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와 음식에 관한 그들의 탐닉
한국 식재료와 발효법 탐구자, 서울의 조셉 리저우드
달콤한 혁명, 파리의 파티시에 김나래
획기적인 생선 요리법, 시드니의 조시 닐란드
THE PIONEER PART 1
계절의 풍미를 찾아 나서다
조셉 리저우드
호주 태즈메이니아에서 나고 자란 조셉 리저우드 셰프가 서울에 정착해 야생의 식재료와 한국의 발효 요리를 탐구하며 자신만의 요리 세계를 확장하는 중이다. 매 계절 변화하는 제철 산물은 그로 하여금 늘 새로운 영감을 이끌어낸다.
글. 임보연 / 사진. 김현민
땅의 기운으로 말미암아 자란 식재료와 오랜 시간 이어온 지역의 문화를 반영해 완성된 한 그릇의 요리에는, 지나온 시간과 토양과 사람의 이야기가 응축되어 있다.
“몇 년 동안 전 세계를 여행하며,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중국과 태국 등 다양한 도시에서 팝업 레스토랑을 여는 프로젝트에 참여했었어요. 그 과정 중 한국을 찾게 되었는데, 흥미로운 식재료와 전통의 발효 영역에 매료되어 자연스럽게 한국에 머물고자 마음먹게 되었어요. 그러고는 2018년, 서울에 레스토랑 에빗을 오픈하게 되었습니다.”
조셉 리저우드Joseph Lidgerwood 셰프는 어린 시절 태즈메이니아Tasmania에서 성장하는 동안, 주말이면 어머니와 함께 요리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고 회상했다. 호주의 신선한 해산물과 육류 요리는 그의 유년기를 채우던 맛의 일부로 남아 있다. 이후 런던 레드버리Ledbury, 나파의 프렌치런드리The French Laundry 등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셰프로 일하며 다양한 지역의 다채로운 문화를 접하는 사이, 자연스레 그 지역의 식재료가 주는 풍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차곡차곡 쌓아온 경험은 그로 하여금 지역 산물을 바탕으로 새로운 맛을 상상하는 일로 이어지게끔 했다. 그런 그에게 한국의 식재료는 놀라운 경험을 선사했다고 말한다. 계절마다 다채롭게 구성되는 식재료는 흥미로웠고, 지역마다 자연환경을 반영한 산물은 그 맛이 섬세하게 달랐다고.
교감의 시간
조셉 리저우드 셰프의 공간은 때때로 연구소 같고, 어찌 보면 박물관 같기도 하다. 식재료를 아카이빙하고, 채소를 절이거나, 장을 담그고, 메주를 띄우고, 이를 바탕으로 메뉴의 스토리를 구성한 뒤 평범한 식재료에 셰프가 재해석한 요리법을 더해 창의적인 플레이팅을 선보인다. 덕분에 그의 요리는 간혹 예측을 벗어난 맛으로 생경한 즐거움을 선사하고, 익숙한 질감으로 누군가에게 작은 위안을 건네기도 한다.
가만 살펴보면 이 모든 요리의 근간에는 ‘발효’라는 카테고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긴 시간 담양을 오가며 명인에게 장 담그는 과정을 배우기도 했다. “발효는 맛에 형언할 수 없는 깊이를 더하고, 원래 재료에서 짐작할 수 없는 새로운 맛을 창조하는 과정이에요. 정말 특별하죠.”
OTT 왓챠에서 방영했던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레소피Resophy>에서는 소위 ‘차가운 불’로 요리하는 한국의 발효 분야에 매혹된 리저우드 셰프가 발효를 통해 세상 어느 곳에도 없는 조합과 균형에 도전하고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를 대표하는 몇몇 요리가 있는데, 그중 ‘메주 도넛’은 발효의 과정과 식재료의 재해석 을 잘 조화시킨 결과물이다. 메주 도넛을 만드는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오메기떡을 흑마늘 퓌레와 캐러멜라이즈한 크림으로 채운다. 그런 다음 메줏가루를 입히고, 그 위에 멸치로 만든 달고나로 데커레이션을 하고 메주에 올려 완성한다. 완성된 음식을 앞에 두고, 여행자가 되어 식재료가 온 토양과 그것이 발효된 시간을 감각 하며, 맛의 본질과 교감한다.
“장은 발효의 핵심이고, 메주는 발효에 있어 본질과 같죠.”
유럽이나 호주에서 사용하는 식재료를 한국에서는 찾기 어려웠지만, 한국에만 있는 다양한 식재료가 그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우렁이나 깻잎 등 한국을 잘 나타내지만 평범한 재료를 완벽히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에빗만의 요리를 완성한다. 그러기 위해서 재료가 어디에서 왔는지 공부하고, 농부 혹은 생산자와 교감하는 여정을 기꺼이 즐긴다. 원하는 식재료를 찾은 후에는 여행에서 얻은 영감을 활용해 에빗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음식을 창조한다.
이런 그의 요리를 두고 미쉐린 가이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했다. 조셉 리저우드 셰프에게 뻔하고 식상한 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직접 잡은 개미로 산미를 더한 녹차식혜 소르베부터 우지 타르트와 깻잎 주스까지 에빗의 메뉴에는 셰프의 감각으로 재해석된 창의적 요리로 가득하다고 말이다.
봄의 맛
새로운 계절 봄이 막 시작될 무렵, 조셉 리저우드 셰프를 만나러 갔다. 그가 봄나물을 채집하고,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러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과연 어떤 요리를 보여줄지 궁금증은 고조되었다.
옛것을 새로운 것으로 거듭나게 한다는 ‘법고창신’을 인테리어 콘셉트로 삼고 새롭게 선보이는 레스토랑 에빗. 부드러운 곡선과 목재를 사용한 공간에 오방색 중 창조의 뜻을 가지고 있는 푸른색을 더했다. 알고 보니 곡선의 요소는 한국의 항아리, 옹기, 방짜 등에서 그 형태를 가져온 것이란다.
공간 안으로 들어서니 이른 아침 에디터를 맞이했던 건 벌겋게 달아오른 숯불의 따뜻한 열기였다. 나무 접시 위에 가지런히 준비된 식재료는 더덕, 열무, 봄동, 두릅, 깻잎순, 각기 다른 식감과 향을 가진 봄 채소 다섯 가지다. 그중 봄동은 잘 말아서 압축한 뒤 쪄낸 것을 숯불 위에서 소스를 발라 구워내는 중이었다. 열무에는 고로쇠 수액을 정제해 완성한 시럽을 덧입혀 새로운 맛을 구현해내고 있었다. 깻잎순을 튀겨 연두색 만두피로 만든 다음에 속을 채우고, 그 위에 다양한 봄 채소를 올려냈다. 식감도 맛도 봄을 닮았지만, 예상한 봄과는 조금 다른 맛이다.
“여행을 좋아합니다. 다양한 지역을 직접 보고, 산물을 키워내는 농부와 만나는 일이 제게는 모두 영감이 되니까요. 최근에는 경북 영양군 흥림산 자락을 오가며 고로쇠 물에 관해 알게 되었고, 그것을 이번 계절에 활용할 수 있게 되었죠. 다음엔 경기도 일대로 여행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명이나물을 채집할 생각이죠.”
에빗의 메뉴와 술의 페어링
오로지 한국의 식재료만을 사용해 선보이는 요리에 각기 다른 술을 매칭해 그 맛을 배가시켜보자.
메주 도넛과
오마이갓 스파클링 약주
백목련의 화사한 향과 적당한 탄산이 메주 도넛의 맛과 잘 어우러진다.
참기름 캐러멜과
듀발 르로이 로제 2002
참기름의 풍미를 담아 만든 캐러멜의 달콤함은 샴페인과 만나 기분 좋은 식사의 마무리를 돕는다.
THE PIONEER PART 2
생선에 보내는 찬사
조시 닐란드
호주 출신 조시 닐란드 셰프가 시드니에 있는 세인트 피터 레스토랑에서 아가미부터 지느러미까지 전체를 다 쓰는 획기적인 방식으로 생선 요리법에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글. 소피 알바삼
두려움이 좋은 결정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하지만 조시 닐란드Josh Niland는 이제 막 시작한 사업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덕분에 오히려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최대한 활용할 지 곰곰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처음 시드니의 패딩턴에 세인트 피터 레스토랑을 열었을 때 그가 가진 것은 생선이었다. 그로부터 7년 후, 그는 생선 전부를 다 써서 요리하는 거물이 된다.
닐란드에게 있어서 생선 전체를 쓰는 것은 지속가능성 측면에서뿐 아니라 사업상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세인트 피터를 시작할 때 다른 어떤 것보다도 너무 비싼 재료를 주문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접근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생선을 들여놓고 첫 번째 청구서를 받았는 데 400만원 중에서 220만원 정도가 버려지는 부분이었죠. 저는 여기서 기회를 엿보았어요.”
닐란드는 생선 전체를 쓰기 시작했고 시드니의 식문화에 자신만의 틈새시장을 개척했다. 주방을 맡은 팀이 딱 세 명뿐이라 폐기물을 저감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그는 생선으로부터 ‘완전한 수익’을 얻고 싶었다. “서양에서는 오랫동안 생선은 생선살만 먹는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더 많은 부분을 쓸수록 다른 질감을 다루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으니까요. 제대로 이해하고 해결하려면 얽혀 있는 많은 부분을 풀어내야만 했죠.”
일반적으로 호주 사람들이 생선에서 먹는 부위는 3분의 1, 나머지 3분의 2가 버려지는 셈이다.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소비하는 수산물의 약 70%를 수입하고 있으니 비용도 만만치 않다. 닐란드는 질 좋은 생선을 사서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그는 생선 전체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생선을 고기처럼 다룬다. “갑자기 이전과 다른 15개의 요리법을 내 손에 쥐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돼지나 소에서 등심이나 안심이나 목살을 얻듯이 이런저런 생선도 부위별로 쓸 수 있게 다듬게 됩니다.” 닐란드는 각기 다른 생선의 약 90%를 쓰며 간, 눈, 비늘 등을 포함해 거의 모든 부위로 만들 수 있는 요리와 조리법을 만들었다. 그는 청새치 은두자부터 모르타델라 플랫브레드까지 다양한 생선 소시지와 슈니첼, 샤퀴트리를 만든다.
닐란드는 시드니에서 북쪽으로 몇 시간 가면 나오는 메이틀랜드Maitland에서 자랐는데 어렸을 때 소아암을 앓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음식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10대 시절, 카페에서 일하고 현지 레스토랑에서 견습생으로 훈련을 받은 뒤에 영국의 스타 셰프 헤스턴 블루멘탈이 이끄는 팻 덕 레스토랑의 개발팀과 스티븐 호지스가 이끄는 시드니의 피시 페이스(지금은 문을 닫음) 레스토랑 등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피시 페이스에서 일할 때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밤 닐란드는 생선에 랩을 씌워두는 걸 깜빡한 탓에 밤새 돌아가는 주방 냉풍기 바람에 생선이 다 말라버렸다. 호지스는 이 실수에서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지만 닐란드는 어쨌든 그물고기를 쓰기로 했다.
“우리가 구현하고 있는 관행이
쓰레기통에 버려질 생선을 구해서
더 넓은 조리법을 적용하고
이 과정에서 각자 역할을 하도록 장려하고 싶습니다.”
“생선 표면이 어찌나 잘 말랐는지, 아마 제가 요리했던 생선 중 최고였을 거예요. 생각해보면 뜨거운 기름을 가득 두른 뜨거운 프라이팬에 젖은 생선을 넣는 게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죠”라고 그는 말한다. 이후 2016년에 아내 줄리와 함께 세인트 피터 레스토랑을 열었고, 닐란드는 자신만의 생선 건조 숙성 방법을 개발했다. 눕혀서 말리면 바닥에 닿는 면이 축축하고 부드러워지기 때문에 물고기 전체를 씻지 않은 채 갈고리에 꿰어 서늘한 방에 걸어두고 며칠에 걸쳐 천천히 수분을 잃게 한다. 물론 식품 안전과 숙성 기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생선을 내놓는 세계 최고 레스토랑에서는 ‘어제의 생선은 오늘만큼 좋지 않으니 생선을 하나 더 사자’라는 생각을 먼저 합니다. 이런 원칙 때문에 수많은 물고기가 쓰레기통에 들어가게 되죠. 하지만 예를 들어 민대구의 경우 들어온 첫날을 기준으로 일주일까지는 상태가 좋다는 것을 안다면 그 물고기의 95%가 최상의 상태로 접시에 오르도록 할 충분한 기회가 있어요. 유일한 방법은 건식으로 관리하는 거죠.”
말리고 숙성시킨 생선의 맛은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들어온 지 3주 된 참치 토막을 먹은 손님들이 ‘와, 내가 먹어본 생선 중에 제일 신선하네요’라고 말할 때면 참 재미있습니다. 네, 3주 된 참치가 맞습니다. 신선함보다 맛이 더 중요해요.”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조달된 호주산 생선은 정기적으로 바뀌는 7개짜리 테이스팅 코스 메뉴에 쓰인다. 낚싯줄로 잡은 가다랑어와 새콤달콤한 라디키오를 곁들인 절인 머리Murray산 대구 지방, 바비큐 포도, 마카다미아 등이 나올 수 있다.
세인트 피터는 닐란드가 그룹 CEO인 아내 줄리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세인트 피터 이후에 피시 부처리라는 생선 가게 두 군데를 열었고, 피터맨이라는 일품요리 레스토랑과 포장 전문점 차콜 피시까지 이들의 목록에 추가되었다. 목록의 장소 모두가 시드니에 있다.
닐란드는 시드니 현지에서 세인트 피터로 명성을 얻었지만 2019년에 <더 홀 피시 요리책>이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냥 보면 요리에 쓰이는 생선의 각 부위와 손질, 보관, 경화 등 단계별로 어떻게 하는지 알려주는 설명서처럼 보인다. 하지만 고등어 블러드 블랙 푸딩부터 생선 카레까지, 거의 쓰지 않는 호주산 재료로 요리하는 방법도 있다. 이 책은 매년 요리사, 레스토랑 경영자, 작가, 언론인에게 주는 제임스 비어드 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고, 이후 닐란드는 두 번째 책을 출판했다.
그는 사업 규모가 커지면서 물고기의 각 부분을 적합한 상황에서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즐겨 쓰는 생선 부위에 수요가 쏠리는 병목현상을 받아들일 수는 없으니까요. 세인트 피터 메뉴에 라사냐나 케밥을 넣을 수는 없습니다. 차콜 피시에서 물고기 눈으로 만든 아이스크림을 아이들에게 줄 수도 없고요.”
피터맨에는 스테이크하우스에서 영감을 받아 생선의 가운데 부분을 잘라 요리한 황다랑어 ‘샤토브리앙’ 메뉴가 있고, 차콜 피시는 남은 황다랑어 부분을 다져서 치즈버거를 만든다. “우리는 이제 생선 부위별 사용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물고기가 들어오고, 마지막으로 나가는 것은 아가미와 담낭뿐이죠.”라고 닐란드는 말한다. 닐란드의 목표는 사람들이 물고기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도록 돕는 것이다. “우리가 구현하고 있는 관행이 쓰레기통에 버려질 생선을 구해서 더 폭넓은 조리법을 적용하고 이 과정에서 각자 역할을 하도록 장려하고 싶습니다.”
조시 닐란드의 대표 메뉴 3가지
소금과 식초에 절인 킹 조지 휘팅King George whiting 요리
세인트 피터에서 내놓는 요리로, 소금과 샴페인 식초에 절인 작은 흰 살 생선 토막이 재료다. 절인 생선에 고르달 올리브, 정어리 가루,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오일로 양념하고 따뜻한 사워도 빵과 요구르트에서 배양한 버터를 곁들여 먹는다.
황다랑어 더블 치즈버거
닐란드는 이 버거가 “지속가능성, 건조 숙성, 생선을 일반 육류처럼 다루는 것, 생선의 내장 사용 등을 모두 한 줌에 담은 요리”라고 설명한다. 포장 전문점 차콜 피시에서 참치의 머리와 내장 등 각종 부위를 갈아서 양념해 패티로 만든다. 이 패티를 황새치 베이컨, 바비큐소스, 치즈, 피클과 함께 부드러운 버거 빵에 넣는다.
남부 오징어와 노란 지느러미 참치 은두자
세인트 피터에서는 오징어를 숯불에 구워 얇게 썬 뒤 황다랑어로 만든 은두자nduja 위에 올려놓는다. 이 은두자를 손님이 직접 길고 얇은 오징어 파스타에 섞어 먹으면 된다.
THE PIONEER PART 3
몰입으로 빚은 독창적인 미감
김나래
프랑스의 권위 있는 음식 평론 가이드로 참신하고 실험적인 누벨 퀴진에 주목하는 〈고에미요〉가 ‘2024년 최고의 파티시에’로 호명한 김나래 파티시에. 제과 부문에서 외국인 여성을 선정한 것은 처음이며, 한국인으로도 최초다. “독자적인 예술성으로 새 물결을 구현하고 있다”라는 평에는 그녀의 부단한 열정과 진득한 태도가 함축되어 있다.
글. 김민주
파크 하얏트 파리 방돔에서 수석 제과장으로 활약하고 있어요. 나래 파티시에가 만든 디저트를 살펴보니 정교한 예술 작품처럼 느껴집니다. 어떤 메뉴를 고안하고 있나요?
호텔 소속 파티시에로 활동하고 있기에 여러 가지 디저트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 퓌Pur의 자연 재료 기반 가스트로노믹 디저트와 카페 잔느Café Jeanne의 클래식 디저트, 이외 부활절을 기념하는 달걀 모양의 초콜릿과 크리스마스를 위한 부쉬드 노엘 등 다양합니다. 최근에는 출근하며 늘 지나치는 파리 방돔 광장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어요. 방돔 광장에는 하이엔드 주얼리 부티크가 모여 있는데, 부쉐론과 까르띠에 모두 팔각형을 강조하는 것에 호기심이 생겼죠. 그리고 루이 14세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가 쥘 아르두앙-망사르Jules Hardouin-Mansart가 설계한 방돔 광장의 팔각 형태에서 착안한 갈레트를 만들었습니다. 테두리는 설탕 공예를 입힌 아몬드를 장식해 보석처럼 표현했어요. 루비 브로치 형상의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블루베리를 활용해 색을 자연스럽게 물들였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블랑마리라고 하는데, 과일을 중탕해 맑은 즙을 추출하는 거예요. 색채를 조절하기 위해 각각 허브와 초콜릿을 더해 무스를 만들었어요.
디저트를 창작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제철 재료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재료 본연의 맛을 최대한 살리는 데 중점을 두고 있어요. 그래서 색소나 첨가물을 최대한 덜 쓰려고 합니다.
최근 새롭게 창작한 디저트는 무엇인가요?
파리에 있는 파티시에들에게 부활절 초콜릿 공예와 크리스마스 케이크 창작은 큰 연례행사 중 하나예요. 올해 초에는 파크 하얏트 서울과 협업을 준비 중이어서 부활절 초콜릿 공예를 고안할 수 있는 시간이 더욱 한정적이었어요. 서울에서 파리로 돌아오자마자 이틀 밤을 새워 창작에 몰두했죠. 이번 부활절 초콜릿 공예는 보석 상자를 표현했습니다. 서랍을 열면 10가지 종류의 과자가 풍성하게 담겨 있어요. 다양한 맛이 담겨 있는 과자 상자를 받고 행복을 느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완성했습니다.
창의력뿐 아니라 오랜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일이겠어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같은 작업을 반복해서 수행하는 것도 쉽지 않죠.
미식의 고장인 프랑스에서 치열하게 생존해나가고 있구나 생각해요.(웃음) 메뉴를 개발하는 데 보통 짧으면 2주, 길게는 3개월까지 시간이 소요됩니다. 시즌마다 새로운 것을 선보여야 하기 때문에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머릿속은 언제나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어요. 3D 몰드가 발달해서 이를 활용하는 파티시에도 있지만, 저는 나만의 개성이 담겨 있는 데다 장인 정신이 깃든 수작업을 좋아해요.
파크 하얏트 서울에서도 나래 파티시에의 디저트를 맛볼 수 있게 되었어요.
프렌치 구테French Goûter는 프랑스어로 오후의 간식을 뜻해요. 프랑스인들은 오후에 빵에 초콜릿을 껴서 먹는 등의 간식 문화가 있거든요. 서울에서 파리의 문화를 경험해보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파크 하얏트 서울의 수석 제과장인 이지명 파티시에와 교류하며 메뉴를 구성했습니다.
그중 입안을 헹구는 동시에 입맛을 돋우는 프리 디저트 ‘더블 크림’은 월악산의 벌 화분과 금귤 조림, 상쾌한 펜넬 그라니테 등을 곁들인 아이스크림이에요.
시그니처 디저트 4종 중에 ‘벚꽃&자몽’은 한국에서 이맘때 제철 재료로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다 벚꽃이 떠올랐어요. 벚꽃차를 우려 만든 바바로아즈 크림과 선홍빛 자몽 과육의 상큼한 질감이 어우러져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죠. ‘포레누아’는 체리와 초콜릿을 주재료로 한 프랑스의 전통 케이크인데, 이를 변형해 반전을 주었습니다. 오묘한 빛깔의 조약돌 형상 안에는 뱅쇼에 조린 야생 아마레나체리가 들어 있죠.
한국에서의 삶이 파티시에로서의 여정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파크 하얏트 사이공 등지에서 해외 생활을 하다가 프랑스까지 오게 되었는데, 늘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 “제과를 어디서 처음 배웠니?”예요. 그럴 때마다 저는 한국에서 배웠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합니다. 충청남도 당진에서 성장했는데, 어렸을 때는 시골에서 생활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생각했어요. 돌이켜보면 텃밭에서 갓 수확한 과일과 채소의 맛, 닭장에서 꺼낸 신선한 달걀의 고소한 맛을 깨우쳤던 것이 디저트를 구현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죠. 그래서 제가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한국적인 요소가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것 같아요. 프랑스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쌀 푸딩의 경우, 처음에는 낯설었는데 한국 쌀을 이용해 푸딩을 만들고 야생 산딸기와 제철 루바브를 곁들여 봤어요. ‘망고 패션 소르베를 감싼 단호박 떡, 통카 향의 호박 조청 타르트’는 떡과 조청을 활용했습니다.
〈고에미요Gault & Millau〉의 ‘2024년 최고의 파티시에’로 호명되었 때의 소감이 궁금합니다.
인복이 많은 편이어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제가 잘한 것보다 먼저 이곳에 와서 터와 길을 닦아놓은 한국인 선배님들 덕도 있고, 한국의 소프트 파워가 더해져 이렇게 영광스러운 결과를 얻지 않았나 싶습니다. 처음에 프랑스 왔을 때는 문화 차이가 정말 크다고 느꼈거든요. 그래서 외국인에게 이런 상을 수여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더욱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죠.
파티시에로서 추구하는 철학이 있다면요?
매일 좋은 품질의 디저트를 꾸준히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더욱 몰두하고 열중하고 자 합니다. 손님들이 제 디저트를 맛있게, 편하게 드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미각 일깨우기
파크 하얏트 서울의 더 라운지에서 김나래 파티시에의 창의성이 담긴 디저트를 음미할 수 있다. 호텔 최고층에 위치한 더 라운지에서 강남의 파노라마 풍경을 조망하며 미식을 향유하는 것은 그 자체로 예술적인 경험. 파크 하얏트 서울의 더 라운지는 세계적인 미식 가이드 〈라 리스트LA LISTE〉가 선정한 ‘최고의 페이스트리 숍’이기도 하다. 더 라운지를 이끄는 정상협 셰프와 협업한 프렌치 구테는 4월 21일까지, 이지명 수석 제과장과 협업한 시그니처 디저트는 11월 30일까지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