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EYS
RISING TO THE OCCASION
포근하게 즐기는 에스토니아의 호밀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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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02월호

에스토니아의 모든 식탁에는 반드시 빵이 오른다. 수도 탈린에서 베이커리를 운영하는 케네스 카리아네와 에바 코르바스를 따라 에스토니아식 따뜻한 만찬을 경험해본다.

(왼쪽부터) 탈린 구시가지. 
사쿠 발드의 집에 있는 에글.

영하 11℃에 이르는 탈린의 몹시 추운 아침. 도시는 온통 하얗게 반짝인다. 밤새 펑펑 쏟아진 눈송이가 거리를 슈거파우더처럼 뒤덮고 있다. 모닥불 앞에 앉아 웅크리고 싶은 유혹을 떨쳐낸 채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에스토니아 음식 탐방에 나선다.

 

나는 오늘 하루를 케네스 카리아네Kenneth Karjane 그리고 에바 코르바스Eva Kõrvas와 함께 보낼 예정이다. 이 두 사람은 탈린에서 가장 인기 있는 베이커리인 카르아세 사이Karjase Sai를 운영하는 공동 사장이다. 지금은 버스를 타고 꽁꽁 언 도로 위를 달려 에바의 가족이 거주하는 하이우 자치군Harju County의 라훌라Rahula 마을로 가는 길이다. 케네스와 에바는 이곳을 매일 오가면서도 눈이 가득 쌓인 창밖 풍경에 감탄한다. “이런 날씨는 정말 오랜만이에요.”(에바)
오늘은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로 손꼽히지만 내가 받은 환대는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따뜻하다. 농장의 울타리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대한 개 두 마리 하구와 구스타가 꼬리를 정신없이 흔들며 눈밭을 가로질러 달려온다. 그 뒤로 에바의 어머니인 에글 코르바스Egle Kõrvas가 인자한 미소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에글은 매년 20그루의 나무에서 수확한 사과로 소문난 사과주스를 만들어내곤 한다. “그냥 취미예요”라고 겸손히 손을 내젓는 그녀는 체육 교사로 일하면서 가구 리폼과 댄싱 등 다양한 취미 생활을 즐기고 있단다. 마침 오후에 인근 마을에서 열리는 전통 무용 공연에 참여할 예정이라고. 그녀가 라흐바리데드rahvariided라는 알록달록한 전통 의상을 흔들어 보이며 설명한다.
에글이 사과를 수확하는 시기는 매년 8월과 9월인데 압착기로 짠 사과즙을 그저 유리병에 담아낼 뿐이라고 한다. “설탕이나 물을 전혀 넣지 않은 100% 사과주스예요.” 그녀가 자랑스럽게 덧붙인다. “올해는 400L 정도를 만들었어요.”

에글이 만든 사과주스.

에바 역시 어머니의 사과주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저희 가족은 1년 내내 이 사과주스를 즐겨 마셔요. 특히 온 가족이 모여 점심을 먹을 때면 항상 빼놓지 않죠. 저희 베이커리에서도 종종 판매하는데 아주 인기가 많아요. 손님들이 최고라고 엄지를 치켜세워요.”
나는 곧 이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흥분한 개들이 염소와 양과 장난치는 모습을 뒤로하고 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실내는 아늑한 목재를 바탕으로 앤티크한 가구들로 꾸며져 있었는데 사이사이에 나이 많은 닥스훈트 마르타와 졸린 눈을 한 고양이 유시, 혈기 왕성한 고양이 토투 그리고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는 또 다른 고양이 미스하가 터를 잡고 있었다. “미스하는 자기가 개인 줄 안다니까요. 매번 문 앞에서 저희를 기다리는데, 심지어 고양이보다 개와 어울리기를 좋아하죠.” 미스하를 바라보는 에바의 눈빛에 사랑이 가득하다.
곧이어 그녀는 서둘러 간식을 준비했다. 오렌지 껍질로 향을 낸 진저브레드 비스킷, 방금 마당에서 따온 세이지 잎을 우려낸 차, 천연 사과주스 등. 특히 이 사과주스는 완벽하게 익은 여름 사과만을 사용해 맛이 더욱 달콤하고 진하다고 한다. 어느새 간식 냄새를 맡고 온 구스타가 나에게 발을 내밀며 애교를 부린다.
탁한 황금색 액체를 한 모금 크게 들이켜는 순간, 모든 설명이 단번에 이해됐다. 부드러우면서 묵직하고 달콤하면서 상큼한 복합적인 맛! 추운 겨울날에 누리는 한여름의 호사다. 베이커리의 손님들 말이 딱 맞았다.

탈린의 칼라마야Kalamaja 지구에 있는 노블레스네르 항구Port Noblessner의 석양.

일용한 양식

에스토니아에는 이런 옛말이 있다. ‘빵을 존경하라, 빵은 우리보다 나이가 많다.’ 케네스와 에바가 운영하는 카르아세 사이에서는 빵에 대한 존경심이 남다르다. 탈린의 옛 고무공장에 자리 잡은 이 베이커리는 평소에도 창의적인 빵을 사러 온 손님들로 줄이 길게 늘어선다. 탁 트인 베이커리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갓 구운 빵의 고소한 냄새와 따뜻한 온기가 배어 나온다. 곧바로 카운터 앞에 나란히 진열된 다양한 종류의 빵이 눈길을 끈다. 바삭바삭한 바게트와 윤기 나는 사워도 빵, 통통한 브리오슈, 바스러지는 크루아상, 앙증맞은 에그타르트, 짙은 색 호밀빵 레이브가 보인다. “에스토니아의 가정집에서는 대부분 끼니때마다 이 검은 호밀빵을 먹어요.”(케네스)
그래서인지 에스토니아에서는 집집마다 전해 내려오는 레이브 레시피가 있다고 한다. “카르아세 사이에서는 유기농 통밀과 맥아로 레이브를 만들어 매우 특색 있는 맛과 색을 내요. 핵심은 짙은 색이 감돌 때까지 구워 캐러멜처럼 그윽한 맛을 표현하는 거죠.” 케네스가 이어서 설명한다. 원래 레이브는 하룻밤 숙성시켜 단단해진 상태에서 먹는 빵이다. “하지만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뜨거운 빵을 선호해서 저희는 구워내는 즉시 판매해요.”

(왼쪽부터) 파스타를 준비하고 있는 케네스.
구운 호박.

나의 간절한 시선을 눈치챘는지 에바가 여러 종류의 페이스트리를 바구니에 골고루 담는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게 구운 바닐라 카눌레와 폭신한 카르다몸 빵이 향기롭다. 카르다몸 빵은 케네스가 스톡홀름에 있는 발할라바게리트Valhallabageriet 베이커리에서 몇 달간 인턴으로 일할 때 받은 영감으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은 것은 후추와 카르다몸으로 향을 내고 사과 농축액으로 광택을 더한 애플 페이스트리다. 이들이 향신료를 첨가한 것은 신의 한 수다. 한 입 먹을 때마다 그 향이 입안에 오래도록 맴돈다.
밤이 되면 카르아세 사이는 레스토랑 겸 내추럴 와인바인 바르바레아Barbarea로 변신한다. 이곳에서 만드는 피자는 ‘버섯’(마늘소스, 파르메산 치즈, 생 모차렐라 치즈, 아티초크를 넣는다)과 ‘친타 세네즈cinta senese’(살라미, 펜넬, 파르메산 치즈, 생 모차렐라 치즈, 후추, 세이지를 넣는다) 두 종류가 있다. 앞으로 케네스와 에바는 에스토니아에서 생소한 요리들로 메뉴를 확장할 계획이다. 무엇보다 작은 접시에 소분이 가능한 요리들을 구상하고 있는데, 두 사람은 이렇게 하나의 요리를 다 같이 나눠 먹어야 대화가 더욱 풍성해진다고 생각한다. “식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장 친밀한 대화법이죠.” 에바의 말에 케네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숙련된 솜씨

다음 날 케네스와 에바 그리고 이들의 친구 몇몇과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카르아세 사이를 다시 찾았다. 전날만큼 추운 아침이었지만 다행히 베이커리는 기분 좋게 따뜻했다.
케네스가 주방에서 능숙한 실력으로 양파와 마늘을 다진다. 그의 뒤로는 거대한 오븐에서 장작이 활활 타오른다. “이탈리아에서 수입했는데 너무 커서 문을 통과할 수 없었어요. 결국 인부들을 불러 벽에 구멍을 뚫었죠.” 그가 웃으며 말한다. 그러고는 갈색 설탕과 라스엘하누트ras el hanout 향신료로 간을 한 호박을 오븐에서 꺼낸 다음 달콤함을 더하기 위해 당근 농축액을 바른다. 이어서 작은 오븐으로 달려간 케네스는 짙은 레이브와 윤기 나는 브리오슈를 꺼내 보인다. 아마도 브리오슈 위에는 로즈메리를 올릴 것이다. 그는 이후로도 한 시간 내내 분주히 움직이며 신선한 파스타를 뽑고 사워도 빵을 굽고 불 위에 올린 수프를 휘젓는다. 중간중간 간을 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케네스는 즉흥적으로 새로운 요리를 만들고 있다. “전에 해본 적 없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게 제일 신나요. 이게 바로 요리의 묘미인 것 같아요.” 그의 손놀림을 보고 있으면 과거에는 그가 주방의 실력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상상하기 힘들다. “저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어요. 가족은 저와 어머니, 남동생뿐이었죠. 당시 음식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끼니에 불과했어요. 하지만 대학에서 요리를 배우면서 제 안에 불꽃이 일었죠.”

로즈메리 브리오슈.

정오가 가까워지자 다른 손님들도 속속 도착한다. 에바의 오랜 친구 레나르트 린드Lennart Lind는 초록색 니트와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멋쟁이다. 카르아세 사이에서 제빵사로 일하는 에릭 오티Erik Otti는 빨간색 비니를 썼고, 바르바레아의 소믈리에 로라 마리아 푸주Laura Maria Puju는 검은색 옷차림으로 세련된 멋을 풍겼다. 케네스가 준비하는 만찬에 자주 참여했던 이들은 그의 요리가 매우 익숙하다. “케네스가 만든 음식을 먹는 건 정말 행운이에요.” 로라가 다른 이들의 잔에 와인을 채우며 밝게 말한다.
잠시 후 첫 요리가 등장한다. 잘게 다진 허브와 뿌리채소를 레몬 향 요거트와 섞고 그 위에 발트해에서 잡은 흰살생선의 알을 올린 딥dip이다. 우리는 버터가 들어간 브리오슈와 고소한 레이브 조각으로 부드러운 딥을 싹싹 닦아 먹었다. 그다음으로 시칠리아식 파타사 소스를 이용한 진한 토마토수프가 준비됐다. “제가 먹어본 최고의 토마토소스를 사용했어요!” 케네스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수프 위에 구운 호박과 케이퍼, 마늘, 안초비 오일 그리고 케네스가 직접 키운 고추를 고명처럼 올렸다. 갈색 버터에 구운 사워도 빵도 빠지지 않는다. 로라가 파리에 출몰하는 쥐와 부러진 치아 등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로 분위기를 띄우면서 어느새 대화는 와인처럼 천천히 무르익는다.

카라아세 사이에서의 저녁 식사.

하지만 이야기는 결국 에스토니아 음식으로 귀결되었다. “에스토니아인들은 돼지고기와 채소를 많이 먹어요. 특히 감자를 아주 많이 먹죠. 전통적으로 고기를 조리하는 일곱 가지 방법이 있는데, 감자를 요리하는 방법도 일곱 가지예요.” 에릭이 설명한다. “물론 검은 빵도 필수죠.” 로라가 덧붙인다. 
혹독한 기후로 인해 발효와 절임은 에스토니아 음식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했다. “여름에는 과일 같은 열매를 절이고, 가을에는 버섯을 비롯한 모든 식재료를 절여요. 이렇게 저장한 음식을 지금처럼 추운 농한기 때 꺼내 먹죠.” 에릭이 창밖의 눈을 가리키며 말한다. “여름에는 신선한 재료를, 가을과 겨울에는 든든한 수프와 스튜를 주로 먹어요. 계절에 맞게 음식이 선택된다고 보면 되겠네요.” 그러면 봄에는? “저장고에 보관된 겨울에 먹다 남은 재료를 처리하죠.” 그가 크게 웃으며 답한다. 하지만 최근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전 세계 음식에도 큰 관심을 보인다고. 우리가 오늘 먹은 요리만 해도 중동과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았으니 맞는 말인 듯하다.
수프 그릇이 깨끗하게 비워지자 케네스가 수제 파스타와 현지 농장에서 사온 아티초크로 만든 카치오 이 페페cacao e pepe를 내온다. “카르아세 사이에서는 에스토니아 식재료를 최대한 많이 사용하려고 노력해요. 하지만 기후가 거칠기 때문에 농사가 쉽지 않아요. 그래도 더 좋은 방법을 찾으려고 계속해서 시도하고 있어요.”(케네스)

케네스의 브레드 푸딩.

파스타는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주는 완벽한 음식이지만, 오늘 식사의 주인공은 산딸기를 넣은 브레드 푸딩이다. “다이어트 중인데 아주 좋네요.” 레나르트가 유쾌하게 농담을 던진다. 브레드 푸딩은 에스토니아의 전통 디저트로 차가운 우유와 함께 먹는다고 한다. “학교가 일찍 마치는 날에 급식으로 나오기도 해요.” 에바가 이어서 설명한다. 하지만 케네스의 레시피는 그보다 더 고급스럽다. 베이커리에서 만든 크루아상이나 브리오슈를 타히티산 바닐라빈을 넣고 만든 커스터드크림에 적신 다음 토치로 윗면을 그을려 딱딱한 막이 생기게 한다. 나는 브레드 푸딩을 연거푸 세 숟가락 떠먹고 난 뒤 최고의 디저트라며 감탄한다. 다른 손님들도 내 말에 동의를 표한다. “최고! 최고로 맛있어!” 에릭이 감탄사를 연발하자 로라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하나예요”라며 수긍한다.
어느새 모든 접시와 잔이 깨끗하게 비워지고 레나르트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야 한다며 한탄한다. 오로지 케네스가 만든 음식을 즐기려고 도시 끝에서부터 눈보라를 뚫고 온 것이다.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이렇게 맛있고 즐거운 식사를 위해서라면 그 아무리 무서운 눈보라가 몰아친다 해도 막을 수 없을 테니.

 

여행 방법

인천공항에서 탈린까지 가는 직항편은 없다. 핀에어, 루프트한자, 터키항공, 아시아나항공 등을 통해 1회 경유해야 한다. 최소 16시간 25분 소요된다. 탈린에 있는 노르딕 호텔 포럼Nordic Hotel Forum의 더불룸이 1박에 약 12만원부터. finnair.com, lufthansa.com, turkishairlines.com, flyasiana.com, nordichotels.eu, visitestonia.com

 

 

글. 델 찬DELLE CHAN
사진. 카롤리나 비르치고르크KAROLINA WIERCIGRO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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