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EYS
THE BLOOMING TOWN
전주 정원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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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9월호

노령산맥에 둘러싸인 전주는 도시 전체가 커다란 수목원이나 다름없다. 전주 시가를 관통하는 전주천을 따라 183종의 식생이 자라나 초원을 형성한다. 그리고 사람의 발길이 만들어낸 골목 끝에는 소박한 정원이 비밀스레 자리하고 있다.

 

천만 그루의 식물

도대체 며칠째지? 출구 없는 장마에 어두운 하늘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환한 풍경이 그리워 <타샤의 정원> 책을 집어 들었다. 타샤 튜더는 70년간 100권이 넘는 그림책을 출간한 동화작가이자 삽화가다. 또한 뛰어난 원예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버몬트주 시골의 30만 평 대지에 자리한 타샤의 정원은1 년 내내 꽃이 지지 않는다. 꽃의 다채로운 색감과 그녀의 평온한 표정을 보다가 문득 한국판 타샤의 정원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주역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다시 쏟아진다. 급하게 차를 타고 서쪽으로 이동하니 팔복동 산업단지가 나온다. 주유소, 정비사업소 등 공장형 창고가 즐비하다. 비슷한 모양의 회색 건물들을 지나치는데 길가에 초록빛 정원이 눈에 띈다. “지난해 약 한달 동안 보도블록을 없애고 꽃을 심어 시민들의 휴식처를 만들었어요.” 전주 곳곳에 크고 작은 정원을 조성하고 있는 사단법인 푸른전주의 운영위원장 최현규 씨가 설명한다. “이 정원 뒤에 있는 회사는 신기술을 개발하는 곳이에요. 탄소 발열 의자를 기부해 주셔서 ‘쉼이 있는 정원’의 주제를 더 부각할 수 있었죠.” 의자 주변에 흰말채, 라일락, 산수국 등이 피어나 공장 지대 속에서도 싱그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푸른전주의 목표는 전주에 천만 그루의 식물을 심어 이곳을 정원도시로 가꾸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시민들 중 초록정원사를 선발해 스스로 정원을 만들게끔 돕는다. 정원에 대한 열정을 기반으로 선발한 초록정원사 60인은 약 60시간 동안 관련 교육을 이수한다. 작년 가을, 1기 교육생들은 동완산동 주택가에 쌈지정원을 조성했다. 오색패랭이, 바늘꽃, 배롱나무, 화살나무 등 총 1950여 그루의 식물을 식재했다. 부채꼴 모양으로 만들어진 쌈지정원은 여전히 인근 시민들과 초록정원사가 돌보는 중이다. “점차 정원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는 것을 보고, 지난5월 부터는 전문가를 초대해 정원문화특강을 진행하고 있어요.”(최현규) 산림환경자원학과 교수, 정원해설사, 정원 디자이너, 정원 요리사 등 다양한 시각에서 가드닝을 배워본다.

 

꽃향기를 따라서

전주역 부근만 해도 도시 냄새가 물씬 풍겼는데, 노송동에 들어서니 층 낮은 주택이 늘어서 시골 마을을 연상시킨다. 오래된 미용실이 있는 모퉁이를 돌자 좁은 골목 안에 향긋한 꽃내음이 퍼진다. 숲속 같은 마당을 지나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문을 두드렸다. 수천 개의 찻잔과 다도용 테이블보가 가장 먼저 보인다. “모스크바에서 2년 정도 살았는데 그때 영국, 프랑스 등 유럽을 여행하면서 모은 것들이에요.” ‘향기품은뜰’의 대표 오미화 씨는 20여 년 전부터 다도를 익혀왔다. 여기에 유럽에서 경험한 정원을 접목해 7년 전 가든 카페를 오픈했다. “러시아에는 ‘다차’라는 일종의 별장 문화가 있어요. 별장이라고 해서 호화로운 것이 아니라 가족들과 텃밭을 일구고 쉬어가는 휴식처 정도예요. 2007년 즈음, 다차에 초대를 받았는데 그곳에 핀 야생화가 무척 아름다웠어요. 키가 큰 루피너스를 한국에서도 꼭 키워보고 싶었어요.”(오미화)

한 손님이 앤티크한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바깥 뜰을 살핀다. 오미화 씨는 종종 직접 키운 캐모마일로 꽃차를 만든다. 정원에서 농약을 치지 않고 기른 캐모마일을 여름이 오기 직전, 이른 오전에 딴다. 저녁의 눅눅함이 가시고 해가 너무 뜨겁지 않을 때 수확해야 꽃잎의 모양이 고스란히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 후 종이 위에 꽃잎을 올린 뒤 3일간 햇빛에 바짝 말리고 단지에 담아 공기가 닿지 않게 보관한다. 이때 꽃잎은 딱1년 치만 보관해 사용한다고. 해가 지나면 생기를 잃어 더는 찻잎으로 쓰지 않는다. 손님이 오면 말린 꽃잎을1 00℃ 물에 3~4분 정도 우려 내놓는다. 이렇게 달인 캐모마일차는 소화와 숙면에 도움을 준다.

뜰 뒤편으로 짧은 돌길이 이어진다. 발목을 간질이는 풀을 걷어내며 걷다 카페와 함께 운영 중인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각 방의 이름은 그 특성과 닮은 꽃 이름으로 지었어요. 이 방은 잔잔하니 작아서 찔레꽃방, 저 방은 풍성하고 커서 모란꽃방.”(오미화) 한옥을 개조한 숙소 5곳은 입구까지 꽃과 식물이 빼곡해 마치 정원 속에 파묻힌 듯하다. 흙이 묻은 신발을 벗고 방 안에 엎드려 창밖을 바라봤다. 그새 해가 저물어 돌길 주변에 환한 조명이 켜졌다. 문틈으로 잦아든 비 냄새와 꽃 향기가 섞여 들어온다. 하늘은 여전히 흐린데 공기가 한층 가볍게 느껴진다.

 

뿌린 만큼 나누다

이튿날, 날이 갰고 전주천 방면으로 이동했다. 물길과 맞닿은 진북초등학교 앞을 천천히 지나 차 한 대가 겨우 다닐 만한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러다 뻥 뚫린 아치형 문 너머로 보이는 깔끔한 정원에 걸음을 멈췄다. 블랙보드에 ‘쿠킹 클래스, 가든 레시피’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정원 안에 위치한 건물은1층 은 요리 학원, 2층은 가정집이다. “전주 도심에서 20년간 요리 학원을 운영했어요. 창문을 열 수 없을 정도로 매연과 소음이 심했죠.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어 진북동으로 이사를 왔어요.”(정정희, 국제요리학원 원장) 환경을 바꾸면서 요리도 처음으로 돌아갔다. “가장 기본은 식물이에요. 동물도 채소를 먹고 자라기 때문에 모든 음식의 시작점은 식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덕분에 학원 앞 마당은 온통 가든 다이닝에 사용할 꽃, 쌈채소 등으로 가득하다.

국제요리학원을 드나드는 입구는 총 두 개다. 앞서 본 오픈형 아치 문 외에 공유 텃밭이라 불리는 입구가 또 하나 있다. 일렬로 늘어선 화분마다 고추, 깻잎, 방울토마토, 가지, 호박 등이 알차게 맺힌다. 이 텃밭에서 키우는 식물들은 이름처럼 주민들과 공유한다. “편히 가져다 드시라고 만든 공간이에요. 처음에는 아무도 손을 대지 않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이웃과 친해져야겠다 생각했어요. 격의 없어야 미안해하지 않고 가져갈 테니까요.”(정정희) 그녀는 이웃과 담을 허물기 위해 플랜트 박스를 준비 중이다. 학원 주변을 둘러싼1 7개의 대문 앞에 각 집에 어울리는 꽃, 채소 등의 화분을 놓으려고 한다. “골목 끝에 사는 아저씨는 매일 장구를 치세요. 그래서 저희가 장구 아저씨라고 부르는데, 그분과 어울리는 ‘장구채’라는 식물을 선물하려고요.”

계절마다 먹을 수 있는 식물은 각기 다르다. 그중 6월 말부터 7월에 씨를 뿌려 하반기에 식용으로 활용하는 한련화는 외양이 연잎과 비슷하다. 채를 썰어 무생채와 곁들이거나 고춧가루를 첨가해 매콤하게 먹기도 좋다고. 비빔밥, 덮밥, 주먹밥 등에 다양하게 사용되며 후식으로 씹기도 한다. ‘자연 가글’이라 할 정도로 상쾌한 향을 내는 까닭이다. “저희 가족은 추운 겨울을 제외하고 삼시 세끼를 정원과 함께합니다. 밥을 한술 뜰 때마다 꽃을 보면 더 맛있는 한 끼가 돼요.”(정정희) 그녀는 비록 일상에 이곳과 같은 정원이 없더라도, 바람과 햇살이 오가는 곳에 식탁을 두고 주변에 꽃을 놓으면 한결 자연스러운 밥상이 차려질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외딴 정원 상담소

전주천을 끼고 서남쪽으로 30분 정도 달려 용복동에 다다랐다. 망월마을 노인정에서 비탈진 길을 올라 ‘꿈꾸는 마당’이라는 팻말이 걸린 집을 기웃거렸다. 수많은 종류의 식물이 입구에서부터 레드 카펫처럼 펼쳐진다. “14년간 235평 땅에서 화목 120여 종과 꽃 400여 종을 가꿔왔어요. 매년 어떤 식물을 어디에 심을지 계획해요. 새롭게 기르고 싶은 종이 있으면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씨앗을 부탁하기도 하고, 직접 과천 등지를 방문하며 발품을 팔기도 했어요.” 작은 플라워 브로치를 단 이종숙 씨가 꽃덤불 속에서 등장했다. 그녀와 남편 이삼춘 씨는 은퇴 후 매일 이곳으로 와 식물을 돌본다.

“정원사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해요. 정원이 제대로 자리잡고 뿌리를 내리려면 적어도 7년이 필요해요.”(이종숙) 그리고 13년이 지나고 나니 자연은 스스로 돌보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다양한 종을 키워온 그녀에게도 어려운 식물은 있었다. 특히 델피니움은 그녀에게 인내를 배우게끔 했다. 그리스어로 돌핀을 뜻하는 델피니움은 꽃봉오리가 돌고래처럼 푸르스름하다. 추위를 잘 견뎌 산지에서 곧게 자란다. 반면 습기에 약해 뿌리가 잘 썩는 편이다. “여름에 피서 가기가 힘들 정도였어요. 그럴 땐 다른 사람에게 정원을 부탁해야 하는데, 물을 어느 정도 줘야 하는지 알려주기가 어려우니까요.”

한바탕 정원 구경을 마친 뒤, 꽃밭에 둘러싸인 집에 발을 디뎠다. 85년 전에 지어진 한옥을 조금씩 리모델링해 아늑한 쉼터로 삼았다. “새내기 정원사나 조경학과 학생들, 수목원 직원들이 종종 와서 이야기를 하다 가요. 정원 상담소랄까? 제가 체득한 가드닝을 편하게 공유할 수 있어서 기뻐요.”(이종숙) 지난 5월부터는 부부만의 공간을 제한적으로 오픈하고 있다. 블로그를 통해 예약한 뒤 소정의 입장료를 내면 된다. 마치 시골집에 온 것처럼 시원한 차와 과일 등을 편히 내준다. 얼마 전 이곳에 온 방문객들은 친근한 분위기에 반해 한편에 놓인 풍금을 타고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꽃이 수놓인 손뜨개 커튼을 걷고 창가에 기대 앉았다. 집 주변을 빙 두르고 있는 모악산 능선이 커다란 울타리처럼 느껴진다. 네모난 창 안에 파란 하늘과 꽃더미만 들어찬다. 곧 장마가 그칠 것 같다.


 

TRAVEL WISE: 그린 라이프

풀꽃세상
푸릇푸릇한 나무가 둘러싼 벽돌집에서 채식 뷔페를 즐겨보자. 쌈채소, 현미밥, 곡물샐러드, 콩고기, 각종 나물, 야채김밥 등 여러 건강식을 내놓는다. 특히 샐러드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병아리콩건포도샐러드, 사과배샐러드 등 녹색 채소와 어우러진 식재료가 상큼한 맛을 낸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우림로 1036-13

채식주의자의무화과
전주에서 비건 카페로 잘 알려진 곳이다. 귀리우유로 만든 음료나 그린키위파인차, 애플시나몬차, 딸기차, 파인차 등을 판매한다. 인절미 쿠키, 병아리콩쑥 마들렌 등을 곁들이면 좋다. 무화과처럼 자연스럽고 은은한 단맛을 추구한다. 당 함량이 적어 금방 상할 수 있으니 당일 섭취를 권장한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선너머로 36

캔들나무
실내에서도 은은한 꽃향기를 맡고 싶다면 이곳에서 캔들, 디퓨저 등을 살펴보자. 전주 내에 전북도청점, 전주송천점 두 곳이 자리한다. 로즈, 블루베리, 라벤더 등 허브 향을 머금은 디퓨저는 작은 공간이나 차량에서 더욱 진하게 퍼진다.
전북도청점 전북 전주시 완산구 홍산4길 6 골든시티 1층 상가
전주송천점 전북 전주시 덕진구 솔내로 148 나 101호

이웃플라워스튜디오
전주 신시가지에 위치한 플라워클래스 숍. 원데이클래스, 취미반, 정규반, 창업반 등 다양한 수업을 진행한다. 소규모 수업이기 때문에 디테일한 배움이 가능하다. 실내에 두기 좋은 화분류도 다양하게 판매한다. 몬스테라, 벵갈 고무나무, 레몬나무, 소철 등 집 분위기에 어울리는 반려식물을 맞이해 보자.
전북 전주시 완산구 척동10길 11 1층

전주수목원
한국도로공사에서 운영하는 전주수목원은 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훼손된 자연환경을 복구하기 위해 여러 수목을 생산하는 곳이다. 식물의 보존, 증식, 보급, 자생식물의 개발에 힘쓴다. 주로 장미원, 무궁화원, 유리온실 등 ‘과’ 단위로 구분된다. 정자가 보이는 포토존은 인생샷 성지로 잘 알려져 있다.
전북 전주시 덕진구 번영로 462-45

중앙식물원
약 1만m2의 대지에 유리온실, 비닐온실이 널찍하게 자리 잡고 있다. 열대식물원을 테마로 각종 화훼류와 관엽식물이 자라난다. 이곳에서 재배한 꽃을 구매할 수도 있다. 가족 단위 방문객이 많은 편이다.
전북 완주군 용진읍 구억명덕로 204

글. 김호경HO-KYUNG KIM
사진. 김현민HYUN-MI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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