣은 삼계탕, 참기름 냄새가 고소한 간장게장밥, 꼬독꼬독한 식감의 은행구이, 부추가 들어간 홍합탕, 갓 구워낸 김치전 등 다양하다. 그중 두세 가지만 시켜도 금세 잔칫상이 차려진다. “저희는 정직한 태도로 손님을 잘 대접하고 싶어요.” 최인덕 씨의 말에서 전주 미식의 철학이 다시금 느껴진다. 전통을 이어가되 그들만의 방식으로 변주를 주는 일종의 반항적이고 창의적인 기질 말이다.

한옥마을에서 전통찻집 교동다원을 운영하는 기정황 씨.

 

 

 

글. 어맨다 캐닝AMANDA CANNING
사진. 마크 파렌 테일러MARK PARREN TAYL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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