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켜켜이 쌓이는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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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호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는
수백 년 동안 이주해 온 사람들이 가져온 레시피로
다층적인 식문화가 발달해왔다.

(왼쪽부터)
쿠알라룸푸르 강변 산책로를 따라 다채로운 벽화를 감상할 수 있다.
치킨 카레, 코코넛 라이스, 삼발소스로 속을 채운 이칸빌리스를 곁들인 나시르막.

나는 지금 레너드 티Leonard Tee와 함께 와롱 올드 차이나Warong Old China 식당의 대리석으로 된 테이블에 앉아 있다. 이 식당의 오너인 티는 말레이시아계 중국인으로 지난 20년 동안 쿠알라룸푸르에서 사업을 일궈왔다. 와롱 올드 차이나는 그가 공을 들인 세 번째 식당이다. 티에게 말레이시아의 다문화적인 특징을 가장 잘 담아낸 요리가 무엇인지 묻자 잠시 고민하더니 이렇게 답한다. “말레이시아, 중국, 인도 각각의 특색 있는 레시피를 보유한 나시르막nasi lemak입니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코코넛 향이 나는 쌀, 바삭하게 튀긴 이칸빌리스ikan bilis(멸치), 구운 땅콩, 싱싱한 오이, 현지 칠리소스인 삼발sambal 소스가 한데 어우러진 나시르막은 말레이시아를 한 그릇에 함축한 요리이다. 말레이시아 최초의 우주비행사로 알려진 셰이크 무자파 슈코르Sheikh Muszaphar Shukor 또한 나시르막의 대표성을 알리고자 2007년 우주비행을 떠날 당시 이 음식을 챙겼다고 한다. 
차이나타운은 쿠알라룸푸르 교통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KL센트럴 근처에 자리한다. 다양한 종교가 모여 있는 말레이시아의 거대한 수도, 그중에서도 바로 이 센트럴에서 다국적 푸드 맵을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겠다. 쿠알라룸푸르에는 말레이시아가 독립하기 전 세워졌던 식민지 시대의 건물과 중국계 포르투갈인들이 운영하는 상점, 현대적인 고속도로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층 건물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다. 말레이시아의 음식 문화만큼이나 복잡한 다세대 건축물의 집합체라 볼 수 있다. 매콤한 카레, 맑은 수프, 화덕에 구운 고기, 진한 향신료 등 다양한 요리는 말레이시아의 오래된 이민의 역사를 그대로 나타낸다. 또한 그 역사에는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아라비아, 인도, 중국에 이르는 다양한 나라의 영향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바투Batu 동굴은 쿠알라룸푸르 북쪽 외곽에 위치한 사원으로 힌두교 순례자에게 큰 의미가 있다.

와롱 올드 차이나에서 만드는 다소 단순해 보이는 쌀 요리를 먹으면서도 묵직한 역사의 무게가 느껴진다. 방금 내가 맛본 페라나칸식 나시르막은 중국과 말레이시아 또는 인도네시아의 문화가 혼합되는 과정 중에 탄생했다. 쌀 본연의 맛에 코코넛밀크의 달콤한 향과 찰진 식감이 더해져 은은한 풍미를 자아낸다. 참고로 페라나칸은 말레이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혼혈의 후손을 의미한다. 여기에 닭다리 튀김이 곁들여 나오는데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새어 나온다. 이 나시르막을 여러 번 곱씹다 보면 쌀과 코코넛과 닭고기를 합친 것 이상의 창의성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다.
다음으로 믈라카Melaka식 락사laksa(국수)와 신선한 포멜로pomelo(자몽과 비슷한 과일) 샐러드가 식탁에 오른다. 이 락사는 코코넛밀크를 듬뿍 넣어 특유의 톡 쏘는 맛을 잡았고, 샐러드는 감귤과 채소가 궁극의 조화를 이룬다. 한편 와롱 올드 차이나에서 만드는 부아켈루악buah keluak(볶음밥)은 삼발소스와 케파양kepayang(두리안과 비슷한 과일)을 첨가하여 어두운 색을 띤다. 향은 유럽의 송로버섯을 연상시킨다. 그 외 닭가슴살과 새우에 타피오카 가루를 입혀 튀긴 크래커를 바나나 잎에 얹어 주는데 후식으로 딱 알맞다.

두순에서는 가오리가 아니라 연어로 아삼 페다스를 요리한다.

오픈 하우스Open House는 말레이시아 전통 레스토랑으로 앤드루 웡Andrew Wong이 운영을 도맡고 있다. “말레이시아 요리는 훨씬 복합적이에요. 나시르막 이상의 다채로운 음식이 존재하죠. 예를 들어 숲에서 채집한 약초로 선보이는 요리가 있어요. 이 고급스러운 요리는 준비 과정부터 예상을 크게 뛰어넘습니다.” 곧이어 오픈 하우스는 잘란스토너Jalan Stonor 거리로 터를 옮길 예정이다. 약 452m 높이에 달하는 페트로나스 타워Petronas Towers와도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다. 비슷한 시기에 페트로나스 타워의 울람Ulam 허브 정원도 문을 연다고 하니 여행자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다. 참고로 이 정원은 UKM 말레이시아 국립대학교와 원주민 인재를 양성하는 곰박 정글 학교Gombak's Jungle School가 협력하여 조성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웡은 국가유산위원회인 자바탄 와리산 네가라에서 입수한 조리법과 함께 일하는 셰프들이 전국에서 습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말레이시아 음식을 재발견하는 중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의 두 번째 식당인 두순Dusun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2022년에 문을 연 두순은 쿠알라룸푸르의 중심지인 방사르Bangsar 쇼핑센터 모퉁이에 위치한다. 얼마 전에는 미쉐린 가이드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전채 요리로 일곱 가지의 삼발소스와 바삭바삭한 케로폭keropok(생선을 크래커처럼 튀긴 요리)에 도전해본다. 발효된 두리안으로 만든 템포야크tempoyak(조미료)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끈끈한 질감을 자랑한다. 내 혀끝에서는 마치 탄산을 가미한 버터처럼 느껴진다. 케로폭을 충분히 음미한 뒤 신맛과 매운맛이 감도는 동남아시아식 생선 스튜 요리인 아삼 페다스asam pedas로 넘어간다. 보통 아삼 페다스를 조리할 때 가오리를 쓰곤 하는데 이곳에서는 연어를 사용한다. 웡에 따르면 “연어가 카레의 톡 쏘면서도 새콤달콤한 맛을 흡수하는 데 더욱 적합한 생선”이라고. 음식을 먹을수록 쿠알라룸푸르의 현대 미식이 전통 요리에서 기인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또 다른 식당은 방사르 인근의 럭키 보Lucky Bo다. 오너인 에드워드 수Edward Soo는 이곳을 ‘말레이시아식 스테이크 하우스’라고 소개한다. 수는 대부분의 요리에 호주산 스테이크를 사용하고 있다. “저희 식당에 왔던 어느 손님의 소개로 호주산 스테이크를 쓰게 되었어요.” 그는 현지인들이 자주 찾는 쌀국수인 차콰이테오char kway teow를 끓일 때보다 기름진 고기를 넣어보고 싶었다고 한다. 어느 손님의 제안은 묘수가 되었고 그가 꿈꾸던 완벽한 차콰이테오를 만들 수 있었다. “요즘은 손님들이 이 메뉴만 찾고 있어요. 이러다 쌀국수에 면보다 고기가 더 많이 들어가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차이나타운에서 다음 요리를 찾아 헤맨다. 헝그리 테이퍼 앤 라굴라Hungry Tapir and LaGula는 최근 쿠알라룸푸르에서 가장 트렌디한 비건 채식 메뉴를 선보이는 곳이다. 오너인 신시아 로드리고Cynthia Rodrigo는 아들 트리스탄Tristan, 딸 마키사 스미턴Makissa Smeeton과 함께 이 식당을 오픈했다. 매콤한 템페와 비건식 토르티야, 버섯으로 만든 사테satay 꼬치를 한 접시 주문해본다. 템페는 콩을 발효시켜 만든 인도네시아 음식으로 닭고기 맛이 나는 콩고기 튀김을 매운 간장소스에 찍어 먹는다.


♦ 쿠알라룸푸르의 풍미 4가지

1 CWZJ 퀴진

조셉 앙Joseph Ang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중국 차와 광둥 요리를 동시에 맛볼 수 있다. 얇게 썬 돼지 볼살 바비큐나 갓 잡은 신선한 해산물, 쓰촨식 가지조림을 곁들인 닭튀김을 추천한다. 맥주를 포함해 음식 3개가 코스로 나오는 메뉴가 약 10만원.
2 싱 차파티 하우스
이 식당은 인도 북부 펀자브 지역을 모티브로 삼았다. 버터 향이 나는 달dal(콩) 요리, 탄두르 화덕에서 구운 고기, 바삭바삭한 난, 오븐에 구운 납작한 로티 등을 내놓는다. 실제로 인도와 남아시아에서 인기가 많은 메뉴들이다. 두껍지만 크림처럼 부드러운 달 마카니dal makhani(콩, 버터, 크림 등으로 조리한 인도 요리)를 머금으면 천천히 끓인 렌틸 콩의 고소함에 반하게 된다. 주류는 팔지 않으며, 음식 3개가 나오는 코스가 약 1만7000원.
3 비잔
늦은 밤까지 인파로 북적이는 창캇부킷빈탕Changkat Bukit Bintang 지구의 골목 끝에서 장인의 손길이 느껴진다. 20년 동안 식당을 운영해온 비잔은 날마다 광범위한 말레이시아 메뉴를 개발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코코넛 밀크를 넣어 조리한 소고기 오포opor(스튜)나 캐러멜을 입힌 코코넛과 양치식물을 곁들인 새우 요리나 템포약tempoyak(두리안으로 만든 조미료) 요리가 이색적이다. 와인을 포함해 음식 3개가 코스로 나오는 메뉴가 약 8만5000원.
bijanrestaurant.com
4 더 큐리오서티 아이언 리버
칵테일 바 겸 예술가들의 아지트로 주목받는 곳. 상점이 즐비한 푸두Pudu 거리에 숨어 있으며 활기찬 예술 공간과 정원을 보유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바에서 내놓는 음식보다 고급스러운 요리를 선보이는데 그중 해산물, 삼발소스, 페타이petai(콩)가 들어간 볼레 피자를 추천한다. 양고기 다리, 돼지갈비, 매콤한 삼겹살 또한 쿠알라룸푸르 최고의 스테이크 하우스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칵테일과 함께 음식 3개가 코스로 나오는 메뉴가 약 8만5000원.
thecuriousityironriver


쿠알라룸푸르의 독특한 스카이라인을 만들어내는 쌍둥이 페트로나스 타워.

KL센트럴에서만 미식의 혁신이 일어나는 건 아니다. 널찍하게 뻗어나간 쿠알라룸푸르 교외에서도 색다른 음식을 맛볼 기회는 무궁무진하다. 2022년 미쉐린 가이드가 처음으로 쿠알라룸푸르와 페낭의 식당들을 다루자 현지인들은 도심 내 97개의 식당보다 교외의 소박한 식당들이 더욱 만족스럽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수방자야Subang Jaya 남서쪽에 위치한 SS15 쇼핑센터는 현지인들이 선호하는 식당가로 도심에서도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차이나타운에 있는 파사르 세니Pasar Seni에서 기차를 타고 30분만 이동하면 된다. 역에서 내리니 식당들이 줄지어 있는 푸드코트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중 빅패밀리 레스토랑Big Family Restaurant에 들어가기로 한다. 점심시간에 도착한 탓에 내부는 이미 현지인들로 꽉 차 있다. 다들 자리에 앉아 납작하고 넓은 면이 인상적인 팬미pan mee, 카레를 곁들인 이포Ipoh식 치청펀chee cheong fun, 톡 쏘는 맛의 아삼 락사asam laksa 등 다양한 국수 요리를 후루룩 먹는다.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자리한 로작Rojak은 현지인들이 인정하는 인도 식당이다. 간판에는 매콤한 과일 샐러드를 뜻하는 로작이 적혀 있지만 오이, 감자, 두부, 해산물 등을 넣은 파셈부르pasembur 샐러드가 가장 유명하다. 갓 튀겨내어 먹고 나면 손가락에 따뜻한 기름이 남는 바다이vadai도 빼놓아서는 안 될 메뉴. 이어서 얼음과 시럽과 아이스크림을 함께 담아낸 아이스 카캉ais kacang, 코코넛밀크와 야자 시럽을 첨가한 녹색 젤리인 센돌cendol 등 달콤한 디저트가 차례로 나온다.
길이 격자로 난 SS15 쇼핑센터 한가운데에서 주문 즉시 음식을 만들어주는 패스트푸드 시장을 발견한다. 유리 진열대 안에 놓인 금속 쟁반마다 나시르막 재료가 잔뜩 쌓여 있다. 시장 구석에 위치한 게라이 오파Gerai Opah 식당에 앉아 주문하면 재빠르게 음식이 서빙된다. 삼발소스가 너무 매워서 눈과 코가 찡하지만 멸치와 땅콩을 추가하니 밥이 술술 들어간다.
식당의 오너는 라바디아 빈티 무하마드 하산Raba'adiah Binti Md Hasan이라는 말레이시아인인데 그녀가 다가와 불처럼 뜨거운 소스의 비결을 알려준다. 고추를 으깨거나 다지는 대신 말린 채로 넣고 4시간 동안 푹 끓인다고. 매일 새벽 4시부터 준비하여 아침식사 전까지 특제 소스를 완성한다. 매운 음식을 먹느라 흐릿해진 눈으로 마지막 남은 한 숟가락을 보니 쿠알라룸푸르가 왜 미식의 성지인지 단번에 깨달아진다. 이는 식당의 수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라바디아가 “그저 열심히 할 뿐이에요. 그게 전부죠. 하지만 손님이 음식을 다 먹고 난 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면 저도 신이 나요”라며 그 이유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무상킹Musang King은 일종의 프리미엄 두리안으로 여타 품종보다 두 배나 비싸게 팔린다

풍미를 완성하는 5가지 요소

1 두리안
과일의 왕이라 불리지만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냄새가 지독할 수도 있다. 두리안을 짜릿하게 맛보려면 과육을 넣은 과자나 디저트에 도전해보자.
2 국수
쿠알라룸푸르의 국수 요리는 매우 다양하다. 닭고기 국물로 끓이는 팬미부터 지글지글 볶은 뒤 라임을 뿌려 내놓는 마막mamak까지. 물론 말레이시아를 대표하는 볶음국수인 미고렝mee goreng 또한 일품이다.
3 삼발소스
인도네시아가 원산지인 삼발소스는 고추, 새우, 마늘, 생강, 샬롯, 파, 야자 설탕, 라임즙 등을 넣어 매운맛을 내는 말레이시아의
국민 조미료다.
4 향신료
카레부터 부아 켈루악 등 음식의 풍미를 살리기 위해 넣는 강황, 그린 카다멈 등을 이른다.
5 나시르막
코코넛 쌀밥에 오이, 튀긴 멸치, 삼발소스, 구운 땅콩을 곁들인 전통적인 아침식사.

 

 

 

글. 마르코 페라레세MARCO FERRARESE
사진. 게티, 스톡푸드, AWL 이미지스, 킷 옌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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