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가장 빛나는 순간들
낯선 세상과 맞닿아 있는 지점에서 여행이 시작된다는 한 여행자의 이야기로부터 여수에서의 로드트립이 시작된다.
함께한 밴드 블루어의 세 뮤지션과의 교감은 여행지를 조금 다른 시각으로 들여다볼 수 있도록 이끌었고, 여정 중에 만난 현지인들의 이야기는 여수를 보다 사랑스럽게 만들었다. 그곳에서 섬과 섬을 이어주는 다리를 연신 통과하며 점차 낯선 세계로 들어서는 경험을 한다. 시속 10km, 30km, 60km 속도를 달리해가며, 지금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지나고 있는 청춘의 순간을 목도한다.
출발, 사실은 가장 설레는 순간
드디어 출발이다. 여행을 하루 앞두고, 계획과 무계획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면서 여행자의 긴장감과 설렘을 배가시켜본다. 과연 그곳에서 어떤 불확실한 순간과 마주하고, 어떤 대화를 통해 마음이 동하게 될 것이며, 완벽한 미지의 섬으로 향하기 위해 몇 개의 다리를 통과하게 될까.
길 위에서 펼쳐지는 모든 선택의 순간이 모여 여수 로드트립을 완성하게 될 터. 인디밴드 블루어BLEUR의 진민호(보컬), 조인호(키보드), 그리고 김동준(기타), 이 세 사람이 익숙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시공간에 불쑥 발을 들이는 꿈같은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울에서 출발해 목적지인 여수까지는 대략 400km. 제법 긴 길을 따라 달리는 사이, 빽빽하게 들어선 높다란 빌딩의 수가 서서히 줄어들고, 시원하게 뻗은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리다 보면 어느새 창밖으로 바다가 설핏 보이기 시작한다. 마침내 도착한 여수구항은 이른 아침이라는 시간대가 무색하게 이미 활기로 가득 차 있다. 차에서 내려 크게 숨을 들이켜자 폐 깊숙한 곳까지 바다 짠내와 상쾌한 공기가 가득 들어찬다. 알록달록한 작은 어선들이 바다 위에서 넘실대고, 강태공 몇몇이 바다를 향해 각자의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이 계절엔 어떤 어종을 낚으시려나 궁금증에 기웃거리니, 지금은 갑오징어를 기다리는 중이란다.
여수의 바다는 수심이 깊고, 항만이 넓으며, 수많은 섬이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어 수산항으로 매력적인 지역이다. 한려수도와는 뱃길로 이어지고, 오동도, 돌산도, 금오도, 남해도 등 수많은 섬과 연결된 항구이기도 하다. 그러한 여수의 분위기를 가장 명확하게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바로 교동과 중앙동 일대 남항을 일컫는 이곳 구항이다. 여객선터미널이 자리해 17척의 여객선이 현지인과 여행자들을 수시로 실어 나르는가 하면, 수산시장에서 신선한 현지 해산물의 풍미를 가득 느낄 수도 있다.
낮게 깔렸던 구름이 서서히 걷히면서 방파제 끝 바다를 향해 서 있는 붉은색 하멜등대가 또렷하게 존재감을 뽐낸다. 1653년 일본으로 향하던 네덜란드 상인 하멜이 승선했던 동인도회사 소속 스페르웨르호가 제주 부근에서 태풍을 만나 난파되면서, 배의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한국에 표류해 13년 동안 억류되었는데, 그가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지역이 바로 이곳 여수다.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그야말로 ‘미지’의 장소, 이 지역엔 길을 잃은 탐험가들이 보낸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러니 기꺼이 길을 잃어도 좋은 여행자들이 여수 여행을 시작하는 데 제법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오전 9시 반, 머리 위로는 자산과 돌산을 연결하는 여수해상케이블카가 운행하기 시작했고, 거북선대교 위로는 일상을 시작하는 여수 사람들의 움직임이 부쩍 늘었다.
“이제 여수에 녹아들 차례네요.” (조인호)


SPOT 1. 하멜등대
여수구항 방파제에 세워진 붉은 등대는 370여 년 전 하멜의 흔적을 기록한다.
전남 여수시 종화동 458-7
SPOT 2. 거북선대교
구도심과 돌산을 연결하는 744m 길이의 교량이다.
전남 여수시 종화동

계획, 지도 위의 영감
“여수는 두 번째야.” (진민호)
“난 처음이에요. 사실 여행 경험이 많지도 않고요.” (조인호)
“나도 처음! 지난번 여수 여행은 어땠어요?” (김동준)
거북선대교를 타고 10분 남짓 달려 돌산읍 피읖카페에 다다른다. 돌담을 지나 카페 앞에 차를 세우고 나니, 순식간에 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작은 숲을 떠올리게 하는 정원엔 키 큰
팜파스그래스가 바람에 흔들리고, 잘 가꿔진 정원수와 초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다채로운 꽃이 피었다. 정원 산책 후, 아침부터 서두르느라 다소 긴장했던 몸과 마음을 이완시킬 겸 카페 안으로 들어선다. 육중한 나무 너머 현무암을 쌓아 만든 벽과 원목 가구가 어우러진 아늑한 공간에서 반려견 피읖이가 새하얀 자태로 다정하게 여행자를 맞이한다. “피읖이는 유기견이었어요.” 사람에 대한 경계가 전혀 없는 녀석을 보고 있노라니 사람에게 상처받은 마음을 사람으로부터 치유 받고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서로 닮은 듯 다른 세 사람이 지도를 펼쳐두고 마주 앉았다. 출발점과 도착점을 찍어보고, 그 사이를 채울 장소들을 살피는 중이다. 연두색 나뭇잎이 점차 짙은 녹색으로 변해가는 계절인 만큼 자연이 주는 경이로운 변화를 마주한 채, 평소 해보지 않던 일을 경험하면서 감각을 확장해볼 생각이다. 아마도 아침에 보았던 바다 낚시도 그중 하나일 테다. 싱싱한 해산물과 현지 식재료를 가지고 정성스레 완성한 미식 경험은 물론, 숙소에서는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곡 작업을 하고, 난생처음 버스킹도 계획하고 있다.
어느 장소에서 어떤 경험을 할지, 각자 어떤 길을 차로 달려볼지 지도를 들여다보는 중이다.

+ TAKE IN THE WONDER
거북선대교를 시작으로 돌산대교, 팔영대교, 낭도대교 등 섬과 섬을 이어주는 수많은 다리를 건너며 여수에서의 로드트립을 이어간다. 늘 다리 위에 오르는 순간이면 저 다리 너머 낯선 세상이 맞닿아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고조된다. 이 지역에는 여수에서부터 고흥과 주변 섬을 잇는 백리섬섬길이 만들어졌는데, 그 길에 놓인 첫 번째 대교가 바로 화양조발대교다. 대교의 주탑에 연결된 케이블이 조형적으로 아름다우며, 달리는 도중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속도가 시각적으로 다가온다. 길이 854M, 높이 170M, 제한 속도 60KM의 쭉 뻗은 대교 위를 달리는 여정 중에는 한 번쯤 부스트 모드로 전환해 일상을 벗어난 자유로움을 만끽해봐도 좋겠다.
화양조발대교 전남 여수시 화양면 장수리
“제게 드라이빙은 자유입니다. 핸들을 돌려 길을 그리고, 스쳐가는 풍경으로 프레임을 이어가면 바람이 창문 사이로 스치고, 마음 가는 대로 달릴 수 있죠. 마치 이카루스가 된 듯, 끝도 없는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 키보디스트 조인호
“드라이빙은 일종의 쉼입니다. 온전히 저만의 공간인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음악적인 것들, 혹은 삶의 부분들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곤 합니다. 그러니 로드트립이라는 것은 ‘삶과 쉼’을 내포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 보컬 진민호
“로드트립은 단순한 장거리 운전을 넘어 여정 자체를 즐기는 여행의 형태라고 정의하고 싶어요. 목적지보다는 그 과정에서의 만남, 경험, 풍경, 그리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조차 추억이 되는 여행이 바로 로드트립 아닐까요?”
– 기타리스트 김동준

여수의 정서를 만나는 법
고소동 벽화마을, 언덕길을 따라 구도심을 달리다 보면 속도는 의도하지 않아도 느려지고 덕분에 주변 풍광을 살펴보는 일이 자연스럽다. 저 멀리 오전에 지나온 거북선대교가 모습을 보이고 오늘 밤 야경을 감상하기 위해 찾아볼 요량이었던 돌산대교가 서 있다. 동네 곳곳에 개성 넘치는 상점들은 마치 이국의 정취인 듯 여수만의 정서인 듯 자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와이드커피스탠드에 잠시 들러 주인장의 큐레이션에 감탄하며 예술가의 영감을 기꺼이 얻는다.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놓칠 수 없다. ‘동네’라는 단어의 뉘앙스를 잘 담아내고 있는 고소동을 유영하다 보면 현지인의 삶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딱 그 계절에 한해 맛볼 수 있는 그 지역 식재료의 풍미가 여행의 묘미를 한층 더해준다. 이는 단순한 맛의 향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땅과 바람, 물이 키워낸 산물을 지역 특유의 요리법으로 완성한 음식엔 재료가 거쳐온 시간과 만든 이의 마음이 옹골차게 들어차 있다. 이른 저녁, 여행의 하루를 마무리하며 여수의 미식을 경험하기 위해 이웃 동네의 남도한상좌수영으로 자리를 옮긴다. 감각을 확장한 채로 여수를 온전히 즐기다 온 여행자의 상태를 파악한 차은진 셰프가 세 사람에게 가장 먼저 내어준 것은 여수 거문도 해풍쑥차이다. 아홉 번 덖어 만든 쑥차의 향이 깊고 은은하게 입안으로 퍼지며 긴장을 풀어주는 사이, 본격적인 상차림이 펼쳐진다.
“이제 일곱 가지로 구성된 애피타이저로 오늘의 코스 요리를 시작할 거예요. 가운데 놓인 게 흑임자 드레싱을 올린 방풍샐러드인데,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방풍의 70%를 여수 금오도에서 채취하죠. 풍을 예방해 방풍이라는 이름이 붙었어요. 그다음에 채소 스틱부터 토마토 절임, 시계 방향 순서로 즐겨주세요. 다 드신 다음에는 독특한 생김새의 부채새우를 쪄서 올리고, 이어서 여수 달마새우를 얹은 뒤 감태로 감싼 초밥과 한우 차돌초밥이 나올 거예요. 두릅 등 다양한 봄 채소튀김 그리고 여수 서대회무침과 제철을 맞은 하모 샤부샤부가 준비될 예정입니다.” (남도한상좌수영 차은진 셰프)
요리가 차례대로 테이블에 올려지고, 때때로 그에 어울리는 술을 페어링해 내어준다. 건강한 음식을 배불리 대접하고 싶은 셰프의 정성 덕분에 부른 배만큼 마음도 차오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곡성 백세미로 갓 지은 쌀밥과 잘 익은 김치로 끓여낸 찌개까지. 오랜만에 느긋한 마음으로 한 끼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져 있음을 느낀다.
Q&A
당신,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요
고소동 벽화마을 끝, 이국적인 골목길 한편에 위치한 ‘와이드커피스탠드’에서 이현민 대표와 나눈 대화.
일방통행길을 따라 다양한 스타일의 상점이 자리한 동네가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이 동네는 지대가 높아 여수의 전경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습니다. 오른쪽으로는 돌산대교, 왼쪽으로는 거북선대교가 있어 낮과 밤 모두 낭만적인 풍경이 펼쳐지죠. 골목마다 정겨운 벽화들과 작은 공방 그리고 아기자기한 소품 가게들이 자리합니다. 베이글, 푸딩, 그 외 어느 가게에 들어가더라도 제각각 여수의 아름다운 전경을 내어줍니다.
와이드커피스탠드는 어떤 일들을 하나요?
WYD는 ‘WHAT ARE YOU DOING?’의 약자인데, 이곳이 단순한 카페가 아닌 여러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지었어요. 지역 안팎의 작가들과 전시를 기획하기도 했고, 코로나 시기에는 폴란드의 카페 ‘LA MANO’와 각자의 카페 공간을 촬영해 서로 공유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죠. 여수에서 활동하는 DJ들의 공연을 기획하기도 했고요.
LA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고향인 여수로 돌아오신 거라고 들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LA에 있는 패션 브랜드에 입사해 처음 1년간은 여성복 디자이너로, 이후에는 프로덕션 매니저로 일하면서 지냈어요. LA에 있을 때는 매일 여행하는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 자연과 도시가 절묘하게 뒤섞인 곳이었기에 서핑과 파티 등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어요. 당시 룸메이트를 통해 스페셜티 커피를 접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매료되었고, 미국에서 소문난 로스터리 원두를 탐닉하기 시작했죠. 특히나 바닷가 근처 카페들의 자유로운 바이브에 반하면서 자연스럽게 카페를 꿈꿨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비자 문제로 잠깐 고향에 돌아왔다가 변화된 모습에 문득 이곳에서라면 꿈꾸던 카페를 열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렇게 문을 연 지 7년이 되어갑니다.
당신이 여수에서 가장 사랑하는 장소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궁금합니다.
여름이면 해수욕하러 가는 모사금해수욕장과 매주 자전거를 타는 코스 중 하나인 섬달천을 좋아해요. 그리고 노을이 지는 오후 5시에서 7시 사이의 와이드커피스탠드를 사랑합니다.


SPOT 4. 와이드커피스탠드
바닐라빈이 콕콕 박혀 있는 달콤한 컵케이크와 고소한 땅콩크림을 올린 카페라테의 조화가 여행의 즐거움을 상승시킨다.
전남 여수시 고소3길 64
SPOT 5. 남도한상좌수영
여수의 제철 식재료 본연의 맛을 다채로운 레시피로 변주해 여행자 앞에 가지런히 내어놓인다.
전남 여수시 동문로 6-2 2층

지금 바다의 빛깔
여행을 오기 전, 여수 곳곳을 검색하던 중 이순신 장군의 승전지로 알려진 무슬목해변에 이르렀다. 과거의 영광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지 호기심을 안고 한낮의 해변으로 향한다. 무슬목해변은 큰 몽돌이 파도에 쓸려 형태를 다듬어가는데, 썰물 때면 몽돌 너머로 백사장이 모습을 드러내 독특한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약 700m 길이의 해변을 따라 한낮의 태양 아래 블루어 멤버 3인의 산책이 시작된다. 치열했던 역사를 흘려보내고, 지금 해변은 투명한 파랑으로 반짝거리는 중이다.
“음악을 시작한 지 20년이 되었어요. 음악을 매개로 한 패밀리를 만들고 싶었는데 여러 이유로 그게 쉽지만은 않았어요. 음악을 계속해오면서 저만의 힘이 생겼고, 그 작은 힘을 바탕으로 음악과 인생의 여정을 동행할 이들을 찾고 싶었죠. 다행히 조인호, 김동준 이 두 사람을 만났고 블루어라는 이름으로 모인 지 1년 됐어요.”
(블루어 진민호)
“이번 여행을 함께 준비하면서 새로운 장소로 향한다는 기대감 덕분인지 음악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어요. 어떤 악기를 사용하면 좋을지, 어떤 분위기의 곡을 만들지 등등. 내일 버스킹에서 부를 곡의 제목을 아직 정하지 못했는데, 아마 여행에서 받은 영감으로 무언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블루어 조인호)
“맞아요. 이번 로드트립에서 가장 기대하는 시간 중 하나가 버스킹이었어요. 첫 버스킹이기도 하고, 그래서 멤버들과 그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죠. 6월에 발매 예정인 곡을 부르기로 했는데, 여행에 관한 곡이죠. 후렴 가사가 로드트립의 정서와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블루어 김동준)


SPOT 6. 무슬목해변
일출 무렵의 몽환적인 분위기도 좋지만, 한낮 해변의 활기도 그에 못지않게 좋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쌓은 돌탑이 인상적이다.
전남 여수시 돌산읍 돌산로 2876
생애 첫 낚시
평소라면 해보지 않을 일들을 여행지에서는 기꺼이 해볼 수 있다. 여행이 좋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여수를 여행하면서 바다 한가운데 배 위에서나 섬의 가장자리, 때로는 파도가 일렁이는 방파제 등에서 낚싯대를 바다로 드리운 이들을 만났다. 장소와 계절에 따라 잡히는 어종이 달라지고, 특정 어종의 금어기가 되면 바다 생물을 보호하기 위해 낚시가 금지된다는 것도 여행 중 알게 된 사실이다. 봄이면 볼락과 참돔, 갑오징어를, 여름이면 돌문어, 농어, 갈치를, 가을이면 감성돔, 쥐노래미를, 겨울이면 우럭, 도다리까지. 바닷속은 다채로운 생명들로 한껏 생동감이 넘친다.
숙소의 주인장 역시 딜문 근처 방파제에서의 낚시 경험을 슬며시 들려주었다. “몇 번 낚시를 해본 적 있어요. 비록 물고기를 많이 잡지는 못했지만, 조용히 찌를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 참 좋았던 기억이 나네요. 손끝에 집중하는 그 감각과 느긋한 기다림의 시간이 참 좋았죠.” (딜문 호스트 장상훈)


안온한 휴식, 여행지에서의 하룻밤
결국 이번 낚시에서는 한 마리도 낚지 못했다. 그렇지만 해보지 않은 일을 처음 경험해봤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에 생기가 돈다. 방파제에서 숙소로 향하는 언덕을 오르는 사이, 밤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딜문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집에 온 듯 마음이 평온해진다.
숙소인 딜문이 위치한 백야도는 ‘흰 섬’이라는 뜻을 가졌다. 섬에서 가장 높은 산인 백호산 정상의 바위들이 하얀색을 띠어 섬은 백호랑이가 웅크린 모습을 연상시킨다. 어쩐지 세상에 없을 것 같은 존재라 신비롭고 비밀스럽다. 딜문의 호스트는 이곳에서 여행자가 오롯이 쉬면서 자연을 통해 영감을 얻고, 이곳에서 하루를 맞이하고 마무리하는 모든 시간이 일상을 벗어난 새로운 경험이 되기를 바랐다. “이곳을 지을 때 ‘단절된 회복’을 키워드로 삼았어요. 내부와 외부, 나와 세상 사이를 분리하면서 동시에 이어주는 구조랄까요. 시선이 머무는 방향마다 여백이 있도록 설계하고, 공간의 각 구석에서 야자수와 햇살, 나무와 바람이 감각적으로 연결되도록 구성했어요.” (딜문 호스트 장상훈)
2층으로 구성된 독채 스테이, 여백이 있는 공간에 들어서니 낯선 여행지에서 잠시 긴장했던 마음이 사르르 풀린다. 세 사람이 각자 짐을 풀고는 다이닝룸의 커다란 테이블 앞으로 모인다. 커다란 창을 통해 흘러가는 시간을 목도하며, 서울에서 가져온 악기와 작업 노트를 꺼내 새로운 곡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각자의 악기를 정비할 요량이다. 여행이 점차 끝을 향해 가면서 곡은 여행지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조금씩 완성도를 높여가는 중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방향만 있다면 목적지로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다는 걸 여행을 통해 배운다.

+ NAVIGATION UNCHARTED
낭도 둘레길을 걷던 중 만난 남포등대. 간조 때가 되면 바닷물이 빠지면서 등대로 향하는 길이 열리지만, 만조 때가 되면 바위 사이로 물이 차올라 건널 수 없게 된다. 자연이 허락한 때에만 경험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 닿지 못했다는 건 다음 여정을 또 기약할 수 있다는 신호가 된다.
남포등대 전남 여수시 화정면 여산길 150

마침내 낭도, 섬 트레킹
이른 새벽, 숙소를 나선다.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 화양조발대교와 둔병대교를 지나 낭도대교를 통과해 낭도에 도착한다. 차를 세운 곳에서 탁 트인 시야 너머 저 멀리 사도의 모습이 들어온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둘레길의 어떤 코스를 탐험할지 살피고 작은 오솔길을 따라 트레킹을 시작한다. 왼쪽으로 내내 바다를 끼고 걷다가 어느새 온전한 숲으로 들어서는가 싶더니 이윽고 갈림길이다. 첫 목적지는 남포등대, 만조 때는 등대가 위치한 지형이 섬과 분리되었다가 간조 때는 낭도와 이어진다. 만조 때인지라, 등대와 여행자 사이로 바다가 넘실댄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듯 가까운 거리에서 아카시아꽃 향기가 바람을 타고 온다. 섬의 또 다른 지형을 탐닉하고자 걸음을 옮겨 주상절리로 향한다. 천선대, 아름다운 풍경에 반해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머물다 간 곳이란다. 수직으로 깎아지른 해안 절벽과 공룡 발자국 화석, 시간이 빚어낸 지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이곳에서는 어린 공룡의 보행렬 발자국을 볼 수 있어 생태 자원으로서 가치가 높다고 한다. 주상절리 부근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순환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실제로 여름에 이곳은 주변보다 기온이 낮아 여행자들이 땀을 식히며 기꺼이 쉬어 간다.
땅의 모양을 발아래 느끼면서 걷다 보면 서서히 자연에 스며드는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도시에서라면 땅의 모양 따위 무엇이 중요하겠냐마는 자연 속에서는 이 모든 것이 자연이 전하는 메시지 같아서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우고 반응하게 된다. 자연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귀 기울이며 낯선 세계에 한발 더 들여본다.

SPOT 8. 낭도 둘레길
여산마을에서 시작하여 장사금해변, 역기미 삼거리, 규포마을을 지나 여산마을로 돌아오는 낭도 둘레길과 상산 정상부로 향하는 4개의 등산 코스가 있다. 모든 것은 여행자의 선택에 달렸다.
전남 여수시 화정면 낭도리 49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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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도 버스킹, 가장 아름다운 일몰 너머
여수 백야도, 해가 기울고 하늘이 붉은빛으로 물든다. 분주한 움직임으로 키보드와 기타, 마이크와 스피커를 연결하는 뮤지션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자꾸만 가슴이 뛴다. GV60에 V2L을 연결하고 스피커를 통해 소리를 몇 번 확인한 뒤, 마침내 시작된 노래. “가자 어디든, 숨통이 탁 트이는 데로, 온종일 아무 생각도 안 해도 될 어딘가~”
여정의 끝, 이것은 또 다른 시작이 될 것이다.
*로드트립 당시 버스킹 공연을 했던 곡의 제목은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여행이 끝나고 며칠 뒤 블루어는 자신들이 부른 노래 제목을 ‘STRESSLESS’라 지었다고 전해왔다.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