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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 전해지는 구멍가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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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호

 

“3년간 구멍가게 100여 곳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수집해온
어느 국문학 전공자의 진솔한
여정을 따라가본다.”

 

여행에서의 경험은 현재 내가 사는 시간과 공간을 넓히곤 한다. 길 건너에 새로 생긴 다코야키 전문점을 지날 때면 매일 저녁 열두 알씩 사 들고 가던 시치조역七(条駅) 7번 출구 앞 다코야키 가게가 떠오른다. 추운 겨울 TV 화면을 가득 채운 바다 앞에선 찬비 내리는 추암 바닷가에서 뜨거운 컵라면을 후후 불어 먹던 기억이 난다. 생각 없이 무작정 걷고 싶어지면 가까운 뒷산에 올라 지난봄 완주했던 우도 올레길을 되짚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 동네는 때로 교토가 되기도, 동해가 되기도, 제주가 되기도 한다. 

여행은 내면을 성장시키기도 한다. 내 경우, 이야기를 들으러 가는 답사 여행이 그렇다. 나는 문학을 전공한 학부 때부터 구술 현장에서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다. 스무 살 무렵 충북 단양으로 떠난 학술 답사에서 한 산골 노인이 구연하는 인생 이야기에 감동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그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구술 채록 활동을 했고, 우리 옛글을 문화산업에 연계하는 일도 했다. 그러던 중 생애담 채록을 위한 현장 답사를 제안받고 어떻게 하면 보다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고심한 끝에 화자의 삶의 터전으로 직접 들어가 보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구멍가게로의 여정은 3년간 100여 가게를 거친 뒤에야 마무리됐다. 그곳에서 나는 머리로만 알던 삶의 가치를 몸으로 살아낸 사람들을 만났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지금도 나는 크고 작은 고민이 생길 때마다 그날의 경험들을 종종 꺼내어 보곤 한다.

 

와룡수퍼의 달콤한 막걸리 한잔

바라는 게 많아 마음이 가난해지면 나주로 가는 게 좋다. 구멍가게를 찾아가는 길은 늘 익숙하고도 새로웠다. 호젓한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1년에 한두 번, 도시에서 내려올 꼬맹이를 기다리던 외할머니네 파란 대문이 떠올라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곤 했다. 하지만 이내 생소한 땅과 미지의 구멍가게를 만날 때면 낯선 여행지에 들어선 것처럼 묘한 설렘과 긴장이 교차했다. 그렇게 조심스러운 여행자의 발걸음을 단번에 멈춰 세운 가게가 바로 나주에 있다.

와룡수퍼를 발견한 건 순전히 담쟁이 덕분이었다. 겨울도 절정을 훌쩍 지나 봄을 향해 마음이 먼저 기우는 2월, 나주를 관류하는 영산강을 끼고 1번 국도를 달리다가 영산강에서 봉황면 쪽으로 갈라져 흐르는 황룡천을 따라 818번 도로에 올랐다. 남도 최대의 곡창지답게 보이는 곳곳이 끝을 알 수 없는 논이고 밭인데, 지난가을 수고를 끝으로 말라비틀어져 밑동만 남은 볏단만이 휑한 겨울 벌판에 가지런히 줄지어 있었다. 황량한 그 풍경에 스산한 기운마저 감도는데, 인적 드문 도로변에 우뚝 서 있는 노란색 버스정류장 표지판이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몇 걸음 뒤에 앙상한 담쟁이덩굴이 벽을 타고 피어난 낡은 집 한 채가 들어서 있었다. 

허름한 미닫이문에는 이 집의 정체성을 알리는 빛바랜 담배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아담한 집채는 녹슨 슬레이트 지붕으로 덮였는데,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허술해 보여도 그 위에 꾹 눌러놓은 묵직한 타이어 덕에 웬만한 바람에는 끄떡없을 성싶었다. 가게 안은 생각보다 훨씬 더 옹색했다. 버려진 케이블용 목재 드럼을 주워다 식탁으로 재활용했고, 트럭용 사이드 미러를 가게 곳곳에 매달아 드나드는 사람을 확인하는 CCTV처럼 사용했으며, 해묵은 신문지를 도배지 삼아 벽을 발랐다. 고작 하나뿐인 가겟방과 구색만 겨우 갖춘 부엌도 여섯 식구의 살림을 책임지기엔 턱없이 작고 엉성했다. 보이는 그대로, 와룡수퍼 아주머니의 삶에는 가난이 도사리고 있었다. 가진 것이 없어서 먹고사는 건 순전히 남의 집 품팔이에 의지해야 했고, 걸핏하면 쫓겨나는 셋방살이를 전전하느라 평생 보따리 싼 횟수를 꼽자면 열 손가락이 모자란단다. 어떻게든 정착하고 싶었던 아주머니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이 구멍가게였다. 

오전 열 시 무렵, 노란색 장판을 덧씌운 투박한 테이블 앞으로 일찍부터 막걸릿잔을 기울이는 술참꾼들이 하나둘 자리한다. 아주머니는 어제 저녁 먹고 남은 고등어조림을 내놓기도 하고, 새콤한 묵은지나 달달한 시금치나물을 올려주기도 한다. 천 원 한 장 들고 와서 천백 원짜리 설탕 봉지를 찾는 할머니께는 잔돈은 됐다며 선심도 쓴다. 그러면서 쌀 한톨이 아쉽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별것 아닌 반찬이나 동전이라도 나눌 수 있게 됐으니 더 바랄 것 없는 부자란다. 또 구멍가게 덕분에 서러운 셋방살이도 끝났고 아이들도 장성해 제 살길을 찾아 나가서 비좁았던 방도 이제는 넓기만 하다며 웃어 보인다.

나는 아주머니를 세 번 만났다. 그때마다 버거운 가난을 살아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그 얼굴이 해사하고 평온했다. 작년 봄, 마지막으로 아주머니를 찾아갔을 때 와룡수퍼의 시그너처인 담쟁이 벽 앞에 자그마한 화단이 생겼다. 거기에 아주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모란을 심고 탐스러운 자줏빛 꽃이 피어나는 날을 기다린다고 자랑하셨다. 어쩐지 아주머니의 행복이 하나 더해진 것 같아서 좋은 날이었다. 

 

미력슈퍼의 넉넉한 품앗이

녹차밭, 꼬막, 소설 <태백산맥>. ‘보성’ 하면 언뜻 떠오르는 것들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보성은 나에게 미력슈퍼의 다른 이름이 됐다. 미력슈퍼에 가는 길은 매번 유난히 해가 밝고 초록이 우거졌다. 이 가게에 닿으려면 총면적의 삼분의 이가 산지인 화순의 정중앙을 종단해야 한다. 임야도 산 못지않게 넓어서 보성까지 이어지는 29번 국도는 탁 트인 들판과 남도 특유의 완만한 산세를 양 옆구리에 끼고 내달린다. 겹겹이 포개지는 자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이 땅의 이름인 화순(和順)처럼 포근하고 말랑해져 도착할 즈음이면 보성을 향해 마음이 활짝 열린다. 경쾌한 하이패스 통과음을 뒤로하고 보성IC를 지나면 미력면을 가로지르는 보성강이 마을과 마을 사이를 휘돌아 흐른다. 그 물굽이 너머 면사무소와 파출소, 초등학교, 우체국을 이웃에 두고 목 좋은 삼거리에 미력슈퍼가 자리한다. 

미력슈퍼는 언제나 활기차다. 너나없이 모여드는 가게 앞마당에 동네 소식이며 농사 정보를 들으러 오는 사람, 이웃집 품앗이하다 새참 먹으러 오는 사람, 서울 사는 아들네 보낼 택배를 맡기러 오는 사람, 차마 그냥 지나갈 수 없어 안부차 들르는 사람 등 매번 이유도 각양각색인 사람들이 손바닥만 한 가게에 북적인다. 이렇게 된 데는 푸근한 주인 아주머니의 몫이 크다. 아주머니가 하는 일은 참 많다. 물 찬 논에서 방금 나온 흙투성이 발 눈감아주기, 번거로운 택배 송장 도맡아 써주기, 집집마다 농사 일정 꿰고 있기, 틈틈이 찾아오는 어르신들 말벗 해주기, 더러 돈 대신 들고 오는 의자며 테이블로 외상값 퉁쳐주기. 

아주머니는 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너그럽게 받아안고 있었는데, 그것들을 조금도 짐스럽게 느끼지 않았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저마다의 사정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논밭으로 쫓아다니기만도 버거운 농번기라 흙 마를 새 없는 맨발을 이해한다.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택배물을 처리하고 싶은 마음도 내 맘 같다. 흉작이 들어 고생한 만큼 수입이 나오지 않거나 임금을 제때 받지 못해 주머니 사정이 빈약한 이웃들 형편도 빤하다.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농촌의 일상은 아주머니의 머리와 마음에 두루 꿰어 있다. 그 깊은 공감을 바탕으로 지금의 묵묵한 배려가 생겨났다. 아는 것을 넘어선 이해심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미력슈퍼를 그냥 지나치기 섭섭한 곳으로 만들었다. 그런 아주머니의 가게에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서로 다른 타인들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방법이 담겨 있었다. 

아주머니를 다시 만났을 때는 새해가 얼마 지나지 않은 정월이었다. 연일 매섭던 칼바람도 그날은 무슨 일인지 기세가 누그러졌다. 겨울 볕이 봄처럼 환하게 부서지는 가운데 아주머니는 백발이 곱게 내려앉은 동네 어르신과 가게 앞 앉은뱅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사이 좋은 부녀처럼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왁자한 사람들로 수선스럽던 풍경 대신 부쩍 한가해진 가게가 어색하다 싶었는데, 조금 전까지 한 무리가 몰려와서 놀고 갔다며 미력슈퍼의 여전한 인기를 확인시킨다. 그날 아주머니가 내 손에 꼭 쥐여 준 껌 한 통이 아직도 자동차 컵홀더에서 덜거덕거린다. 살다가 종종 누군가를 이해하지 못해 그가 미워지려 할 때 나는 그 플라스틱 껌 통에서 넉넉한 아주머니의 배려를 보곤 한다. 

 

삼태상회의 씩씩한 외상 장부

반복되는 걸림돌에 주저앉고 싶을 때는 장성으로 향한다. 장성은 상당히 생소한 지역이었다. 특별히 이름난 관광지나 남다른 특산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들어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곳에 가봐야겠다는 생각 역시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구멍가게를 찾아다니면서 가장 많이 드나든 곳이 장성이다. 내가 사는 광주에서 가깝기도 하지만,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가게가 유달리 많았기 때문이다. 장성으로의 두 번째 여정은 25번 호남고속도로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출발했다. 웬만한 국도보다 나을 것 없는 2차선 고속도로를 그래도 시원스레 뚫린 맛으로 달리다 보면 정읍과 장성의 경계 즈음인 백양사IC에 닿게 된다. 내장산 아랫자락에 터를 잡은 백양사를 오른편에 두고 그 반대쪽으로 핸들을 돌리면 장성땅 최북단이다. 아침 일찍 서둘러 나선 길은 그렇게 이 지역 가장 윗마을에서 시작됐다.

삼사십 년 이상 한자리에 뿌리내린 구멍가게는 쌓인 시간만큼 곡진한 사연을 하나쯤 품고 산다. 달성마을을 지나 연산마을에서 한번 앉으면 두세 시간은 뚝딱인 저마다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쟁이며 내려오다 보니 어느새 광주와 맞닿은 남쪽 끝이다. 어중간한 시간 탓에 이쯤에서 오늘의 여정을 접을까 망설이다가 욕심을 냈다. 우연히 마주친 우체부 아저씨가 이웃 마을에 새색시 때부터 가게를 해온 할머니가 있다고 귀띔해주었기 때문이다.

눈앞에 도시를 두고 또다시 구불구불 시골길을 따라 들어가니 마흔 가구가 채 안 되는 소담한 마을 입구에 파란 기와를 얹은 삼태상회가 엿보였다. 갓 돌 지난 손주를 보이러 온 캄보디아인 며느리와 하루 일과를 끝내고 가게 앞 평상에 모여든 농군들로 주변이 시끌벅적하다. 짧은 커트 머리에 빨간 스웨터를 입은 할머니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고 무뚝뚝하기만 했다. 해그림자가 길어지고 집집이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올 때쯤 삼태상회를 메웠던 인적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그제야 할머니는 묵혀두었던 속을 하나씩 꺼내 보이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평생은 노름꾼 남편이 남기고 간 빚과의 전쟁이었다. 결혼 초부터 화투를 달고 산 남편 탓에 가족의 생계는 전적으로 할머니의 몫이었다. 조그만 구멍가게로는 모자라 일손이 필요한 곳이면 주저 없이 나섰다. 하지만 그렇게 모아놓은 돈은 모이는 족족 판돈으로 탕진되기 일쑤였다. 희망 없는 나날에 지쳐 헤어질 결심도 해보고 어린 세 아들을 두고 집도 나가봤지만 끝내 모질지 못해 돌아오곤 했다. 돈새는 남편이 죽고 나서야 할머니에게는 빛이 보였다. 떠안은 빚은 많았지만 성실하게만 살아내면 못 갚을 것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열심을 달고 산 할머니의 일기가 이 가게의 외상 장부다. 모서리가 다 해진 케케묵은 금전출납부에는 마을 사람들이 들고 간 라면이며 두부, 막걸리에 대한 기록뿐만 아니라 남의 집 콩밭 매주고 무를 뽑아주며 흘린 할머니의 땀내나는 노동이 담겨 있다. 1년 365일 가게 문 한 번 닫지 않고, 일감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 끝에 할머니는 산더미 같은 노름빚을 털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모으는 족족 쌓이는 번듯한 통장도 생겼다. 할머니의 살아온 이야기가 평온하게 바뀔 무렵, 나에게 콕 들어와 박힌 말이 있다. “여자도 강하믄 다 그러고 살아, 남자 지지 않애!” 무심히 던진 그 한마디는 삶이 준 깨달음이자 성별을 넘어선 진리였다. 당시 할머니 뒤로 저물던 붉은 석양은 이제껏 내가 본 노을 중 가장 강렬하고 애잔했다.

작년 봄, 다시 할머니를 뵈러 갔을 때 삼태상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거대한 산업단지가 들어서 있었다. 할머니를 다시 뵐 수는 없었지만, 걸림돌을 디딤돌 삼아 강인한 삶을 일궈냈듯 할머니는 분명 어디에서든 꿋꿋하게 살아가고 계실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에게 여행은 질문을 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쉬고 싶어서 가볍게 떠나든, 고민을 해결하려고 작정하고 떠나든 늘 질문이 따라다녔는데, 길 위에서 보고 듣는 경험이 그 답의 실마리가 되곤 했다. 그런데 구멍가게를 찾아다니면서 다른 방식의 여행이 있다는 걸 알았다. 환경이 허락하지 않아 한평생 그 자리에 머물러야만 하는 붙박이 삶으로의 여행. 이런 여행에도 질문은 있었다. 먹고사는 문제, 함께 살아가는 지혜, 포기하지 않는 방법 등 핍진한 현실의 물음들이었다. 구멍가게 사람들은 작고 좁은 생활 터전에서 저마다의 답을 찾아냈다. 곡절 많은 삶을 대가로 체득한 그 답은 크고 넓고 깊었다. 소란한 삶의 지점을 지날 때마다 꺼내 볼 수 있는 질문과 조언이 있어서 감사한 여정이었다. 

 


박혜진은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 특히 살아온 내력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인생 이야기를 즐기는 문학인이다. 3년 동안 구멍가게 100여 곳, 그리고 구멍가게 주인 50여 명과 단골손님들을 인터뷰해왔다. 저서로 <구멍가게 이야기>가 있다.

글. 박혜진HYE-JIN PARK
사진. 수민SOOMIN(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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