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빛 시칠리아의 뒷골목에서 노릇한 아란치니를 한입 베어 문 순간, 다갈색 소년 하나가 곁을 스쳐 뛰어간다. 레몬처럼 상큼한 땀내가 녀석의 등을 쫓아간다. 뜨겁고 느슨하고 약간 혼란스럽지만 끝내 인간적인 팔레르모의 골목. 내가 변한 것인지 섬이 변한 것인지 영화의 오래된 기억이 전과는 다르게 읽힌다. 몰라봤다. 편집된 키스들 앞에서 소년이 삼키지 못한 수줍음이 남자의 목젖이 된다는 것을.
시칠리아섬의 주도 팔레르모는 가장 과잉된 이탈리아다. 지중해의 콘트라스트는 지나치게 강하고, 시장통 상인들의 섬 방언은 더빙된 성우의 그것처럼 과장되어 들린다. 토마토소스처럼 붉게 물드는 지중해와 시칠리안 바로크 양식의 꿀빛 두오모 사이로, 시장 골목에 밴 튀긴 생선 냄새가 낭만과 현실의 경계를 허문다. 시칠리아의 바닥에는 각자의 기억이 나뒹군다. 바 비텔리Bar Vitelli의 나무 의자에 앉으면 영화 〈대부〉 속 알 파치노가 연기한 마이클 클레오네의 침묵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는 듯하다. 체팔루 골목에 들어서면 늘어진 세탁물 사이로 어린 토토의 시네마 천국 영화관을 찾아 두리번거리게 된다. 그렇게 이 섬에서는 과거의 기억이, 현재가 미래가 되는 일을 방해하곤 한다.
시칠리아는 지중해를 지나던 수많은 문명이 지층처럼 켜켜이 쌓인 하나의 맛 좋은 라사냐다. 그리스 신전 옆에서 아랍풍 디저트를 먹고 노르만 양식의 성당을 지나 스페인 광장을 걷다가 문득 마피아와 무솔리니 시절을 떠올리는 곳이다. 섬은 들어온 것이 빠져나가기 힘든 지리적 특성을 가진다. 시칠리아는 제 땅에 스쳐 간 운명과 문명을 아주 조금씩 남겨두었다. 그래서 시칠리아의 냄비에는 태양과 빈곤, 침략과 축제가 공존한다. 애써 지워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흔적이 남은 팔림프세스트palimpsest. 마치 오래된 필름 위에 새로운 장면을 덧입히듯 시칠리아 사람들은 그들에게 닥친 시간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 소화해냈다.
달콤한 미장센, 카놀리
“leave the gun, take the canolli(총을 버리고, 카놀리를 챙겨라).”
영화 대부의 이 유명한 대사는 아이러니로 꽉 차 있다. 사실, 영화의 대본에는 ‘총을 버려라’란 말만 적혀 있었다. 카놀리를 챙기라는 말은 마피아 클로멘자의 애드리브였다. 살인하러 나가는 남편에게 오는 길에 디저트를 사 오라던 아내. 그 시대의 죽음은 일상의 일부였고, 거친 삶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달콤한 디저트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팔레르모의 거리를 걷다 보면 인간이 끝내 무언가를 먹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카놀리는 바삭한 튀김 반죽 안에 피스타치오와 리코타 크림을 채운 디저트다. 아랍의 전통 디저트와 수도원 문화가 합쳐진 끝 모를 절제 속에서 피어난 욕망의 단맛이다. 남녀노소 달콤한 돌체를 즐기는 이탈리아 사람들조차 혀를 내두를 단맛이다. 결핍의 쓴맛 위에 피어난 달콤한 사치는 그 자체로도 몹시 아이러니하다. 카놀리의 단맛은 폭력과 일상이 공존하던 시기 죽음 속에서도 계속되던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카놀리를 먹는 방식은 ‘느리게’다. 너무 느려서 오히려 부르기 어렵다는 빈센초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의 아리아처럼 이 다디단 디저트는 먹는 것이 아니라 음미하는 쪽에 가깝다.
편집된 키스들, 카포나타
카포나타는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음식이다. 가지를 중심으로 한 채소 스튜로 토마토, 셀러리, 양파, 케이퍼, 올리브 등 지중해의 모든 것을 식초와 설탕으로 졸인다. 전채 요리인 안티페스토로, 빵의 곁들임으로, 생선 요리의 사이드로 차갑게 혹은 뜨겁게 시칠리아 식사의 모든 자리에 카포나타가 놓인다. 누군가는 항구도시의 외할머니가 만든 음식이라 하고, 누군가는 봄날 천사의 새콤달콤한 키스라고도 한다. 가장 지중해답고 가장 시칠리아다운 음식이지만 그 안의 재료는 언젠가 어딘가에서 온 것이다. 아랍에서 유래한 가지와 남미의 토마토, 그리스에서 이식된 올리브, 인도에서 훔쳐 온 레몬, 삼각무역의 산물 설탕, 그리고 로마가 재배를 강요한 포도주까지 카포나타 한 접시에는 지중해 문명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카포나타는 요리라기보다 기억을 저장하는 방식에 가깝다. 서로의 기억을 받아들이는 것은 시칠리아 사람들에게 익숙한 일이다. 역사가, 생활이, 문화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카포나타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이 흐르는 엔딩 크레디트와도 비슷하다. 누구도 쉽게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는 짙은 어둠의 순간. 화면 위로 수많은 이름이 지나간다. 떠난 사람들과 남겨진 사람들. 서로 다른 문명과 시대의 기억들. 영화의 클라이맥스라기보단 막이 내려진 다음의 여운. 기억을 곱씹는 순간. 그래서 시칠리아는 결국 그들 각자의 영화관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의 영화관이다.
기억의 데자뷔, 아란치니
우리에게 삼각김밥이 있다면 시칠리아에는 아란치니가 있다. 아란치니는 시칠리아의 영혼이라 불린다. 이 작지만 든든한 한 끼는 침략과 가난을 견뎌온 사람들의 휴대용 위안이다. 사람들은 밥으로 만든 오렌지를 종이봉투에 담아 들고 광장을 걷는다. 사프란 향이 나는 리소토 쌀에 라구, 치즈, 완두콩을 넣고 동그랗게 빚은 뒤 빵가루를 입혀 튀긴다. 튀겨낸 색이 노란빛이어서, 모양이 동그래서 작은 아란치아 오렌지란 이름이 붙었다.
시칠리아는 잃어버린 시간의 데자뷔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어 붙여진 키스 장면들처럼, 문명도 결국 잘려나간 기억을 다시 연결하는 일이다. 이 섬의 맛이 흥미로운 이유는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폭력과 빠져나갈 틈 없는 다양한 혐오. 우리는 지금 폭력이 일상이 된 시대에 살고 있다. 증오와 조롱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종군기자 뒤로 울리는 총성은 누가 적인지 말하라는 강요로 들린다. 누군가는 더 높은 벽을 세우고, 누군가는 타인을 밀어내는 말을 솔직함이라 부른다. 이 시대의 총은 더 이상 영화의 소품이 아니다, 과거가 현재를 삼키고 현재가 과거를 삼켜온 시칠리아에서 음식은 오래된 저항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끝내 삼켜지지 않은 시칠리아는 지금 우리에게 말한다.
총을 내리고, 기억을 상영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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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원은 ‘맞는맛연구소’에서 요리와 문화를 연구한다. 프렌치 레스토랑 ‘다이닝룸 뒨니’의 셰프다.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부에서 유전공학과 식품공학을 전공한 특이한 이력이 눈에 띈다. 미식 탐험을 위한 안내서 〈탐식수필〉을 통해 요리에 문화, 예술, 철학 등 서사를 덧입히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